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는 인쇄라는 새로운 의사전달 매체를 활용하여 오랫동안 교회 성직계급만이 독점적으로 누려왔던 말씀에 대한 정보를 누구든지 공유할 수 있도록 열어 놓음으로써 교회 변혁의 물꼬를 틔어 놓았다. 이 때부터 인쇄매체는 400년간 유럽의 마음을 지배하였다고 맥루언은 말한다. 인쇄매체는 근대사상을 결정짓는 명확성을 제공해 주었고, 서구사회의 탈부족화 현상을 가속화시켰다. 즉 개인의 관점에서 공동체를 비판적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동력을 주었다. 그 중에서도 성서의 자국어 번역과 인쇄출판은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성서본문은 교회의 권위로부터 독립되어 고유한 권위를 지니게 되었고, 마침내 교회의 전통을 비판하는 기준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인쇄된 문자를 읽는 행위가 주도적인 시대가 새로운 의사전달 수단의 등장으로 서서히 밀려나가는 때를 맞이하고 있다.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전자시대(電子時代, Electronic Age)가 온 것이다. 전화(電話, telephone), 전신(電信, telegraph), 녹음기(recorder), 텔레비전(television) 등의 전자매체를 포함한 의사전달을 위한 제반 통신체계는 금세기에 출현한 컴퓨터(電算機)와의 접속이 가능해 짐으로써 정보 전달의 양과 속도 및 영역 면에서 이전시대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커다란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변화는 이전의 시대와 어떠한 차이점을 지니는가? 여러 가기 차원을 고려할 수 있겠으나, 우리의 주된 관점은 의사전달 형태의 변화에 있다. 즉 문자시대와 공중파 텔레비전 시대의 의사전달 형태는 '일방적'이었으나, 멀티미디어 시대는 의사전달의 일방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즉 의사전달의 형태는 쌍방향성(interaction)을 띠게 된다. 그리고 방법적인 차원에서는 '읽는 행위'보다 '듣는 행위'와 '보는 행위'가 지배적인 감각활동이 될 것이다. 즉, 오디오-비디오(audio/video)가 전반적 인식활동에 주를 이루게 된다. 우리는 이 문제를 자세히 다룸으로써 이전 시대와는 다른 멀티미디어 시대를 정당히 맞이할 수 있는 기본적인 이해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인류는 수많은 새로운 정보를 생산해 내는 일에 종사해 왔다. 이것은 역으로 볼 때, 누구든지 새로운 정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며, 동시에 이것은 정보의 일방적인 전달을 필요로 하는 부정적 환경을 조성해 놓은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대중이 요구하는 정보를 소유한 사람은 인쇄기술과 전자기술을 힘입어 출판과 전자매체를 통해서 정보를 대량으로 순식간에 배포 및 전파함으로써 대중을 소비자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다가오는 시대는 이와는 전혀 다른 환경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생산자의 의도에 소비자가 수동적으로 따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아니라, 소비자가 오히려 주체가 되어 다양하게 제시된 정보들 가운데서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환경으로 전환될 것이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새로이 나타나고 있는 멀티미디어 계통으로 눈부시게 발전하는 전자기술이다. 아직까지는 적극적인 실행단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지만, 예를 들면 케이블 텔레비전(CATV)과 같은 대중매체의 기술은 의사전달의 쌍방향성(two-way transmission)을 현실화시켜 줄 것이다.
오늘날까지 의사전달 수단으로서의 대중매체가 일방향성으로만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고유한 인격적이며 균형잡힌 삶이 불가피하게 훼손받게 되었고, 심지어는 미디어에 의하여 심각한 정도까지 조정받기에 이르른 것이다. 하바드 대학교의 하비 콕스는 이미 70년대에 소위 '회로망'(networks)이란 것이 한 쪽으로만 흐르는 "수직적인 수도관"이 아닌, 실제적으로 어느 방향에서나 다 통할 수 있는 말 그대로의 '그물망'이 되어야 할 것을 역설한 바 있다. 그럴 때 비로소 작은 규모의 공동체들간이나 이웃간에 참된 의미의 의사전달이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소위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은 상호적인 의사전달이지 결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대중 의사전달 수단은 그동안 쌍방성을 무시하고 일방성만을 충족시켜 왔다. 이제 과학기술의 급진적인 발전과 더불어서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일상적 생활에 한정되지 않는다. 교회와 신학의 영역에서도 다루어지지 않으면 안될 중요한 과제이다. 오래전에 헨드릭 크레머가 말한 바 있듯이, 하나님은 자신과 교류할 수 있도록 인간을 창조했다. 대화라는 의사전달의 방법은 성서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의사 전달법인 바, 이미 대화란 하나의 방법의 차원을 넘어 삶의 내용을 규정하는 내용이라 볼 수 있다. 우리가 예수의 삶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도, 그것은 언제나 타인의 반응에 대하여 열려있는 초대이며 대화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설교는 결코 얼굴없는 대중을 향하여 던져진 것이 아니었다.
특히 텔레비전의 경우에는 시청자에게 일방적으로 군림할 수 밖에 없도록 의사전달 체계가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텔레비전 앞에서는 어떤 사람이라 하더라도 수동적 수용자일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의사가 전달될 수 없기 때문에, 개인이 스스로 저항한다고 할지라도 전달자에 의하여 주어지는 정보에 조정(manupnlation)당할 수 밖에 없는 환경에 있게 되는 것이다. 교회와 신학이 비판해야 할 내용이 바로 이러한 지점이다. 지금까지 대중을 지배해 왔을 뿐만 아니라, 소비자로 전락시켜 온 '매스 미디어'에 대한 신학적 반성이 오늘날처럼 절실히 요청되어진 때도 없을 것으로 보인다.
대중매체에 의한 일방적 의사전달 환경은 그대로 그리스도교 영역에도 침투하여 그리스도교적 문화 일반에 각인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교회의 예배 상황을 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예배를 드리는 주체는 분명히 신자들인데, 모든 의식행위는 소수의 구별된 사람들에 의하여 조정될 뿐, 참례자의 의지와 감각행위는 이미 기획된 프로그램에 의하여 축소 내지는 무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강조해야 할 내용은, 그리스도교의 문화는 무엇보다도 대화적 커뮤니케이션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과 신의 만남은 결코 대화를 떠나서는 이루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견지에서 성육신 사건을 생각해 볼 때, 이 사건은 인간에게 신의 의지를 일방적으로 각인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인격적 주체를 존중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의사전달 과정에서 "참여적인 관계성"이 얼마나 근본적인 문제인가를 말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그리스도교의 현실에서 멀티미디어의 등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날 교회와 종교 일반에서 생각하고 있듯이, 이는 목회와 선교활동을 확장하는 데 효과적인 충성스러운 시녀이기 전에, 기존의 일방적인 스타일의 제반 사고와 행위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전령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멀티미디어는 쌍방향적 의사전달을 가능케 하는 실질적인 기술을 제공해 주고 있는데, 이것은 멀티미디어가 현대 교회에 주는 중요한 메시지이다. 인류는 바로 이와같은 환경이 실현될 날을 기다려 왔다고 보아야 한다. 이 지점에 와서(!) 비로소 대중매체로서의 멀티미디어는 "인간성의 옹호자"(advocatus homini)로서, 참된 친교(communion)를 위한 의사전달 수단으로 수용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하비 콕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매스 커뮤니케이션 신학은 반(反) 커뮤니케이션의 사기성을 고발하며, 비(非)대화적 선전에 따른 희생에 대하여 경계시키며, 위험이 따르기는 하지만 그 고유한 스타일을 받아들이는 시도를 견지해야 한다.
바야흐로 대중매체를 통한 쌍방향적 대화의 의사전달이 기술적으로 가능한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것은 제이버그(Jaberg)와 워고우(Wargo)가 힘주어 말하듯이, 참된 의미에서의 의사전달이 가능한 "결정적"(kairotic)때를 맞이한 것임을 의미한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빛이 인간의 실존한 가운데로 파고든 경우"와 같은 것으로까지 비교한다.
이제 컴퓨터를 통해서 문자와 숫자만을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타 매체가 저장하고 있는 이미지와 사운드 등의 다양한 정보까지 새로이 받아들여 조정, 변형할 수 있게 됨으로써 여러 매체들을 동시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다매체(多媒體, multimedia)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연동장치를 따라 움직임으로써 따로 떨어져 있는 정보들을 파악하여 연결시킬 수 있는 초매체(超媒體, Hypermedia) 기술이 개발되어 쌍방향성의 다매체 환경이 구축되고 있다. 이러한 대매체 환경은 개인들(Hypermedia) 뿐만 아니라, 집단들(Groupware)과 조직들 (Networks)사이에서 시공을 초월하여 상호 정보전달을 가능케 하고 있다. 이와같이 이루어지는 정보사회는 맥루언이 말한 그대로 하나의 "지구촌"(global village)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구촌 시대의 정신은 모든 형태의 일방적 조정을 허용할 수 없다. 고도의 기술사회로 들어갈수록 우리는 보다 주체적인 인격체로서의 존재임을 확인하려고 하게 될 것이다. 이와같은 일을 위하여 무엇보다도 쌍방향성 다매체의 기술은 혁명적 기능을 수행할 것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여기에서 현실적인 문제를 한 가지 거론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현금에 교회가 멀티미디어를 활용하는 양상에 우려되는 점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자면, 시간과 공간 활용상 강단의 설교자 대신에 대형 브라운관을 설치해 놓고 설교를 듣거나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특히 대형 교회나 기도원 등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종류의 모든 시도는 소위 '일방향적 텔레비전' 시대의 마지막 몸부림이다. 우리는 이것을 기계적 카리스마의 횡포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겠다. 소품종 대량체제가 가능한 시대, 일방적 의사전달이 허용된 시대, 대중을 선택의 여지가 없는 소비의 "흰 개미"로 보는 시대, 이미 틀지워진 미디어 환경에 의하여 조정이 가능한 시대에서만 발상이 가능한 횡포다. 비록 교육, 선교, 예배, 봉사, 목회를 위한 선한 결과를 예상하고 구축하였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의도는 고도기술사회의 부정적 측면을 최대한대로 활용한 결과로 밖에 볼 수 없다. 교회에 나왔는데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을 수 밖에 없는 신자들, 그들은 16세기의 평신도들이 자국어 성서를 번역 출판하려는 것을 통제당했던 때, 그리고 성서를 읽지 못하게 감시당하고, 선택의 여지도 없이 알지도 못하는 라틴어 벌 게이트 성서를 성직자로부터 들어야 하며 미사에 참여해야 했던 중세기 신자들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자들로 취급받고 있는 것이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증언함으로써 그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義)를 드러내어 복음을 듣는 자들이 그 의의 빛 앞에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복음선포의 행위는 대중매체를 통해서 얼마든지 전달될 수 있지만, 그것은 듣는 자들에게 전적으로 자신들의 자유로운 결단이 전제된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행위이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에 유행병처럼 확산되고 있듯이, 보좌하는 많은 성직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교회의 담임 목사의 설교 모습이 담긴 비디오를 교회 예배실의 대형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은 성서의 정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행위이다. 조작, 과장, 생략 등의 편집이 기술적으로 가능한 미디어의 성격을 고려할 때, 이러한 교회의 현실은 특정 인물을 일반 신도 위에 군림하게 하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쌍방향적 의사전달의 멀티미디어 기술을 이끌어 낸 정신은 이러한 일방적인 카리스마적 지배와 조정이 일반화되고 있는 교회에 대하여 근본적인 변혁을 요청하게 될 것이다. 맥루언의 "매체가 곧 메시지"라는 이론은 30여 년이 지난 현금에 와서 더욱 그 의미를 실감케 하는 바가 크다. 교회가 얼마든지 쌍방향적 대화의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한 쪽에서만 지배하는 매체를 사용한다고 했을 때, 그 매체는 이미 하나의 수단이기를 멈추고 그 자체로서 하나의 지배를 위한 권위주의적 메시지가 되어 있는 것이다. 만일 멀티미디어를 종전의 텔레비전 개념의 확대 정도로 이해하고 교회에서 수용한다면, 교회는 이전보다 더욱 더 특정 인물에 의해 마성화되는 길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현대 교회에 던져진 멀티미디어의 의미는 이처럼 양면적이다. 이것은 인쇄기술이라는 뉴미디어를 놓고 보수적 로마 가톨릭 교회와 혁신적 종교개혁자들이 어떻게 서로 다른 입장을 보였었는지, 그 때의 상황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우리에게 멀티미디어는 일방적 의사전달의 체계를 거부하고, 대화적 쌍방향의 의사전달을 가능케 하는, 그래서 인격적 환경을 교회와 신학 안에 구축하는 동력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