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 대학교 기숙사란 참 묘한 곳이다. 어쩌면 그 곳은 가장 손쉽게 전체 이스라엘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인지도 모른다. 우선 ‘기숙사’란 개념이 우리와 다르다. 전체 2만여 명의 학생들 중에서 그 절반 가량이 기숙사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 규모가 단순한 하나의 건물이 아니라 ‘기숙사 촌’이라고 부를 만한 규모의 기숙사군(群)들이 예루살렘 시내 대여섯 곳에 흩어져 있다. 대학""교 총무처가 기숙사 전체를 총괄하기는 하지만 각 기숙사군마다 시설, 입사, 퇴사를 관리하는 관리 사무소가 있다. 그리고 각 층(層) 또는 동(棟) 별로 30-40명의 학생에 사감(舍監)이 한 사람씩 있다. 그러나 이 사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사감이 아니다. 히브리어로 사감을 남자는 ‘마드리크’, 여자는 ‘마드리카’라고 하는데 그것은 곧 ‘안내자’를 뜻한다. 약 3백여 명의 사감들은 기숙사를 관리하는 총무처 관할 아래 있지 않고, 학생 자치회 관할 아래 있다. 뿐만 아니라 사감들은 모두 재학생 중에서 나온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문자 그대로 학생들의 안내자로서 기숙사 안의 복지시설 점검, 학생들 간의 친교 기회 마련, 상담 등이다. 그런 만큼,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개념의 사감이 아니다.
기숙사 사칙(舍則)같은 것도 없는 것 같다.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5년 동안 거기서 살아본 나의 기억에 누가 그런 것을 거론하거나 상기했던 일이 없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어떤 준수 사항의 지시나 시달이 없는 것은 기숙사 뿐 아니라 이스라엘 사회 전반에 걸친 특징이기도 하다. 구약성서를 통해서 알려진 옛 이스라엘은 율법 사회였지만, 헌법마저 없는 오늘의 이스라엘은 그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사회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남·녀 기숙사가 따로 구별되어 있지 않다고 하는 점이다. 일반 시민들이 사는 아파트에 남자 아파트와 여자 아파트가 구별되어 있지 않듯이 기숙사도 그렇다는 식이다. 심지어, 처음에 관리 사무소에서는 같은 성(性)끼리 한 방에 집어넣지만, 얼마 지나고 보면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이 서로 방을 조정하여 연습 결혼생활을 시작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에는 창녀가 없다.” 이것은 한국인 한량들의 객심(客心)을 달래기 위해 내가 하는 말이다. 그런데 실은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이스라엘이 금욕주의 사회라는 뜻은 아니다. 구태여 창녀가 따로 존재해야 할 필요성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친구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말은 이쯤 해 두기로 한다. 여하튼, 남녀 대학생들 사이에서, 젊은이들 사이에서, 남녀 교제는 우리가 보기에 무질서에 가깝거나 예사스러운 일이다. 성의 비신성화의 일면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종교적인 유대인 학생들은 이들과 판이하다. 대학교 당국에서는 그들을 위해서 남·녀 기숙사를 따로 마련해 준다. 학교의 실내 수영장도 일주일에 하루쯤은 이들만을 위해 다른 학생들의 사용을 금지한다. 어느 하루를 정하여 그날 오전 중에는 남학생들만이 수영장에 입장할 수 있다. 그날 오후는 여학생들만이 수영장에 입장할 수 있다. 그 외의 다른 날은 남녀 공용이다.
기숙사 마을마다 회당, 슈퍼마켓, 그리고 ‘모아돈’(사교 클럽)이 있다. 이 세 곳 역시 외국 학생들이 이스라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외면할 수 없는 곳들이다. 회당은 유대인의 신앙 전승이 계승되는 통로이다. 거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유구한 신앙이 어떻게 전승되는지를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마시며 식생활 양식이 어떠하며 그들의 기호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슈퍼마켓만 한번 둘러보면 족히 알 수 있다. 그리고 밤에 열리는 ‘모아돈’은 ‘싸브라’(팔레스틴에서 나고 자라난 토박이 유대인 청년들)의 사랑과 슬픔, 그들의 취미를 이해할 수 있고, 여러 계층의 젊은이들을 폭 넓게 한꺼번에 만날 수 있고, 또 쉽게 그들의 마음을 열어 볼 수 있는 곳이다. 때로는 이 모아돈에 군인 장성이 평상복 차림으로 나타나서 예의도 없는 젊은이들과 어울려 시국을 논하고 국방 문제를 토론하기도 한다. 때로는 기독교 계통의 외국 선교사들도 이 곳을 찾아와 젊은이들을 만나는가 하면, 시커먼 복장, 시커먼 수염의 젊은 랍비들도 찾아와서 유대교의 전통을 재확인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하베르 크네셋’(이스라엘의 국회의원)이 가끔 나타나 여론을 듣기도 하느 것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생활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외국 학생들은 유대교의 특별 절기나 안식일 때문에 곧잘 골탕을 먹는다. 날마다 슈퍼마켓에 가서 먹거리를 사와야 하는데 공휴일에는 그 슈퍼마켓이 닫히고, 그래서 멀리 아랍 시장을 보러 가려 해도 버스마저 쉬기 때문에 고충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그러니까 안식일(금요일 해질 무렵부터 토요일 해지기 직전까지) 전이나 공휴일 전날은 다음날 쓸 것까지 미리 잔뜩 사다가 냉장고에 넣어 두어야 한다.
그런데 가끔 불상사가 발생한다. 안식일에 먹으려고 사다 놓은 통닭이나 살코기나 과일들이 감쪽같이 없어지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각자 자기 냉장고는 자기 자물쇠로 잠그지만 그것을 교묘히 열고 가져가 버린다. 한 때 내가 있던 기숙사에서 안식일이 아닌데도 그런 일이 거의 날마다 발생했다.
그 때 내가 있던 기숙사는 15개 방에 30명이 살던, 기브앗 람의 시쿠네 하엘레프 4 / 6 기숙사였다. 모두가 이스라엘 학생들이었고 나와 나의 미국인 방친구만이 외국인이었다. 먹거리 도난 사건이 빈번해지자, 기숙사생들 사이에 도둑을 잡자는 결의가 나돌았다. 여러 학생들의 오랜 추적 끝에, 그 도둑이 다름 아닌 같은 기숙사 안에 사는 연극을 전공하는 한 이스라엘 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혐의에 불과했지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늦게 기숙사로 돌아 와 보니, 삼사 십여 명 기숙사생 중에서 약 반 가량의 학생들이 부엌 식당에 모여 사생회(舍生會)를 하고 있다. 현장범을 체포해 놓고 논고와 재판(?)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참 난처한 일이 내게 닥쳤다. 그 녀석이 바로 내 냉장고를 열고 계란을 훔치다가 잡혔으니 날더러 사생회에다가 정식으로 고발을 하라는 것이다. 난처했다. 그 범인(?)하고는 평소에 친교가 두텁지는 않았지만 부엌에서 가끔 우연히 만나서 요리도 같이 하고 식사도 같이 하곤 하던 사이였다. 언젠가는 그 녀석 방에 들어가 커피를 대접받으면서 벽에 가득히 붙은 음화를 감상한 적도 있다. 여자를 낚는 법과 만족시키는 법에 대해서는 아주 도통한 친구이다. 그 녀석은 거의 날마다 밤늦게 다른 여자를 제 오토바이 뒤에 태워 기숙사로 데리고 와서 자는 놈이다. 그런데 그런 짓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하던 녀석들이 지금 음식 훔친 것을 규탄하고 있는 것이다.
방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가 내 방으로 오더니 빨리 나와서 그 녀석을 함께 규탄하자고 윽박지른다. 그래서 나는 “글쎄, 이런 사태가 생긴 것은 참 안된 일이다. 그러나 우리 동양에서는 먹을 것 훔친 것 가지고는 이렇게 잔인하게 처벌하지 않는다”고 나무랐다. 잠시후 이번에는 그 범인을 동정하는 다른 한 학생이 내 방으로 오더니, “네가 잘 말해 주면 그가 풀려나올 수 있으니 다른 학생들에게 선처를 호소해 달라”는 것이다. “너나 우리나 다 배고픈 놈들 아니냐”는 것이다. 이 녀석은 그 범인과는 친한 사이로서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학생이다. 그러나 범인이 이미 다른 학생들의 냉장고도 몇 차례 열었다는 것을 인정해 버린 마당에 나의 그런 호의는 아무런 보람이 없었다. 결국 사생회에서는 그를 퇴사시키기로 결정하였고 본인도 그것을 받아 들여 다른 동네 기숙사로 옮겨갔다.
그 사건이 있은 지 얼마 후, 나는 한 이스라엘 학생을 붙들고 따졌다. “내가 보기에는 그 녀석이 이 기숙사에 날마다 다른 여자를 바꾸어 데리고 와서 놀아난 것이 더 규탄 받아야 할 터인데 거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가 먹거리 훔친 것만 가지고 사람을 그렇게 창피를 주어 쫓아내느냐?”고 물었다. 그 친구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가 제 침대에서 어떤 여자와 놀아나든 그것은 그의 사생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가 간섭할 바 아니지만, 사유 재산을 침해하는 도둑 행위는 타인에게 피해를 입힘으로 공동생활의 질서를 어지럽히니 응당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번은 서울의 모 대학원 기숙사에서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사연인즉 그 학생이 자기 방에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와서 하룻밤을 보냈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기숙사생들 역시 그 학생을 퇴사시켜 버렸다. 70년대 초반의 일이다. 위의 두 사건이 기숙사생 다수의 의사로 한 학생의 잘못을 꾸짖고 기숙사에서 그를 몰아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그러나 그런 처벌을 받은 이유는 서로 다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당시 두 나라 젊은이들의 대조적인 두 윤리관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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