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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장 :  각 족속은 그 족속의 방언으로


"그런데 당신의 동족 밤바라 백성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셨다'라는 말을 당신은 어떻게 번역하려오?"



라고 선교사는 성경의 열쇠 말이 되는 『구속』이라는 말을 서부 아프리카 밤바라 방언으로는 어떻게 나타낼는지 그것을 알려고 자기 번역을 돕고있는 본토인에게 진실되이 물어 보았다.



"그거요. 그거는 우리가 이렇게 말하지요. -'하나님께서 우리 머리를 취해 내신다'고요"

하고 이상한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할 수가 있겠소?"



"오, 그야 쉬운 일이지요. 아마 목사님은 아라비아 사람들이 우리 지방 깊이 있는 곳에 우리 민족을 노예로 삼으려고 습격하던 이야기가 우리 선조의 기억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잊으셨을는지 모릅니다."



하고 목을 쇠목거리에 끼우고 각 사람은 쇠사슬로 연결된채 남녀 포로가 채찍에 맞으면서 행진하던 광경을 이 밤바라 사람은 이야기하였다. 이 운명의 노예들이 동네 동네 지나갈 때에 어떤 때는 그 동네 사는 추장(酋長)이나 왕(王)이 자기 친구중 한 사람이 노예로 붙들려 가는것을 보고 그를 구속해 주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추장이나 왕이 아라비아 사람들에게 금이나 은이나 놋이나 상아(象牙)를 주면 그 친구를 구해낼 수가 있었다. 자기 친구를 구속하기 위하여 그 추장이나 왕은 문자 그대로 『그 친구의 머리를 쇠목거리에서 취해 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현재는 밤바라 전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사랑이 나타난 것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에 저녁불 둘레에 앉은 동네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죄의 사슬에 얽매이고 사탄의 채찍에 울고 있는 우리를 보시고 인류가 다시 살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보내시고 죽게까지 하셨다고 설명하여 준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셨다. 밤바라 말로 하면 『그는 우리 머리를 취해 내셨다.』그리고 전도인은 계속하여 말하기를 『그뿐 아니라 그렇게 구속된 노예는 자기를 구속해 준 사람을 평생토록 섬겨야 하겠다는 의무를 느낍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원한 노예가 되어야 할것입니다.』
『머리를 취해 낸다』고 하는 이 구속의 표현은 쓰디쓴 노예 경험에서 생겨나온 것이나 사람을 자유케 하실수 있는 오직 한 분 하나님께 대한 진리를 알 수 있게 하는 한 방법이 되었다.



성경과 성경중 단편이 벌써 일천 백여 방언으로 번역되고 출판되었다. 성경 전체가 번역된 방언수효는 215, 신약은 270, 단편만은 642가 된다. 그러나 성경이나 단편 한권이라도 번역되지 아니한 방언이 적더라도 1천 수백여 방언이 있다. 물론 1천 수백여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은 큰 부족(部族)이나 국민(國民)을?이루지는 못하였으나 그 전체 인구는 우리 한국 인구의 약 15배가 된다.



성경 전부가 그 단편 하나라도 번역되지 아니한 이 1천 수백여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을 위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가진 사람들에게 더 완전한 성경을 주기 위하여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선교사들이 현재 번역이나 개역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 사업은 야수(野獸)가 횡행(橫行)하는 지방이나 무서운 밀림(密林) 속을 헤치면서 여행하는 것처럼 자극적(刺戟的)이 아닐찌 모르고 또는 정신과 육체의 일상 요구를 수응하는것처럼 금시 반응(反應)이 없을찌 모르며 주의 이야기를 도무지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처럼 감격적(感激的)이 아닐찌 모르나 한 민족의 방언의 비밀한 속까지 들어가는 일은 자기를 그 민족의 넋에 부딪치게 하는 것이요, 또 성경을 통하여 사람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계시(啓示) 속에서 발견할수 있는 진리를 가르치기 위한 기초를 놓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 이상한 소리와 까다로운 말과 별에별난 뜻이 있는 방언들을 탐험개척하는 이 보수 없는 일을 하고 있는 선교사들은 비교적 적은 수효다. 그러나 이 개척을 한 이들은 우리에게 들려줄 재미난 이야기를 가졌다.



이 선구적(先驅的) 선교사들은 그들이 배우려는 방언에 대한 자전이나 문법을 변변히 가져도 못보았다. 실상 많은 경우에 알파베트도 없는 방언이 있었다. 본토인(本土人)과 같이 앉아 말을 배우는 수 밖에 없다. 어떤때는 『이것을 무엇이라 하시오?』하고 묻는 말 그것도 모르고 말 배우는 일을 하여야 했다. 이런 묻는 말을 배우는 데도 몇 주일씩 걸리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앉아서 아래 입술을 삐죽이 내밀면서 알려는 대상물을 가리켜내야 하였다. 그 까닭은 세계 여러곳에서는 손가락으로 대상물을 가리키는 것은 무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의 소리도 곤난하기 짝이 없다. 본토인들은 서로 잘 알아듣는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쇠를 긁는 것 같은 소리, 돼지 목따는것 같은 소리, 돼지가 좋아서 꿀꿀대는것 같은 소리, 콩 튀는것 같은 소리, 휘익 휘익대는것 같은 소리가 그렇게도 많고 또 거기다가 가장 발음하기 어려운 곳에 야릇한 모음(母音)이 붙고 하여 참으로 종잡기가 어렵다. 어떤 방언은 모음이 나오기 전에 공기가 입속으로 튀어들어가는 것 같은 소리를 내기도 한다. 누구든지 거의 다 혀 차는 소리를 할수 있고 말을 몰 때에 내는 소리를 할수 있다. 그러나 남 아프리카의 뿌쉬맨과 하튼탓 방언에는 이런 소리가 스무가지가 있어 여러가지 뜻을 보인다. 가령 선교사로서 코놉(남미 꽈테말라의 마야족의 방언) 말중 침 뱉는다는 말과 입맞춘다는 말 ts'u를 구별하기란 힘이 든다. 입맞춘다는 말에 ts' 라고 써 놓았는데 이것은 폭발음(爆發音) 같은데 침 뱉을 때 나는 소리 같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것을 침 뱉는다는 뜻으로 사용하지 않고 입맞춘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는지는 아무도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여러 방언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변칙(變則)중 하나다.



곤난한 것이 말의 소리만이라 하면 그래도 비교적 나은 것이라고하겠다. 그러나 어떤 방언에는 적더라도 초학자(初學者)로는 어떻다고 형용할 수 없는 문법을 가졌다. 다음과 같은 뿔리비아의 퀘츄아족 말을 생각하여 볼것이다.



ruwanayashaskasniyquichejmantaka



이 말은 서른두자로 되었다. 그 서른두자쯤은 그렇게 나쁘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이 말이 서로 다른 여덟가지 문법적부분으로 이루어졌고 그리고 그 각 부분은 늘 이런 순서로 나타나며 이 전체 말의 뜻은 『그대의 미래 사업을 그대가 계속하여 성취하는데 대하여』라는 것을 알 때에 말에 난다 긴다 하는 전문가라도 손들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뿔리비아의 퀘츄아 말에는 어떤 동사어근(動詞語根)에다가 적더라도 서로 다른 스무쌍의 접미어(接尾語)와 불변화사(不變化詞-관사, 전치사, 접속사 같은 것들)를 5만 이상의 연결을 하여 이런 복잡한 형(形)의 글자를 이룬다.



소위 원시방언이라고 하는 방언들의 괴이하고 복잡한 문법을 터득하기에 용기를 잃지 아니한 여러 선교사들은 이런 『문화상 열등한』민족들의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순풍에 돛단듯이 생각하기도 쉬운 것이다. 그러나 쑬루 말과 같은 말에서 걷는다는 것을 묘사(描寫)하기 위하여 서로 다른 120 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에 그들의 놀람은 형언키어렵지 않다. 또는 마다가스카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이 마다가스카 말에서 서로 다른 2백 종류의 소리를 묘사하는 말과 백가지 색갈을 구별하는 특별한 말과 구절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의 놀람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말의 소리의 혼란함과 문법형태의 괴이함과 새로운 말이 무수한데 머리가 띵해진 중앙 아프리카에서 일하는 한 선교사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라』는 말을 『말뚝 위에 가 앉으라』는 말과 혼동하여 버렸다. 콩고에서 일하는 다른 선교사는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울었다』고 말하고 예전 예언자들이 백성을 향해 『울었다』고 말하여 듣는 그 지방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그가 『울었다』고 직역한 말은 젖먹는 아이가 말을 배우기 전에 그 의사 표시로 『우는』그 말이었다. 모든 하나님의 사자들이 젖먹이 아이들처럼 으아 으아하고 울었다고 하니 그 선교사의 설교를 듣던 콩고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직역(直譯)이라는 것은 가장 쉬운것이면서 가장 위험한 것으로 많은 실수를 가져오게 된다. 래틴 아메리카에서 일하는 한 선교사는 『그 때에』라는 말을 사용하였으나 나중에 알고보니 그지방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지나가기 위하여 무엇이 생겼다』라는 뜻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서부 아프리카의 한 방언으로는 『마리아가 예수의 발아래 앉아 있었다』는 구절을 직역하면 『마리아가 예수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로 된다.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으리라』를 한국에서 말하면 한국인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것이다. 그러나 아프리카 여러 지방에서 이렇게 말을 하다가는 큰 오해를 사게 될 것이니 거기서는 이것이 죄인을 고문하고 죽이는 방법중 한 방법이 되는 까닭이다.



본토어를 재삼 검토함이 없이 사용하다가 가장 심한 실수를 저지르는 수가 있다. 그러나 후에 그 번역자는 어느 말이나 구절을 사용하기 전에 먼저 주의깊게 재삼 검토하여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리버리아의 한 방언을 말하는 본토인들이 주기도문을 외는데 『우리가 죄 지을적에 우리를 붙들지 마옵소서』하고 말하는 것을 얼마 후에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의 잘못이었다. 초대선교사가 본토어의 숙어(熟語)에 대하여 불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이 구절을 본토인들에게 설명하여 주었는데 본토인들은 자기들의 말로 뜻이 되게 만들어 외운 것이 『우리가 죄 지을적에 우리를 붙들지 마옵소서』가 된것이다. 원시족이나 문명인이나 많은 사람은 생각하기를 붙들리지 아니하면 죄는 죄되지 아니한다고 생각한다. 이 리버리아 사람들은 자기들의 신조(信條)를 표현하는데 더 솔직하고 그것을 성서적으로 옳게 만드는 것 밖에 없다.



어느 번역이 잘못 되었는지 발견하려면 그 백성과 그 풍속 습관을 잘 알아야 된다. 예를 들면 멕시코 싸카포악스틀라의 아스텍방언으로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것을 즐거워하다가』(요한 8:56)를 번역하기가 불가능하다.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을 직역하면 아스텍족에게는 다음과 같이 이해되는 것이다. 곧 예수는 근친강간죄(近親强姦罪) 중에 사는 동물인데 마법사로 변화되신 이라고 알게 된다. 그들은 마법사란 인간이 아니요 악한 동물이라고 믿는 까닭이다. 그런데 이 동물이 낮에 인신(人身)으로 변장하고 자기의 거짓 형태(形態)를 『내 때』라고 말한다고 그들은 믿었다.



오래 동안 사용해 온 관용어(慣用語)들도 다시 한번 더 평가(評價)하여 보지않고 사용할 수는 없다. 동부 아프리카 어떤 지방에서 선교사들이 50여년 동안 『주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계시기를 비나이다』라는 말을 사용하여 왔으나 이 말이 『우리는 주를 원치 아니하니까 주는 당신의 마음에나 계시기를 빕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것을 근년에 와서야 발견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선교사들은 그 지방 신자들에게 왜 이런 실수하는 것을 가르쳐 주지않고 몇 十년을 지내 왔느냐고 물어보았다. 그 지방 신자들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선교사들은 많은 이상한 것들을 늘 말하는 습관이 있는데 이 말도 이상한 뜻이 있기는 하나 선교사들이 그렇게 사용하기로 작정된 줄 알아서 아무 말 아니하고 그대로 지내왔다는 것이다. 이 얘기는 다음 얘기를 연상시킨다. 미스바 기도문에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적에 주께서 나와 당신을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하는 구절이 있는데 어떤 서로 시기하고 속이는 두 친구가 이 구절을 인용하여 서로의 축복과 이익을 구하는체 하면서 실상은 나만 저 사람의 못된 생각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를 구하는 것으로 삐뚜러지게 사용한 일이 있었다.



우리가 어느 방언의 깊은 속까지 들어가려고 하면 우리 생각의 표지(標識)가 되는 우리 관용어(慣用語)에 그 방언과 부합하는 말이거나 혹은 비슷한 말이라도 없기 때문에 혼란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사실상 서로 일치하는 줄 안 말이 흔히는 전수히 상치(相馳)가 되는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수단에 쉴룩어를 말하는 본토인들은 인색한 사람을 가리켜 『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하고 너그러운 사람을 가리켜 『작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한다. 이것은 우리로 보아서는 우습강스러운 표현이다. 그러나 쉴룩 백성들에게는 당연 이상의 당연한 표현이다. 그들은 설명하기를 인색하고 이기적인 사람은 무엇이나 할수 있는대로 거두어 들여서 그 마음에 잔뜩 쌓아두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은 큰 것이다. 그러나 너그러운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할수 있는대로 남에게 주려는 사람이니 그 까닭에 그의 마음은 작은 것이다. 이렇게 설명을 듣고 보면 그들의 말도 우리의 말과 같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이런 관용적 수식어(修飾語)의 괴이(怪異)한 것을 보고 우리는 흔히 혼란을 겪는다. 우리는 본토인들이 무지몰각(無知沒覺) 해서 그렇다고 흉을 보기 쉬우나 우리의 이해성이 적음을 탄식함이 당연할 것이다. 멕시코의 메사텍족은 이적(異蹟)을 『목을 길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초자연적행적을 이렇게 말할 법이 어디 있느냐 하고 비꼴는지 모르나 조금 더 살펴 보면 이 말은 훌륭한 산 그림을 우리에게 갖다주는 것을 알수 있다. 초자연적 사건이야 말로 무엇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어서 목을 길게 빼고 보려고 할 일이다. 이 말은 예수를 항상 좇아다니던 군중(群衆)들의 특색을 날카롭게 뵈었다고 볼수 있다.



파나마에 밸리엔테 홍인종은 『권력』(勸力)이라는 추상명사(抽象名詞)가 없으나 권력자를 『핸들(손잡이)을 잡은 사람』이라고 한다. 마가 11:28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의 의미를 밸리엔테 홍인종은 잘 알아 『핸들을 잡은 사람 누가 이런 일을 하게 하였느냐?』하고 번역하였다. 밸리엔테족은 다스리는 사람을 그 손에 사냥칼 손잡이를 가진 사람으로 간주(看做)하였다. 다시 말하면 남들은 칼날을 쥐었는데 『그는 손잡이(칼자루)를 잡은 것』이다. 그러므로 다스리는 사람만이 칼을 지배할 수 있고 그 권능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권력이다.



이렇게 풍부한 수사(修辭)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 원시방언(元始方言)들을 성서적이요, 영적인 개념(槪念)을 표현할 수 있을까 하고 의심하고 있다. 이런 의심은 흔히 아집(我執)과 무지(無知)로 섞인 자만심(自慢心)을 나타내는 것 밖에 아니된다. 그러나 이것은 부당한 것이다. 물론 어느 방언을 배우기 시작한지 며칠 못되어 『사랑』『믿음』『기쁨』『은혜』『구원』과 같은 영적 진리가 풍성한 말들을 발견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실 만족할만한 말이 고심(苦心)하는 선교사 번역자의 마음에 몇주일씩 혹은 몇달씩 나타나지 않는 수가 한두번이 아니다. 탐광자(探鑛者)가 금강석이나 황금을 단번에 찾아내지못하는것처럼 말 사냥군이 인내성 있는 수사(搜査)를 한지 며칠만에 말의 보화를 찾아내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어느 민족이 영적 진리에 대하여 적당한 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밸리엔테 홍인종은 『하나님 안에 소망』을 『하나님 안에서 마음을 쉬게 한다』라고 말하여 매우 생생한 맛을 보여준다. 『마음을 쉬게 한다』는 말에는 기다리는 것과 신용하는 것의 뜻이 있다. 소망을 『신용하고 기다리는 것』이라고 하는 정의만큼 더 합당한 정의가 어디 있으랴? 밸리엔테족은 강도(强度)가 있는 수사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이런 영적 의미를 표현하는 말들은 그 본토민의 생활과 문화를 반영(反映)시키는 말의 개작(改作)으로 오기도 한다. 리베리아의 끄삐포 민족 중에서 일하는 여선교사 한분이 『예언자』라는 말의 본토어를 알려고 하였다. 그는 『무당』혹 『점쟁이』라는 본토어를 아나 이 말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말하던 성경적 예언자를 가리키기에는 부적당한 말인줄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예언자의 말 가운데 많은 부분은 미래에 될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직무중 중요한 부분이 되기는 하나 전부는 아니다. 끄삐포족이 이해할 수 있는 적당한 말은 중요사건에 대하여 미리 말한다는 뜻이 있을뿐 아니라 백성 중에 보냄을 입은 하나님의 대표로 하여 진리를 선포한다는 뜻도 있어야 할것이다. 마침내 적당한 말이 생겼다. 그 말은 『하나님의 보발군(步撥軍)』이라는 말이다. 아침과 저녁마다 추장(酋長)의 공인대표자(共認代表者)는 소식을 전하며 추장의 명령을 선포하며 장차 올 중요한 사건을 광포하면서 동네를 돌아다닌다. 『하나님의 보발군』은 백성에게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하나님의 명령을 알리며 백성의 구원과 안전을 위하시는 하나님의 경륜(經綸)을 뵈는 하나님의 공인 대표자다. 끄삐포족에게 알려질 예언자는 잊어버린 옛날에 살던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 냉담한 민중에게 하나님의 보발군 노릇을 하던 농사군 아모스와 같이 생생한 교훈을 전하는 사람 곧 피가 도는 진정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게으른 여행자들이 어떤 때 그 가치를 볼줄몰라 귀중한 사실들을 그냥 지내쳐 버리는 것처럼 어떤 번역자는 본토인의 생활에 감취어 있는 훌륭한 뜻을 가진 말들을 쓸데 없는 듯이 보아 내버리는 수가 있다. 불란서 영지 적도 아프리카 카레족 중에서 일하고 있는 선교사 에스텔라 마열스양이 이런 경험을 하였다. 그는 본토 조역자(助役者)들에게 『보혜사』의 뜻을 설명하여 주려고 애를 썼다. 이 말은 희랍어 『파라클리테』에서 번역해온 말인데 성경중 적당히 번역하기 어려운말들 중에 하나다. 적당한 말을 알아내기 위하여 그 여선교사는 성신의 직무와 역사를 장황하게 설명하였다. 성신께서는 기독교인들을 장려하시고 권하시고 책망하시고 보호하시고 안위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이 그 직무요 역사라고 길게 설명하였다. 그 설명을 다 듣고난 본토 조역자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를 위하여 그런 일을 하여주는 이를 우리는 「우리 옆에 구푸리는 이」라고 하지요』이 말은 성신의 사역을 설명하는 말로는 매우 부적당하게 뵈었다. 본토인들이 이 말을 사용하게 되는 특수한 방법을 철저히 설명하지 아니하였던들 이 말을 사용하지 아니할뻔 하였다.



아프리카에서 짐군들은 머리에 짐을 이고 긴 여행을 하는데 보통 2-3개월씩 걸리는 여행을 한다. 그때에 그들중에는 학질이나 이질에 걸리는 사람들이 생기고 그런 사람들은 매우 약해져서 짐군 행렬(行列)끝으로 떨어지게 된다. 나중에는 기진 맥진하여 길 옆에 쓰러진다. 다음 동네까지 가지 못하고 여기 이대로 있으면 밤에 들짐승에게 잡혀 먹힐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나 그 길로 지나가는 어떤이가 있어 거기 쓰러진 사람들을 보고 불쌍히 여겨 그들을 일으켜 가지고 다음 동네까지 데리고 간다 하면 이렇게 데리고 가는 사람을 그들은 가리켜 『우리 옆에 구푸리는 이』라고 한다. 선교사 번역자가 『보혜사』를 번역할 때에 취한 말이 이것이다. 보혜사야말로 하늘본향을 항하여 여행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붙들어 주고 보호해주고 지켜주는 이다.



선교사가 어느 민족의 생활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그 민족의 생활을 배경으로 한 말을 더 잘 알게되어 영적진리를 표현하는데 곤난이 없게 될 것이다. 내가 표현하려는 뜻에 적당치 아니한듯이 처음에는 보이는 말이라도 그 민족의 생활에 친하는대로 풍부한 영적의미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령 멕시코에 있는 쿠이캐텍 홍인종과 첼탈 홍인종의 방언들에는 『믿는다』라는 말과 『순종한다』라는 말을 분간할 길이 없다. 이런 분간이 없는 것을 얼른 생각하면 그 방언의 불완전성(不完全性)을 나타내는 것 같으나 다시 생각하면 그 방언의 불완전성 그것이 도리어 우리의 깊은 생각을 자아내게 한다. 미개하고 후진 (未開後進) 한 종족이라고 낙인(烙印)을 찍힌 이 흥인종들은 우리가 『믿음』과 『순종』을 구별하려고 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고 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이 두 말은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 『믿으면 순종하게 되지 아니합니까? 순종한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을 뵈는 것이 아닙니까?』하고 그들은 말한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은 옳다고 볼수 있다. 실로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닌지 모를 일이다. 우리는 분간 아니할 것을 분간하고 또 우리가 가진 많은 말 때문에 하나님을 계속 순종치 아니하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공교한 외식자(外飾者)로 우리 자신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쿠이캐텍 흥인종과 첼탈 흥인종은 아무리 미개 민족이지만 우리보다 진리에 더 접근(接近)해 있다고 지각 있는 사람들은 다 수긍(首肯)할 것이다. 적더라도 그들은 문명세계에 있는 우리보다도 종교적 자가분열증(宗敎的 自家分裂症)에는 걸리지 아니하였다고 볼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문명인들처럼 믿음과 순종을 분간함으로 하나님을 불순종하면서도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하는 분열신앙(分裂信仰)은 갖지 아니한 것이다.



모든 선교사 번역자들은 다 글 없는 방언을 취급하는 것이라고 속단(速斷)할 것은 아니다. 많은 번역자들은 역사 깊은 문화적 유산(文化的有産)을 가진 방언이 있는 지역에 가서 그 방언을 배우는 것이다. 인도, 뻐마, 섬라, 중국, 일본에 가는이는 알파베트나 문법을 만들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런 방언에도 거기 상당한 문제가 있다. 가장 두드러진 문제는 그 철자법(綴字法)의 착잡성(錯雜性)이다. 알파베트는 옛날 쌩스크릿에서 가져온 것이거나 혹은 중국어와 같이 각 글자가 말 하나씩 대표하는 그림글로 된 것이거나 한다. 혹은 일본어와 같이 이런 그림글에다가 음절형식(音節形式)을 붙인 것도 있다.



철자법이 착잡할찌 모르나 같은 방언 안에 수직적(垂直的)으로 있는 어휘(語彙)와 관용어(慣用語)처럼 복잡하지는 아니하다. 수직적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뜻은 이렇다. 한 나라의 지방을 따라 다른 사투리를 가리켜 수직적이라 아니하고 한 지방안에서도 사람의 위계(位階)를 표하기 위한 사투리를 가리켜 수직적이라 하였다. 이 사투리는 인위(人爲)로 되어 계급의 구별을 고정시키려고 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으로 오는 곤난을 이기기란 힘이 든다. 옛날 쌩스크릿에서 갈라져 나온 팔리어나 불교 승려어(佛敎僧侶語)에서 종교적 어휘를 빌어와야 할 나라에서 일할 때에 어찌할 것인가? 종교적 지도자들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거의 천여년을 인정하고 사용하여 오던 말들은 우리 나라의 천주교에서 래틴말로 미사를 지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보통 민중에게는 아무 뜻도 없다. 그런 말은 거룩한 냄새는 있을찌 모르나 사람을 거룩하게 가르치지는 못한다.



전통적문자(傳統的文字)와 종교적 어휘가 동양 모든 민족을 어찌나 강하게 결박하였는지 그 결박을 끊어뜨리는데 오랜 시일이 걸리게 되었다. 그 결박을 끊어뜨리게 되자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啓示)와 진리를 알려고 노력을 하는데 아름다운 말, 고운 글에 만족하기 보다는 좀더 평범하고 산 뜻이 있는 말을 원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일본에서 1950년 그 성경 개역을 거의 절반이나 하였다가도 중지하고 성경을 거리에 다니는 누구든지 사용하는 말로 개역하기로 하고 다시 시작하였다.



영원한 진리를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희랍어 신약의 문장(文章)을 그래도 반영(反映)하는 것이다. 신약의 각 책은 주후 一~二세기에 살던 글방선생들이 사용하던 희떠운 문장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다. 그 책들은 살아계신 그리스도께 대한 진리를 찾던 보통민중의 말로 쓰여진 것이다. 생명을 찾는 사람에게는 고대(古代) 문학적 글은 소용이 아니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이 현대에도 선교사 번역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 민족의 산 방언에 담아 주려 하는 것이다. 혹 그 말이 우리에게는 이상할찌 모르나 그 민족에게는 산 말이다. 가령 에디오피아 국경에 사는 우덕족은 『근심』『걱정』을 말할 때에 『사람의 간에 떨림이 있다』라고 한다. 요한 14:1을 『너희는 너희 간을 떨게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하였으니 한국말 같지는 않다. 우덕어 성경은 우리를 위해 번역된 것이 아니요, 복음의 진리를 자기들의 생활의 말로 알아들어야 할 우덕인을 위하여 번역된 것이다. 나바죠 홍인종은 『근심』을 아주 다르게 표현한다. 그들은 근심을 『내 마음이 나를 죽이고 있다』라고 한다. 나바죠인들은 의외로 좋은 심리학자들인 것 같다. 현대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심리학적증상(症狀)이 무척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다. 『근심』은 어떤 병만이 가져올 수 있을만큼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데 나바죠족은 이것을 안것이다. 나바죠족이 이런 말을 가지게 된 것은 걱정에 대하여 오랫동안 과학적으로 조사 시험한 결과로 가지게 된 것은 아니다. 그들이 민족 생활을 하는중 우리가 겨우 근년에 심리분석학자로 말미암아 알게 된것을 우연히 말한 것 밖에 없다.



원시민족의 방언이 가지고 있는 이상한 관용어에서 종교적경험의 존엄성(尊嚴性)을 떨어뜨릴 만한 흉한 표현이 있는것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멕시코에 쿠이캐텍 홍인종이 『예배』라는 말로 쓰는 말이 그렇다. 그 예배라는 말은 개가 그 꼬리를 젓는다는 말과  어근(語根)이 같다. 그 오직 한가지 차이점은 예배의 경우에는 꼬리를 젓는 것은 개가 아니라 사람이다. 쿠이캐텍어로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꼬리를 젓는 것이다』어떤 비평자는 말하기를 이런 말은 종교생활에 쓰기가 재미없고 또 사람을 동물로 만들어 인격의 존엄성을 떨어뜨리는 것이 된다고 평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무 것도 그런 것은 없다. 쿠이캐텍 홍인종들은 예배할 때에 그 주인을 보고 꼬리 젓는 개의 행위 같은 무엇이 있음을 인정한것 밖에 없다. 사람들이 개가 그 주인에게 대하여 가진 충성과 같은 충성을 하나님께 대하여 가진다 하면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주인이 법정에서 심각한 판결을 받게 될 때에도 개는 그 주인을 모른다고는 아니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인정된』것을 해야할 환경의 압력이 있을 때에 그 주를 모른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믿음』과 『순종』을 분간 못하고 예배를 그 주인에게 대한 개의 태도와 연결한 이 쿠이캐텍 홍인종들은 종교적 진화론의 학설이라는 갈구리에 교리를 꿰어 추상문구의 들보에 달아놓고 번쩍이게 하는 많은 종교철학자들보다는 더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졌다고 볼수 있다. 종교생활을 나타내는 말은 종교생활이 곧 일상생활로 되는 백성의 일상경험에 뿌리박은 말이 되어야하고 생활과 격리(隔離)된 학설이 되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소위 원시민족들이 문명으로 말미암아 전수히 파괴된 직관적각지(直觀的覺知)의 얼마를 가졌다는 인상을 받을 것은 아니다. 모든 민족은 생(生)의 어떤 방면은 서투르고 거친 말로 표현하지마는 생의 다른 방면은 꼭 맞고 매우 인상적인 말로 표현한다. 키쾅고민족은 『구제물(救濟物)』을 『사랑의 선물』이라 하는데 실로 매우 인상적인 표현이다. 구제물은 실로 『사랑의 선물』이 되어야 할것이요, 일시 구제모금 운동에 가담하였다는 일종의 자랑이 되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빠로 에스키모족이 찬송가를 『기도의 노래』라 한것은 그들이 예배에 쓰는 거룩한 음악의 참 뜻을 사실 그대로 붙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교회 생활에 있어 성경의 중요성을 인정하기는 하나 성경을 원시 방언으로 번역하는 것은 시간 낭비가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는듯하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족하다.』하고 말하는 것을 가끔 듣는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입으로만 말을 하면 어떤 잡물(雜物)이 그 이야기 속에 알지 못하는 중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생각지 못한 듯 싶다. 콩고에서 일하는 선교사 한분이 성경 없는 콩고의 교인들이 귀로 들어 아는 성경이야기들을 검사하여 보다가 몇가지 놀랄만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야이로의 딸의 이름은 삭개오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지붕을 뚫고 달아내린 그 가엾은 사람이 열대 마마를 앓았다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바디매오는 한 눈이 멀고 학질을 앓고 문둥병에 걸렸었다고 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은 미련한 처녀들은 등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가져올 것을 잊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기 예수를 성전에 바칠 때에 보고 기뻐한 이는 다윗왕 자신이었다고 하였다. 이런 잘못이 있으리라고는 믿기가 어렵다. 그러나 한국교회 교인들이라도 성경을 스스로 연구하지 않고 남에게 들은 것을 가지고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일주일에 한번 주일학교에서만 기독교 진리를 배운다 하면 그 결과가 콩고 신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것과 다를 것이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본토 백성들에게 성경을 주기는 줄것이나 다줄 것은 없으니 사복음이라도 하나 둘쯤 줄 필요는 있어도 다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듯하다. 어떤 사람은 마태, 마가, 누가는 거의 같은데 무엇하러 네가지 복음을 보존하였는지 하나님의 섭리와 교회의 결정을 의심까지 하기도 한다. 그러나 선교사 번역자들은 우리 주께 대한 이런 네가지 기록이 있게 된 것의 중요성을 실제 경험으로 깨달아 알았다 회회교 나라들에서는 마태복음이 환영을 받는다. 그것은 그 복음 첫머리에 아브라함이 나오고 그 다음에 회회교인이 아는 대로의 훌륭한 분이면 마땅히 가져야 할 탁월하고 중요한 지위를 보이는 예수의 족보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서보다 마리아에 대하여 더 자주 듣는 천주교배경을 가진 사람을 위하여서는 누가복음이 좋으니 그 복음은 마리아에게 대한 참된 공경심(恭敬心)으로부터 시작하여 인류를 구속하시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오직 한분뿐인 중보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마음으로 나아가게 하여 주는 까닭이다. 철학적인 인도교인이나 불교인을 위하여서는 요한복음이 인기를 끈다 그 복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을 증거하여 철학적접촉점(哲學的接觸點)을 만들어 놓는 까닭이다. 원시민족들을 위하여서는 마가복음이 환영을 받는다. 그 복음에는 마태나 누가에서처럼 어려운 족보가 없고, 누가복음 첫 머리에서처럼 구약에 대한 언급(言及)이 없고, 요한복음에서처럼 철학적진술도 없는 까닭이다. 마가복음에는 세례 받으시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시고 시험을 받으시고하신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누구든지 알수 있는 순서로 재미 있게 그려져 있는 까닭이다.



성경번역자들은 이 복음서들 중에 어느 한 복음서부터 시작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 복음서 만으로는 충분치 못한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본토인 교회가 자라는대로 초대교회 이야기가 있는 사도행전 번역의 필요를 느끼게 된다. 교회문제도 내버려 둘 수 없게 되어 로마서, 고린도서, 갈라디아서 등을 번역하게 된다. 이런 번역으로만 만족지 않아 인정미(人情味) 넘치는 목회서신 고생하는 교회의 희망을 보인 계시록, 천지 창조의 이야기가 있는 창세기, 영적장엄미(靈的莊嚴味)가 있는 시편,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있는 이사야, 고난문제를 취급한 욥기들을 번역하게 된다. 교회가 잘 알고 그 교회 지도자를 양성할 필요에 응하여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번역하게 되고 이와 한가지로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더 원만히 이해할 수 있게 주석책들과 성경연구책들을 만들어내게 된다.



참된 번역자들은 『예수를 뵈옵고자』 하는 헬라인들을 주께 인도한 빌립과 안드레의 전통(傳統)을 좇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기록된 성경 말씀으로 나타내어 사람들이 성신의 도움으로 사신 말씀 안에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하려는 것이 모든 번역하는 일의 목표다. 어떤 번역자든지 받을 수 있는 상은 남부 멕시코 마사텍 홍인종 여자가 마가복음을 읽다가 『이 책은 예수를 내가 지금 보는것처럼 얘기해 놨어요』하고 말한 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