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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이야기
제1부 그 땅의 사람들
여행안내 회고

1995년에 서울과 텔아비브를 직통하는 이스라엘의 엘알 비행기가 운항한다는 소식을 듣는가 했는데, 몇차례 왕복하다가 정기 항로를 개설하지 못하고 철수한다기에 서운했다. 그러나, 최근에 듣자하니 대한항공의 정기 노선이 생겼다고 한다. 어쨌든 앞으로는 성지순례의 기회가 훨신 더 많아질 것 같다. 우리나라 기독교 신도들의 성지 순례가 급증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였다고 생각된다.

가족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살고 있던 1970년대 초반에는, 성지 순례를 하려고 우리나라에서 직접 이스라엘로 오는 여행객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다만, 목회자들이나 신도들이, 유럽 여행길에 짬을 내어 중동의 외진 한 구석에 있는 이스라엘을 찾는 것이 고작이었다. 우리나라 순례객들을 위한 여행사가 있던 것도 아니고, 체계적인 안내가 준비되어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살던 유일한 한국인 목사 가족에게는, 비록 한 해에 수백명 밖에 안되는 목회자와 평신도 순례자들이라 해도, 감당하기 벅찬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들 평생에 한 번 다녀가는 이들이었다.

70년대 초에, 유명 무명의 많은 국내 인사들이 다녀갔다. 그 때마다 퍽이나 난처했던 것은 다름 아닌 이 ‘평생에 한 번’ 오는 순례객들이 한 달이 멀다 하고 우리 집에 들이닥치는 일이었다. 교포 가족이라고는 겨우 두 집밖에 없는 데다가, 목사라고는 필자 혼자 뿐이었기 때문에, 안면이 있거나 없거나 우리 나라에서 오는 교인들은 그야말로 ‘주 안에서 한 형제자매’라는 생각에서 허물없이 찾아 주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 덕분에 우리도 외롭지 않게 지낼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공부에 지장을 받기도 하였다. 한여름 한창 때에는 거의 매주일 예고도 없이 새로운 방문객들이 밀려온 일도 있다. 그들이 나를 찾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순례여행 길잡이로 나를 앞세우고 싶기 때문이었다.

성지를 방문하는 이들은 대개 삼사일 정도의 일정을 잡아 가지고 온다. 삼일 동안 1천 킬로미터를 달리면, 9만 평방 킬로미터 안에 있는 사적과 성지와 고고학 발굴 현장 등을 달리는 말타고 산 구경하기 식으로나마 볼 수가 있다. 그런데 그들과 어울려 삼사일 동안 재미있게 돌아다니고 나면, 며칠간은 책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겨우 마음 가라앉히고 다시 서재에 들어가 앉아 있으면 영락없이 또 ‘평생에 한번’ 성지를 순례하는 구도자의 방문을 받곤 한다.

“여보, 민 목사, 공부는 평생 동안 할 수 있는 게 아니요? 우린 이거 정말 평생에 한번이외다.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언제 다시 여기에 와 보겠소!” 이쯤 나오는 순례객들은 국내 대교단의 증경 총회장을 포함한 대선배 목사님들이다. 이런 분들은 여행 안내뿐 아니라 다음 행선지 입국 비자 수속은 물론 공항까지 모시고 가서 출국 절차까지 다 해 드려야 흐뭇해 하신다.

사실 이런 일은, 이스라엘로 공부하러 가면서, 처음부터 각오했던 바였다. 성지에서 공부할 수 있는 특전을 다른 이들과 나누어 가지는 뜻에서라도, 예루살렘 체류의 목적을 ‘공부’와 ‘여행 안내’로 세우고, 우리나라에서 오는 방문객을 위해 넓은 아파트를 마련하고 안내하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도록 하자고 아내와 함께 다짐했다. 그래서 손님이 쓸 침구도 별도로 준비하였고 방도 따로 마련했다. 

대부분의 순례객들이 나흘 안팎의 단기간 동안만 체류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효과적이며 경제적인 여정을 연구해 보기도 하였다. 차는 여행사의 것을 쓰지 않고, 개인 택시를 운전기사와 함께 하루 50불 정도로 전세를 내서 사용했다. 우리는 여행할 때마다 거의 우리에게 전속된 아랍인 운전기사 ‘에이사’(예수)군을 데리고 다녔다. 카톨릭 신자이기도 한 그 젊은이는 베들레헴에서 자기 아버지와 함께 운수업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원이 많을 때는 그들 부자가 다 동원되기도 했다. 택시에 자리가 남을 때에는 에이사의 아내도 우리와 동행하기도 했다. 여행 안내를 맡아야 했던 나는 안내를 위한 특별 수업도 틈틈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유학 첫해에는 전공과목보다도 이스라엘 여행 안내, 역사, 지리, 성서 고고학, 민속학 등의 서적들을 더 많이 탐독하였다.


여행자들이 이삼 명씩, 때로는 오륙 명씩 떼를 지어서 오면, 우리는 먼저, 주어진 여건에 맞는 여행 계획을 세운다. 어디를 방문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보며, 어떤 물건들을 살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다 결정한 다음에, 순방 대상 지역에 대한 공부를 한다. 도상 실습부터 하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하루는 북쪽(예루살렘에서 출발하여 수가성, 세겜, 사마리아, 므깃도, 나사렛, 가나, 갈릴리 해변의 여러 곳, 요단계곡, 여리고 등을 거쳐 돌아오는 길), 다음날은 남쪽(베다니, 쿰란동굴, 사해, 엔게디, 소돔, 브엘세바, 헤브론, 베들레헴), 그리고 또 하루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신·구 시가지. 기브온, 기럇여아림, 엠마오 등) 여행을 한다. 보통 하루 4백 킬로미터 이상씩을 달린다. 점심 식사는 일체 다 준비해서 트렁크에 싣고 가다가, 북쪽으로 여행하는 날은 므깃도 언덕이나 갈릴리 해변에서, 남쪽으로 여행하는 날은 사해를 따라 내려가다가 엔게디나 소돔 부근에서 하곤 한다.

그런데 이렇게 평균 한 달에 한 번씩 이스라엘 전국을 누비는 강행군 순례를 하다 보면 한 해에 무려 12주(석달!)라는 엄청난 시간을 여행에 할애하는 셈이된다. 이렇게 되면 학교 공부가 밀리기 시작한다. 신학교육기금(Theological Education Fund)에서 이 사실을 알았다가는 유학 목적에 어긋난다고 하여 장학금을 중단할 것만 같았다. 비상수단을 강구해야만 했다. 그래서 안내를 아내에게 맡겨 보았다. 여행할 때마다 함께 다녔던 것이 주효하여 아내가 오히려 여행자들에게 더 인기를 얻었다.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그것으로 해결되지는 않았다. 얼마 후부터는 아내가 방문객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을 보면 슬그머니 질투도 났지만, 역마살을 타고 난 것도 아닌데, 그보다는 벌써 여행에 맛이 들어 버려서 남들이 여행 준비하는 것을 보고서는 서재에 틀어박혀 앉아 있을 인내심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1975년부터 2년 동안은, 신학교육기금(TEF) 총무로 있던 코(C.K.Coe) 박사의 주선으로, 탄투르에 있는 ‘에큐메니칼 연구소’(Ecumenical Institute for Advanced Theological Studies)로 들어가서, 가족을 지척에 두고 별거해야만 하는 홍역을 치르기도 하였다. 탄투르는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경계에 있는 작은 언덕이다.


성지를 순례하는 이들은 제각기 여행하는 태도와 관심과 느낌이 다르다. 성지를 순례했다는 증명사진이라도 마련할 셈인지, 가는 곳마다 계속 사진만 찍어 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면서 계속 기도하고 촛불을 밝히느라 일행에서 처지는 이들도 있다. 그런 이들 가운데 지금도 생각나는 분은 홍현설 박사의 부인이신 최영희 장노님이다. 귀국 후에 여행기라도 쓰려는지, 아니면, 설교 노트를 준비하는 것인지, 설명을 들으면서 열심히 메모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잠자리에 들기 전에 여행 일기를 쓰기도 한다. 지금은 은퇴하신 동성감리교회의 김덕순 목사님 같은 분들이었다고 기억된다. 가는 곳마다 상점에 들려 기념품 사는 일을 빼놓지 않는 이들도 있고, 열심히 땅을 뒤지며 진기한 돌들만 찾는 이들도 있다. 심지어 여행 사흘쯤 되면 그만 지쳐 버려서 어떤 곳을 방문하더라도 아예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이렇게 보면 됐지 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번은 교인들이 아닌 한 무리 여행자들을 안내해 본 적이 있다. 예루살렘에서 모인 국제펜클럽회의에 참석한 인사들이다. 그들을 안내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목회자들이나 일반 신도를 안내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가 하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여기가 바로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던 법정입니다”라고 설명하면, 교인 아닌 사람들 중에서는, 예수는 알아도 빌라도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예수가 왜 재판을 받았느냐고 묻기까지도 한다. 성서를 많이 아는 교인일수록 안내하기가 쉽다. 안내가 쉬울 뿐 아니라 오히려 안내자가 더 배우게도 된다. 그런 이들 중의 한 분이 당시 후암교회에서 시무하던 한제호 목사였다고 생각된다. 성서 내용에 훤한 이들은 성지에 오면 마치 옛 고향에라도 온 듯이, “아 여기가 바로 거기군요” 하며, 가는 곳마다 감격하고, 찾는 곳마다 반긴다. 

안내를 하다 보면 꽤 까다로운 이들도 있다. 먼저 다녀간 사람에게 성지 여행에 관해 상세히 듣고 온 사람들이다. 먼저 다녀 간 사람은 일주일간이나 머물렀기 때문에 여유 있게 여행을 한 것인데, 자기는 겨우 이삼일밖에 머물 수 없는 형편이면서도, 일주일이나 머문 사람이 본 것을 다 안 보여 준다고 생떼를 쓰니 말이다. 
여행 안내를 하다 보면 낮에는 낮에대로 분주하고 밤에는 또 여행자들이 들려주는 갖가지 진기한 여행담과 고국의 최근 소식에 밤 깊어 가는 줄 모른다.
급하게 성지를 다녀가는 방문객들은 자동차로 광야를 달릴 수밖에 없다. 멀리 미국이나 우리나라에서 오는 순례객들에게는 시간적 여건이나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장기 체류를 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가까운 유럽 여러 나라에서 오는 순례자들 중에는 순례 기간을 오래 잡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텔아비브 로드 공항에 내리면 호텔로 가지 않고 값싼 호스텔이나 교회가 경영하는 호스피스를 찾는다. 교회마다 순례자들을 위한 숙박 시설을 갖춘 곳이 많다. 시설은 초라하지만 분위기는 순례자들을 위해서는 오히려 더 좋은 편이다. 딱딱한 나무 의자, 음산한 방, 삐걱거리는 침대, 냄새나는 침대요, 벽에 걸린 고색창연한 성상(聖像), 조촐한 식탁 등을 대하고 보면, 갑자기 구도자의 고행에 참여한 듯한 경건함까지 느낄 수 있다.

성지 순례는, 부득이한 경우가 아닌 한, 걸어다니는 것이 더 좋다. 손에 여행 안내서한 권을 들고 읽으면서 걷는 순례자들의 모습도 흔히 눈에 띈다. 사실, 팔레스틴을 보려면 걸어다녀야 한다. 자동차는 관광 도로만 달리고 그런 차를 타고 여행하는 이들은 특별한 장소와 건물과 기념품 상점만 들르게 되지만, 걸으면서 여행하는 이들은, 흙을 밟을 수 있고,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