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20세기의 교회는 19세기가 남겨 놓은 자유주의 사상과의 대결, 독재정권과의 대결, 재래 우상종교와의 대결, 빈곤과의 대결, 온통 대결의 한 세기가 아니었나 돌이켜 본다. 아직도 우리의 혈전은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새로이 다가오는 세대에 주어지는 또 다른 과제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시점에 와 있다. 그것은 마치 갈멜산 위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하고 난 엘리야에게 일어난 일을 상기케 한다. 바알 선지자들과의 대결이 끝나자 마자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젠 돌아 가셔서 음식을 드십시오. 내 귀에는 비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엘리야의 귀에 들려진 비오는 소리! "바다에서 손바닥만한 구름이 떠올랐다"는 보고! 오랫동안 가뭄으로 시달려 온 이스라엘에게 그것은 분명 희소식이지만, 산 위에 있는 아합에게는 위험을 의미하기 때문에, 엘리야는 즉시 시종에게 명령한다. "아합에게 가서, 비가 쏟아져 길이 막히기 전에 어서 병거를 채비하여 내려가시라고 일러라"(왕상18:41-48)
우리는 금세기도 제대로 마무리 못하고 있는데, 우리 귀에도 비오는 소리가 들려 오고 있으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소리인가? 저 바다 끝에서 떠오르는 손바닥만한 구름이 보이지 않는가? 문명이 전환되는 세기적 혁명의 기운을 느낀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빗소리와 떠오르는 구름! 그것은 안방으로부터, 자녀들의 공부방, 도서관, 사무실, 공장, 가게, 병원, 자동차 등 어디서고 사람이 있는 곳이면 존재한다. 멀티미디어로부터 비오는 사운드를 '듣고', 떠오르는 구름조각을 칼라 영상으로 '보고'있는 것이다. 이슈를 만들어 내기에 바쁜 허풍쟁이, 말쟁이들의 조작(manupulation)인가? 아니다. 이것은 현실이다. 이것은 문명사의 발전속도에 미루어 볼 때, 너무도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변화이기 때문에, 기성세대는 이를 충격으로도 현실로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뿐이다.
성큼 다가온 멀티미디어 시대의 교회는 이사야가 들은 외침의 소리를 어떻게 들어야 할까?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신다/ 벌판에 큰 길을 훤히 닦아라/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내려라/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은 넓혀라/ 야훼의 영광이 나타나리니/ 모든 사람이 그 영화를 뵈리라/ 야훼께서 친히 이렇게 약속하셨다"(사 40:3-5)
세례 요한은 이 소리를 듣고 무엇을 보았는가? 그는 물 세례를 주던 시대가 곧 지나가고 주의 백성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시대가 올 것임을 보았다. 새 시대로의 전환을 나사렛 예수의 출현을 통해서 본 것이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가?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이제 머지 않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신다"(누가3:16) - 이것이 새로 다가온 미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선지자적 외침이었다.
전환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시대보다 결단해야 할 일들이 많은 법이다. 세례 요한 시대의 경우에도 가까이 다가 온 하나님 나라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를 적극적으로 맞이한 자들이 있었던 반면에, 예수를 전통과 지난 관습을 깨뜨리는 위험 인물로 봄으로써 결사적으로 거부한 자들이 있었다. 이제 멀티미디어라는 것이 단순히 지엽적인 것에만 영향을 미치고 말 기술이 아니고, 인류문명 자체의 성격을 바꾸어 놓을 만한 동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늘을 사는 인류 뿐만 아니라 교회는 이 뉴미디어에 대하여 바른 판단을 내려야 할 때를 맞이한 것이다.
성서와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세계사의 변화와 맞물리면서 상호변화의 역사를 창출해 왔다. 삶의 변화는 무엇보다도 '의사전달 수단'(communication medium)의 발전과 비례하여 결정적으로 이루어졌다. 우리가 다가오는 21세기는 금세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라진 세계가 될 것임을 내다보는 근거도 바로 의사전달 수단의 혁신적 변화를 전망하기 때문이다.
최근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 교수인 도널드 메서(D. E. Messer)는 "정보고속도로망은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이라고 전제하면서, 21세기를 맞이하는 교회와 신학기관은 이를 적극 활용해야 할 것임을 주장하고 나섰다. 특히 신학 수업은 '사이버 세미나리'(Cyberseminaries)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면서, 미국 일리프 신학대학원(Iliff school of Theology)을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다. 반면, 말콤 머거리지(M. Muggeridge)는 그의 <그리스도와 미디아>라는 저서에서 인류문명에 미치고 있는 미디아 전반, 특히 텔레비전의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는 새로운 매체로서의 멀티미디어에 대한 입장을 쉽게 천명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여기에서 우리 연구의 관점은 이런 것이다: 첫째, 현시대는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의사전달 수단을 통해서 이미 새로운 문명권에 진입했다는 것; 둘째, 그래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세계의 '현실 이해'가 이전의 시대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이라는 점; 셋째, 이에 따라 교회의 세계 이해와 신 이해는 새로운 구도로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 곧 신학에서 논의되어 온 전통적인 주제들에 대한 이해의 틀이 달라질 것이라는 점; 따라서 교회는 과거 그 어느 때 보다도 새로운 도전에 대하여 배타적이 되거나, 아니면 이와 정반대로 뉴미디어를 자기 변혁의 계기로 삼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만일 이러한 변화의 폭과 빠르기에 대한 실제적인 감각을 지니지 못하여 변화에 부정적이든 적극적이든간에 정당히 대응하지 못할 때, 교회는 자신이 지니는 본연의 선교적 사명을 결코 성공적으로 수행해 나갈 수 없는 처지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의 목적은 멀티미디어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엄청난 변화의 내적 현상을 분석하여 교회로 하여금 보다 능동적으로 대처 내지는 자신을 변혁해 나가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의사전달 수단으로 새로이 나타난 멀티미디어에 대한 정당한 신학적 이해가 요청된다. 그래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우리의 논의를 전개한다. 그 첫 번째는, 오늘날과 유사한 문명의 전환기적 상황에 처해 있었던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루터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개혁자들과 로마 가톨릭 교회의 태도를 살펴보는 것이다. 과연 이들은 "인쇄"라는 뉴미디어를 교회적 차원에서 어떤 목적으로 어떤 범위로 사용했는지 고찰한다(Ⅱ). 우리는 이 논의에서 뉴미디어에 대한 정당한 접근 자세를 정리할 것이다. 또 다른 한 방향은, 멀티미디어가 던져 주는 신학적 의미를 두 가지 차원에서 분석함으로써 교회와 신학의 변혁에 기여할 수 있는 점들을 찾아보려 한다(Ⅲ,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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