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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장 :  괴상한 말소리, 별난 문법, 진기한 말들

작은 동그라미들과 이상한 갈구리들로 글자모이를 복잡하게 하는 태국말이나 혹은 어색하게 생긴 자음들로부터 불쑥 나온 갈퀴끝 모양의 각(角)진 모음이 있는 암하릭말 같은 말의 알파베트를 배우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서투른 말소리의 얼크러진 속으로부터 알파베트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선교사가 만일 음성학(音聲學)이나 언어구조학(言語構造學)에 대한 훈련이 있으면 그 일이 매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많이는 언어학적 준비가 불충분하거나 도무지 없이 문명세계에서 뚝 떨어진 곳에 가서 아무 뜻 없는 딩동 당동하게 귀에 들리는 본토인의 말을 대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게 된다. 『그 사람들은 끊임없이 어떻게도 빠르게 말을 하는지!』하고 탄식하지 아니한 선교사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사실 누구든지 남의 나라 말을 들을 때에는 다 이렇게 생각한다. 알지 못하는 말의 이상한 말소리는 무척 빠른 것 같이 들린다.



본토인들이 무척 빨리 말하는 것만이 괴로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말소리도 견딜 수 없게 뒤헝클고 그것을 배워 익히는 것은 주리나 틀리는듯이 어렵다. 아프리카의 어디서나 당하는 곤난은 겹자음(子音)의 발음(發音)이다. gb 혹은 kp라고 씌어진 것의 발음은 g 후에 b가 발음 되거나 k 후에 p가 발음되는 것이 아니라 gb나 kp는 동시에 발음된다. 할수 있으면 아프리카말 중에 하나인 Ngbaka를 발음하여 볼것이다 Ngb가 분명한 구별을 가지고 계속 발음이 되는 것이 아니다. n소리는 입 맨뒤에서 혀를 활등처럼 만듦으로 시작하고 공기는 코로 내보낸다. 이렇게 하는 것도 일순간(一瞬間). 그 즉시 입술을 꽉 다물고 코로 나갈 공기를 막고 그리고는 gb를 일시에 발음한다.



어떤 사람은 목젖을 떨리게 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로 알지 않는다. 우리는 코 골 때에 이렇게 하고 양치질 할 때에 이렇게 하기를 배울 수 있다. 그러나 혀끝을 떨리게 하는 것은 좀 힘든다. 사실 혀를 펄떡 펄떡하면서 내밀고 들이밀기란 어떤 사람에게는 매우 힘이 들고 그렇게 함으로 혀가 무자위 손잡이처럼 뻣뻣해지게 된다. 그래서 나오는 소리는 야릇한 우렁소리만 된다. 입술을 떨게 하는 것을 생각하여 보라. 그것이 곧 많은 선교사들이 배워야 하는 일이다. 가령 불란서 영지 적도 아프리카 까번에 입푸누 말 중 『냄새』라는 말은 mbbunga다. 이 말의 시작은 이상한 m이요 그리고는 두 b로 씌워진 소리인데 이것은 두 입술을 떨리게 함으로 발음한다. 추운 날 춥다는 것을 형용하느라고 입술을 떨리게 하는것과 다소간 같다.



여러 괴상한 방언 중에 이보다 더 괴상한 발음이 많다. 괴상하다.-그것은 우리가 하는 말이고 그들에게는 우리 말이 괴상하고 우스운 것이다. 가장 문명하였다는 영미 사람들의 말을 보자. glimpsed streams를 예를 든다 하면 첫자의 모음의 전후에는 서로 다른 소리가 나는 자음 여섯이 있고 둘째자의 모음 전후에도 서로 다른 소리가 나는 자음 넷이 있다. 그것들이 다 발음도 아니되고 어떤 모음은 군더더기로 있을 뿐이다. 북부 콩고의 Ngbakas(우리 말로는 써놓기 어렵다) 사람들은 영어하는 이들이 f나 v를 발음할 때에 아랫 입술을 윗니에 대는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그들로 보아서는 아랫입술을 윗니안으로 대고 kakaba(카카바=까마귀)의 b소리를 낼때처럼 아랫입술을 탁튀어 나오게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본토족 중에 선교사는 아는 외국어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족속의 말을 숙달(熟達)하기란 그렇게 곤난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말도 서로 아는 것이 없으면 그 말을 배우기를 시작하기란 무척 힘이 든다. 에프레인 알폰스선교사가 처음으로 파나마에 밸리엔테 홍인종 중에 가 살며 일할 때에 그는 그 족속의 말이라고는 한마디도 몰랐고 그 홍인종들도 이 선교사의 말은 한마디도 몰랐다. 그는 처음에 뒤섞인 엉터리 서반아어나 영어를 아는 사람이 있나 찾아보았다. 이런 엉터리 말은 서반아 선원(船員) 혹 영국 선원이 그 족속의 땅에 와서 본토인들과 화려한 옷이나 훌륭한 보석을 가지고 그들의 산물 코코넛(야자열매)이나 빠나나와 바꿀 때에 본토인들이 배우는 말이다. 그러나 그 선교사를 도와 그 방언을 어떻게 사용할찌 가르쳐 줄 사람 중에는 이런 엉터리 말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온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이 새 교사(알폰스씨는 밸리엔테족을 위하여 선교학교를 시작하려고 온 것이다.)를 할 수 있는대로 도와주겠다는 표정을 하고온 한 아이가 있는데 그는 우물에서 냉수 한 바가지를 떠 가지고 왔다. 그 즉시 알폰스씨는 몸짓, 팔짓과 엉터리 서반아말로 그 아이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였다. 그 아이는 『티코냐카』라고 대답하였다. 그 후로는 알폰스씨는 그 아이가 필요할 때에는 『티코냐카』하고 불렀다. 그러나 얼마 아니되어 사람들이 그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웃고 또 자기를 『티코냐카』하고 부른다. 얼마 후에야 『티코냐카』의 참 뜻이 무엇인지 그는 발견하였다. 이 말은 한 어구(語句)인데 뜻은 『나는 이름이 없읍니다』하는 것이다. 밸리엔테족들은 흔히 아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고 이러이러한 남자 혹 부인의 아이라고 말한다. 그 총명한 아이는 알폰스씨의 몸짓으로 묻는 것을 옳게 알아듣고 할수 있는대로 알아듣기 쉽게 대답한 것이다. 서로 아는 말이 단 한마디도 없게 되면 그 족속의 말의 뜻과 사용법을 알아 내는데 실수도 하고 성공도 하는 방법을 써서 그 말의 이상하고 복잡한 구조(構造)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괴상한 모음과 자음은 혀와 턱에게 괴롬을 줄뿐아니라 큰 두통거리도 된다.

가령 수단의 늴로틱 말을 하는 띵카에 가보면 기본모음과 부수(附隋) 모음의 음질(音質)이 열 네개요, 길고 짧은 소리를 내는 것이 스물 여덟이다. 또 이 모든 것은 기식음(氣息音) 혹 무기식음(無氣息音)으로 되었는데 이것을 다 치면 쉰여섯이 된다. 그러나 이것으로 곤난점은 다 된 것이 아니다. 또 낱말새를 분간하는 음조(音調)의 차이(差異)가 있다. 예를 들면 i nchi kwin cham에서 chi를 중간 음조로 발음하면 『나는 음식을 먹으려고 아니한다』라는 뜻이 되고 같은 어구에서 chi를 높은 음조로 발음하면 『나는 음식을 먹었다』라는 뜻이 된다.



※註 기식음 혹 무기식음은 성대로 가외 공기를 동시 통과케 함으로 발음하는 것이다.


 


이 음조의 차이를 어떤 사람들은 음성의 변화(音聲의 變化)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언제든지 말썽거리다. 맥시코 홍인종의 한 방언인 마제텍어(語)와 같은 말은 음조에 네가지 서로 다른 음역(音域)이 있고 운음(運音)이 한 음역에서 다른 음역으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한다. 네가지 말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들을 tho라고 써 놓으나 높은 음조로 발음하면 『나가겠다』라는 뜻이 되고 같은 자음과 모음을 경미하게 낮은 음조로 발음하면 『잠간동안』이라는 뜻이 된다. 좀 더 낮은 음조로 발음하면 『나간다』라는 현재사가 되어 높은 음조로 발음하여 미래를 가리킨 것과 대조(對照)가 된다. 이 같은 tho를 네 음조중 가장 낮은 음조로 발음하면 『사격』(射擊)이라는 뜻이 된다. 누구든지 이 음조에 주의하지 아니하면 그 말의 뜻이 드러나지 않게 된다.



멕시코 오악사카주 산중에 사는 믹스텍족의 방언에는 음조의 세가지 음역(音域)이 있는데 각 음절(音節)은 고음조(高音調), 중음조(中音調), 저음조(低音調)로 발음하여야 되며 혹 이 음조면(音調面)새에 운음(運音)이 있게 발음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yuhu라는 말에 있어서 첫 음절에 저음조, 둘째 음절에 고음조로 발음하면 『무서워한다』라는 뜻이 되고 두 음절을 다 고음조로 발음하면 『입맞춘다』라는 뜻이 된다. 믹스텍어로는 음조를 잘못 발음함으로 연애도 즉시 깨지고 말 수 있는 것이다.



멕시코에서 말하는 추릭방언에는 음조에 다섯 면(面)이 있는데 이것은 혼동하기 더욱 쉽다. 예를 들면 xan'an이라는 말에서 목소리를 옳은 전동(顫動)이 되게 못하면 『비둘기』라는 뜻이 『족제비』라는 뜻으로 되어버린다. 그래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예수 위에 성신이 비둘기가 아니라 족제비 형상으로 내려왔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추릭족중에서 일하는 선교사 번역자는 중대한 실수를 범하지 아니하려고 깊이 주의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한번은 성경 이야기중 『두 부자(富者)사람들(니고데모와 아리마대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달랬다』한 것을 『두 악마가 예수의 영혼을 달랬다』고 말한 일이 있었던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된 일이 있었다. 추릭족들에게는 악마가 달랬다는 말을 하면 알아 듣기가 더 쉬웠을 것이니 부자가 죽은 사람의 몸을 달래서는 무엇을 할것인가? 하고 그들은 의심하였다. 그뿐 아니라 추릭족으로 보면 마귀가 예수의 영혼을 요구하였으리라는 것은 이해하기가 쉬웠으니 그들의 민간신앙(民間信仰)에는 사람의 영혼을 잡아가려고 악귀(惡鬼)가 항상 사람을 엿보고 있다는 것이 있는 까닭이다.
번역자를 괴롭히는 것은 괴상한 말소리 뿐은 아니다. 이상한 문법도 골치덩어리다. 북부 콩고의 수단 어계(語系)에 속하는 몽반디족어(族語)로 부정(不定)하는 말을 하려 하면 한 쎈텐스(說明文)의 끝에서 동사를 반복(反復)하면 되는 것이다. 가령 『그가 집에 갔다.갔다.』하면 간것을 힘있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요 『그가 집에 가지 아니하였다』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런 부정 설명을 더 완전히 만들려 하면 쎈텐스 끝에서 동사를 두번 반복하는 강한 어세형(語勢形)을 사용하면 된다. 가령 『그는 집에 갔다.갔다.갔다.』이렇게 하여 그가 집에 가지 아니한 것은 절대 확실하다는 것을 나타내게 된다. 물론 이렇다고 말더듬이는 몽반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부정적 기분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면 말더듬이가 쎈텐스 끝에 동사를 더듬는다고 부정이 되는 것도 아니다.



가장 단순한 어구(語句)라도 번역자에게 커다란 문제를 던져주기도 한다. 가령 중앙 멕시코 후아스텍족 방언의 문법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요한 一서 2:5)를 고대로 번역할 수가 없다. 후아스텍 방언에는 영어의 "of"와 같은 애매(曖昧)한 전치사(前置詞)가 없다. 영어 "of"는 스물 이상의 뜻을 가졌고 또한 희랍어로도 그 같은 애매한 구조를 보인다. 번역자는 그 같은 사상을 표현하는데 어떤 다른 길을 찾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번역자는 이 절에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일의 대상(對象)인지 혹은 하나님은 사랑하는 이인지를 결정하여야 할것이니 후아스텍어(語)에는 이 두 사상이 매우 다르게 나타나는 까닭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요, 백성이 그를 사랑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는데 일치(一致)하고 있다.』 해석상 곤난을 해결한 후에도 번역자는 『온전케 되었나니』하는 수동적(受動的) 표현을 어떻게 취급할찌가 또 문제다. 영어로 이 말이 내포(內包)한 뜻은 희랍어와는 얼만큼 다르다. 희랍 원어에는 『마친다(終了). 성취한다. 완전하게 한다』는 뜻이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완전하게 하는 과정(過程)을 설명하기 위하여서는 후아스텍어로는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라고 하여야 된다. 이런 번역은 희랍어의 문자 그대로의 번역에서 매우 동떨어진 번역 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 번역이 후아스텍말로는 가장 가까운 번역이 된다. 원어를 다른 말로 번역하는데 가장 가까운 등가구(等價句)를 찾아낸다 하면 적당한 번역이라 할수 있다.



번역문제의 많은 것은 다른 방언에서 우리의 품사(品詞) 곧 명사, 동사, 전치사, 형용사 등과 같은 품사에 해당하는 말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마가 1:5)와 같은 어구(語句)는 번역하기 어려운 방언이 많으니 그런 방언들에는 『세례』『회개』『죄 사함』과 같은 말은(희랍어로는 이것은 『용서』라는 한 말이다) 명사가 아니요 동사다. 이 말들은 뵈어지거나 만져지는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요, 그 과정(過程)을 가리키는 것이 되는 까닭이다. 동사면 주동사와 동사가 가진 문법적 취급법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 이 말들의 뜻을 동사 표현법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회개의 세례』와 같은 어구는 매우 복잡하다. 그 정확한 뜻은 무엇인가? 확실히 회개에 속한 것이 세례가 아닐 것이요, 회개를 특색으로 하는 것이 세례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회개는 세례를 선행(先行)하여야 할 것이다. 『용서』(혹 『죄 사함』)와 『죄』의 관계에 대하여서도 『죄』를 용서 과정의 대상 혹은 수동사를 써서 『용서함을 받는』대상이라면 죄는 주장사가 될 것이다. 그러면 전체를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 죄의 용서함을 받기 위하여 회개하고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전도하였다.』많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번역이 보통 영어번역보다도 더 분명하고 정확하게 뵈일 것이다. 그러나 번역자가 명사 대신에 동사를 쓴 것은 다른 맛이나 신기함을 뵈려 한것은 아니다. 이런 바꿈질을 한것은 그 번역하려는 방언의 문법법칙의 필요를 따라 한것 뿐이다. 번역은 마땅히 그 방언의 문법적전통(文法的傳統) 그것이 글로 적혀 있거나 입으로 전하여 오거나 그것을 지켜야 할것이나 효과 있는 번역이 되려 하면 그 민족이 말하는 방법을 따라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남의 방언을 비평할적에 주의하여야 할 것은 자기 방언에도 비평을 받을만한 것이 있는 까닭이다. 수단의 쉴럭족은 『무척 좋다』라는 말을 하려면 『좋게 나쁘다』라고 한다. 한국에도 『무섭게 좋다』라는 말이 있는데 어떻게 무서우면서 동시에 좋을 수가 있으랴? 영어에 『좋고 나쁘다』라는 말이 있는데 어떤 사람을 평할 때에 『그는 나쁘지는 않다. 그저 좋고 나쁘다』하고 말하여 그의 중쑬쑬함을 뵌다. 그러나 좋은 편이 더한지 나쁜 편이 더한지 그것을 뵈려고 우리는 목소리에 특별한 억양(抑揚)을 붙인다. 이 『좋고 나쁘다』라는 말에서도 좋다는 말에 더 힘 있게 발음하여 좋다는 것이 우리의 근본 뜻임을 뵐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용법(用法)은 쉴럭족이 『좋게 나쁘다』라고 말하여 무척 좋다는 뜻을 뵈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사용하는 관용어(관용어(慣用語)에는 논리적(論理的)이 아닌 것이 많다. 영어에서 저 사람은 머리가 돌았다는 뜻을 나타내노라고 『벌이 그 모자 속에 있다. (Bees in his bonnet)』라고 하든지 『종각 속에 박쥐가 있다. (Bats in the belfry)』라고 하면서 논리(論理)가 어떠니 저떠니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영어로 『귀리(oats)』라는 말은 늘 복수(複數)여야 한다고 하면서 중앙 아프리카의 빤투족의 말에 『벼루기』라는 말이 단수(單數)를 갖지 않았다고 불평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아프리카에서는 벼루기 한마리만은 볼 수 없는 것이다.



번역자의 골치를 앓게 하는 것은 혀를 뒤꼬는 발음이나 복잡한 문법만으로 다 된 것은 아니다. 여러 족속들의 생활과 풍속에 커다란 차이(差異)가 있는 사실로 부터 많은 문제가 오기도 한다. 어떤 면으로는 원시 민족들이 우리보다 성경시대의 문화(文化)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세계의 많은 미개발지역(未開發地域) 들에서는 우물에서 물을 긷고 황소가 곡식을 밟아 떨고 나귀가 연자매를 돌리고 기름 등잔을 쓰고 양의 우리가 있고 하여 성경에 있는 말들을 기계시대(機械時代)에 젖은 사람들보다 더 잘 알아듣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본토인 조역자(助役者)와 함께 일하며 그 본토인들에게 그들의 속에서 우러러 나온 말이라고 생각하게 할만큼 성경을 번역하려고 하는 번역자들에게는 이 서로 다른 생활 풍속이 큰 문제를 갖다주는 것임을 알게 된다.



성경 중에 어떤 것들은 본토인 조역자들에게 우스운것 같이 보이는 것이 있다. 마야족 중에 한 전도인은 베드로가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를 위하여 초막 셋을 짓자고 제의(提議)하였다는 말을 듣고 이의(異議)를 일으키기를 『작은 초막 셋을 짓는 것 보다는 큰 초막 하나를 짓는 것이 더 용이(容易)한 것을 베드로는 몰랐으리까?』하였다. 집 짓는 일에 대하여 베드로가 무식한 듯이 기록된 이 구절에서 마야 전도인은 매우 어리둥절하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본토 민족들은 어떤때 잘못된 결론을 끌어내는 수가 있다. 그들은 성경에서 자기들의 문화에 비교될 것을 찾고 거기 의지하여 다시 해석하려 한다. 멕시코 꾸어레로지역에 있는 아스텍족속의 어떤이가 예수께서 광야 시험후 천사가 어떻게 예수를 수종들었는지 설명하기를 『그때 예수는 총 가진 호위자를 데린 지주 같았을 것이다』하였다. 이 설명을 듣는 선교사는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인가(人家) 없는 꾸어레로 산중에 간 사람은 호위자가 필요하였었다. 그들은 이런 것을 안것 뿐이다.



여러 경우에 환경이 이렇게 서로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훌륭한 설명을 붙여도 불충분한 일이 많다. 유카탄의 마야족에게는 산과 강을 이야기하여 주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마야족의 사는 곳은 평편하고 횟돌과 나무가 연이은 대평야(大平野)이어서 산이란 二백척 높은것 밖에 못보고 개울이란 큰 비 온후라야 겨우 몇마정 흐르다가 땅속으로 잦고 마는 것을 볼뿐인 까닭이다. 동부 페루 밀림지대에 사는 쉬피보족도 성경 이야기중 어떤 것은 이해하기 곤난하여 한다. 아마손하(河) 대지류(大支流)중 한 지류를 따라 넓고 인적미도(人跡未到) 한 밀림지대 중에 사는 그들은 아무것도 나지 아니하는 광야를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마태 四장을 번역할 때에 광야라는 말의 가장 가까운 쉬피보 방언은 『아무도 살지 아니하는 곳』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삼림 깊은 속을 가리키는 말 밖에 아니 된다. 이런 번역을 읽고 쉬피보족이 곤난을 느낀 것은 세례 요한이 삼림 깊은 속에서 전도하였다는 사실이 아니요, 예수께서 그런데서 주리셨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 삼림 속에 계시면서 어떤 짐승이라도 잡아 잡수실 수 있었을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무슨 나무 열매를 따잡수시거나 나물이라도 캐 잡수셨을 터인데 주리셨다는 것은 알수 없는 이야기라고 쉬피보족은 생각하였다. 환경과 문화적 특색에 너무도 심한 차이(差異)가 있기 때문에 성경에 이야기들은 어떤 별난 곳에서 일어난 것 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기쁜 소식은 어떤 먼나라 사람들만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듣는 그들에게 직접 관계가 있다는 것으로 깨닫게 될 형태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한 방언의 음조와 문법을 습득(習得)하고 우리 생활과 사고(思考) 방식과 다른 점 또는 같은 점을 포함한 그 종족의 문화적 문제를 친숙히 알고, 그 방언으로 그 종족과 여러 가지 문제를 심각히 토론할 수 있을만큼 그 방언을 유창히 말할 수 있은 다음에 비로소 참다운 번역 사업을 착수할수 있는 것이다. 번역하는데 첫 단계는 여러가지 좋은 학구적(學究的) 주석서(註釋書)들을 사용하면서 그 구절을 깊이 연구하는 것이다. 가장 잘 아는 구절이라도 연구를 하여야 한다.



적당한 권위서나 권위자와 주의 깊은 접촉을 하여 한 구절의 뜻을 밝힌후 번역자는 흔히 그 구절의 임시 번역을 하여 놓는다. 번역자는 자기 본토인 조역자들 까지도 모르게 이 첫 초안(草案)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니 조역자들은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선교사가 하였다면 덮어놓고 좋다고 찬성하는 까닭이다. 이 임시 초안은 이 구절의 뜻을 설명하는데만 소용되고 더 좋은 표현은 그 조역자들의 입에서 자유로히 나오는 말을 잡아 쓰기로 한다. 만일 번역자가 그 번역의 말 사용을 자기 어학지식에만 너무 의지하면 그 결과로 온 번역은 무뚝뚝하고 『외국냄새』가 너무 많은 것이 되기 쉽다. 이 첫 초안은 본토인 조역자들의 토론을 자극하려고 만든 것이다. 알아들을 수 있는 번역을 하기에 충분한 이해를 가지기 위하여 성경의 역사적 윤곽(輪廓)을 알려고 그들은 노력한다.



남부 멕시코에 급속도로 자라나는 첼탈족 교회를 위하여 첼탈어 신약을 번역하는 일을 돕는 사람들은 한 절을 가지고 한 시간 이상을 토론하는 일이 가끔 있다. 어떤 때는 그 교회의 다른 신자들과 의논하려고 하루나 이틀을 지체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서신들 가운데 어떤 어려운 구절을 자기들의 방언으로 분명하게 옮겨 놓을 수 있게 될 때에는 웃음이 그들의 얼굴에 터져나오고 이해와 감격의 빛으로 그들의 눈은 반짝이면서 『바울 선생님은 꼭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하고 말한다.



번역위원은 다 꼭 같은 중요성(重要性)을 가진 것이 아니요, 또 다 꼭 같은 공헌(貢獻)을 하는 것도 아니다. 한 사람은 그 본토 종교에 대하여 잘 알고 다른 사람은 한 어구를 만드는데와 문법적 변화를 만드는데 능하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새로운 영적 경험을 서술(敍述) 할 새로운 은유나 비유를 알아내기도 한다. 이렇게 각 사람은 번역에 이바지 할 무엇 하나씩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번역자는 말 한마디나 말 한 구절이 근본적으로 새롭고 또 새로운 배경을 가진 『기쁜 소식』을 말하는 것이지만 예전 생활의 방법에서 오고 예전 신앙으로 이루어진 뜻을 가진 말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잠시라도 잊어서는 아니된다. 『신』이란 말에도 옛날 이교신앙(異敎信仰)의 신의 생각도 좀 섞여 있고 『하나님』이란 말에도 『창조주』라는 옛날 전통적 사상이 있기도 하고 『죄』라는 말에도 본토인들의 사회적 『타부』관념이 들어 있기도 한다.



번역자는 흔히 가장 중요한 말들중 더러를 솨만교에서 가져오기도 한다. 에프레인 알폰스선교사는 여러 해 동안 밸리엔테족 말로는 『하나님』을 무엇이라고 하나 알려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 말을 모르고 더러는 그런 말을 가르쳐 주기를 싫어하였다. 그들은 자비한 창조주가 있다는 신앙을 가졌으나 그 종족의 비전(秘傳)을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가르쳐 주지 못할만큼 그의 이름은 신성하다고 생각하였다. 한번은 알폰스씨가 밸리엔테 조역자들과 함께 뽀카스 델 토로 열대 삼림지 깊은 곳에 사는 늙은 무당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이 크게 존경과 무서움을 함께 받는 늙은 무당에게 안내된 후 그의 묻는 여러가지 물음을 그들은 대답하였다. 나중에 그 무당은 노래를 시작하였다. 그의 목소리가 자꾸 높아지면서 누구든지 다 들을 수 있도록 흥겨워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이 사람들은 응고보(Ngobo) 하늘과 땅의 하나님에 대하여 말합니다. 잘 들어 주옵소서!』응고보! 이 말이야 말로 알폰스씨가 몇몇해 찾으려고 애쓰던 말이다. 본토 무당의 입에서 이 말이 나왔다. 그리고 이 말은 하나님의 이름이라는데 모든 사람은 일치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 후 이 말을 밸리엔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게 되었다.



번역자가 기독교 명사(名辭)와 관념(觀念)의 자취를 볼 수 있는 이상하게 뒤범벅된 본토인 전설이 있는 것을 발견하는 때가 있다. 남부 멕시코 첼탈족들은 그들의 신앙을 성 도마에게 두고 있다. 이 성자를 그들은 해마다 지키는 명절에 예배한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씨앗을 준이가 성 도마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전에 성 도마가 그들의 땅을 걸을 때 그의 지팡이가 닿은 곳마다 샘이 솟구쳐 나왔다고 한다. 하나님이 땅을 만들었으나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어 인류를 멸하려고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그들은 믿고 있다. 이 하나님은 실제 우리와 다른 인류를 만들고서 우리 인류 대신에 땅위에 살게 하려고 땅으로 그 인류를 보내려 하고 있다고 그들은 믿는다. 성 도마의 중재(仲裁)로써 그 따로 만든 인류를 땅으로 보내려는 하나님의 감정을 돌리게 되었다. 그들은 세상은 편평하고 네 기둥에 받쳐 있다고 생각한다. 그 네 기둥중 한 기둥에 적(敵) 그리스도가 쇠사슬에 매여 있다고 한다. 그 적 그리스도는 인류를 멸할 목적으로 그 쇠사슬에서 놓이려고 발버둥질 치고 있다. 그래서 땅에는 가끔 지진이 생기게 되나 적 그리스도를 맨 처음 쇠사슬에 매어 놓고 지금까지 그를 지키고 있는 성 도마 때문에 그 적 그리스도는 쇠사슬에서 놓이지 않게 된다. 예수에 대한 생각은 그 족속의 생각 속에 다소간 우연히 들어왔다. 원칙적으로 예수에 대한 생각은 보수(報 )적이다. 유대인들에게 결박을 당하였던 예수는 어떻게 노하였던지 인류를 멸할 홍수를 온 세상에 보냈다고 생각한다. 번역자는 이와 같이 거짓된 관념 중에서 그가 번역하려고 택한 각 구절의 중요성을 백성들이 원만히 이해하였는지 알아내는데 깊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선교사는 어그러진 이야기와 곡해(曲解) 된 진리를 어떻게 다룰찌 잘 알고 있다. 그 교정방법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나타난 대로의 진리를 적극적 태도로 단순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본토인의 반발(反撥)을 받는 수가 있다. 남쪽 멕시코 촐족에게 어떤 선교사가 세례요한은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나 진리를 말하였다는 건과(愆過)로 헤롯에게 잡혀 갇히고 마침내는 무참히도 죽임을 당하였다고 말하니까 촐 사람들은 집이 떠나가게 웃어댄다. 누구든지 생각할것처럼 그들의 웃음은 감정의 무딘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세례요한에게 동정한 나머지 그렇게 웃은 것이다. 그들은 초상집에 가서 울지 아니한다. 보다는 그들의 깊은 동정을 마음껏 웃음으로 나타낸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들은 기쁠 때 운다. 마태복음의 번역을 마친 번역 조역자는 마지막 절의 번역을 끝내자 울기 시작하였다.



번역 조역자들은 없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본토인의 방언과 문화를 다 잘 알고 있다. 성경 구절의 뜻을 그들이 이해하기만 하면 자기들의 말로 만족할만큼 표현한다. 어떤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어느 방언이든지 빈약(貧弱)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떻든 이 조역자들이 분명히 이해하였는지만 확실하면 되는 것이다. 촐 방언 번역자는 영어로 된 "shutteth up his bowels"(요한 一서 3:17 이것을 직역하면 『그의 창자를 닫았다』인데 우리 한국어 역에는 『마음을 막으면』하였다) 이란 구절을 촐 사람들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지 않았다』라는 뜻으로 정당히 이해하지 못할까 겁하여 『마음을 닫았다』라고 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였다. 그랬더니 그 조역자들은 말하기를 『마음을 닫는다』라는 말을 촐 사람들은 『지랄병이 있다』라는 말로 알아듣기 때문에 합당한 번역이 아니라고 하였다. 촐어로 그 뜻을 드러내려면 『그는 아무 것도 주지 아니하는 사람이라』고 하여야 된다고 하였다.



번역자의 목적은 자기 조역자들의 도움으로 성경의 오묘한 말씀 속에 나타난 영적 경험을 표현할 수 있는 그 나라 말을 찾아내려는데 있다. 풍부한 어휘의 보배를 찾는 그는 자기가 하는 일에서 가장 감격한 경험을 하게도 된다. 다소 평범하다고 볼 수 있는 구절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로마 3:17는 촐 방언으로는 『고요한 마음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라고 번역되었다. 새로 회개한 기독교인들의 경험은 말과 그 뜻에 흥미있는 발전을 뵈어준다. 촐 족속은 기독교생활에 첫 세 계단을 『말씀에 응하는 것』과 『주를 배우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한 사람이 복음에 첫 동정적반응(同情的反應)을 하는 것을 『말씀에 응하는 것』이라 하고 받은 말씀을 배척하면 반대로 『말씀을 지내쳤다』라고 한다. 이 새 신앙의 교훈을 받아들이면 『주를 배운다』고 한다. 십자가에 죽으신 구주의 완전한 제자가 되었다고 깨달을만큼 그 회개의 경험을 하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것』이라고 한다. 이 마지막 계단은 바울의 편지 중에서 온 것 같은 느낌을 주나 이것은 촐 기독교인들이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산 관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그들 자신의 말이다.



영적 경험이란 서로 아무 관계가 없이 고립(孤立)되고 알 수 없는 사태(事態)가 아니다. 우리는 경험의 관계의 성질을 지적(指摘)하여 낼 수 있는 것이다. 한국어로 『회개』『구원』『귀의(歸依)』『화평』과 같은 말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허(空虛)한 신학적 냄새가 나는 것으로 밖에 생각지 아니하는 듯하나 멕시코시 동쪽 높은 산맥지대에 사는 족속들이 말하는 마사후아 방언으로는 그같은 뜻의 말들이 무참하게도 박해를 당한 기독교인들의 영적성장(靈的成長)을 생생하게 그려 보인다. 『회개』는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요, 『구원』은 『마음을 치료하는 것』이요, 『귀의』는 『마음을 변하는 것』이요, 『화평』은 『마음의 안식(安息)』이다.



자기 만족의 생활을 하게되면 사도행전과 같은 책에 있는 극적이요, 감격적인 사건들의 특색이 되는 속 정신을 모르고 넘겨버리는 일이 많게 된다. 몇 사람의 신자로 시작한지 일년반이 못되어 수천명의 신자를 가지게 된 홍인종 첼탈족교회는 무서운 박해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라기만 하는데 그 교인들은 사도행전 十四장의 참 뜻을 잘 안다. 『악감』을 품은 사람들이 사는 도시에 가서 전도하다가 돌에 맞고 위협을 받고 죽도록 때려 밖에 내버림을 받고 - 이 모든 일을 첼탈교인들은 자기들의 경험으로 분명히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성난 술집 주인들이 복음전파의 영향으로 장사가 아니되어 본토인 교인들이 손수 영을 이어 지은 예배당을 불태워 버린다.  아직 불이 다 꺼지지 아니한 이 터에 작은 손풍금과 긴 의자를 건지려고 근처에서 온 교인들은 무릎을 꿇고 교인들이 어려운 중에 품을 내고 물건을 사서 지은 이 귀중한 예배당을 완악하고 무지(無知)한 중에서 불질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였다. 원수들은 예배당을 파괴할찌 모르나 전에 타락하고 빈궁하던 백성 중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신의 사업은 파괴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 여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우리는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 문화의 한 부분이요, 우리 생활의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어떤 족속은 생각하기를 여자는 남자와 같이 영혼을 가지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이런 생각은 우리에게 큰 충동을 줄것이다. 예전에는 촐족은 믿기를 여자는 영혼이 없다고 하거나 적더라도 여자의 영혼은 남자의 영혼보다 열등(劣等)한 것이라고 하여 남자와 같은 묘지(墓地)에까지도 묻지 아니하였다. 종교는 남자만 위하여 있다고 하여 어떤 종교적 의식에는 여자와 아이를 절대로 금지하였다. 그러나 복음이 옴으로 이 모든 것은 변하였다. 그들은 성신께서 여자의 마음에서도 역사하시는 것을 보았으므로 복음은 남자만 아니라 여자를 위하여서도 있다고 믿었다. 아이들을 쫓아내는 대신에 예배당 맨 앞자리로 데려다가 복음을 듣고 깨달을 수 있게 한다.



야고보서를 읽던 촐족의 한 가족은 그 책에서 가족 불화를 화평으로 돌이킬 수 있는 길을 발견하였다. 네 형제가 물려받은 땅 때문에 싸움을 하고 있었는데 선교사의 권고로 야고보서를 읽기 시작하였다. 읽자 각 남자는 마음에 잘못을 깨닫고 꿇어 기도하고 여자들을 불러들여 또 야고보서를 읽어주었다. 마침내 그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형제끼리 서로 용서를 구하였다. 2천년 전에 기록된 편지를 읽음으로 싸우던 가족 중에 평화가 오게 된 것이다.



멕시코 미초아칸 산중에 있는 팟스쿠아로 호수의 아름다운 주위에 살고 있는 타라스칸 홍인종은 복음전도에 냉담한듯 하였다. 봉건주(封建主)들의 압제를 항거하려고 이 홍인종들은 다른 세상과 문화적고립(文化的孤立)이 될 정신적 담을 쌓고 있었다. 그들 중에서 일하던 선교사들은 가족기도회를 할 때에는 영어로 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집에서 일하는 한 타라스칸인(人)이 그 선교사들에게 물어 보았다.



"무엇들을 하고 계십니까."



"무어요? 기도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고 선교사들은 대답하였다.



"당신들은 무엇을 외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말하는 이 홍인종은 먼 곳에 있는 천주교당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래틴 기도문을 외는 것을 들은 일이 있었다.



"아니요. 우리는 기도하고 있는 것이요."



하고 선교사들은 말하였다. 그러나 이 홍인종은 의아해 하였다.



마침내 그 홍인종으로 하여금 자기들의 말을 이해시키려고 선교사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 보. 우리는 하나님과 얘기하고 있는 것이요. 다른 것은 없고 하나님과 얘기하는 것이지요."



"그래요?"



하고 그 홍인종은 말하였다.



"그렇다면 나두 듣게 우리 말로 하나님과 얘기해 주시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