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성서에 관하여 > 성서번역의 비화
 제3장 :  가시덤불과 엉겅퀴

성경 번역은 매우 쉬운 일이라는 인상을 어떤 사람들은 가진듯하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번역자가 어디로 향하든지 부닥치게 되는 괴롭히는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것 같다. 그들이 생각하기는 본토인들에게서 적당한 말을 물어가지고 그대로 써놓으면 다 되는줄로 안다. 그러나 본토인들이 가르쳐준 말을 무턱대고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한 선교사는 자기 조역자들이 적당한 말을 가르쳐 준줄로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들은 마태 5:1~12중에서 bienaventurados(복되다. 행복되다. 운수 좋다)라고 하는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래틴 아메리카의 홍인종 방언중 한 방언으로 번역된데는 이렇게 되어 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노름에 운수가 좋다…슬퍼하는 자는 노름에 운수가 좋다.』이 홍인종 조역자들은 그 서반아말의 뜻을 『운수 좋다』라고만 알기 때문에 예수의 말씀을 듣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이 받을 물질적 상급에 대하여 매우 기쁨을 느꼈다.

직역(直譯)은 어떤때 우습강스럽다. 어떤 번역자가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계시록 13:15)를 래틴 아메리카의 어느 방언으로 직역하여 놓았는데 그 나라 사람들은 그 번역한 말을 『우상을 악취가 나게 만들었다』로 이해하게 되었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면 본토인들은 자기 말로 번역된 신약 마태 26장에서 회개한 여인이 『향유 한 돌합』을 예수의 머리에 부딪쳐 깨뜨렸다고 한것을 읽고 주의 참을성에 놀랐다고 한다. 감사를 표하는 괴상한 방법이다. 또 다른 예로 『생일』(마가 6:21)을 직역한 것이다. 그 번역대로 보면 헤롯은 자기가 난 바로 그날에 그 나라 유명한 사람들을 위하여 술 마시는 잔치를 내던졌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신기한 재조라고 본토인들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자기들의 신화적영웅들도 어렸을적에 그와 같은 모험을 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이 잘못된 번역을 그대로 믿으려고 하였으나 일종의 신화로 믿었지 사실로는 믿지 아니하였다.

래틴 아메리카의 홍인종중 한 종족이 자기들의 말로 번역된 성경을 읽다가 바울이 『아내를 황소처럼 끌고 다녔다』(고전 9:5)한 구절에 이르러 얼굴을 찡그렸다는 것을 우리는 비난할 수 있을까? 번역자는 『데리고』혹은 『동반(同伴)하여』라는 적당한 본토어를 찾아내지 못하고 깊은 생각없이 『다룰수 없는 짐승처럼 끌고 다녔다』라는 뜻이 있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어떤 직역은 적당한 뜻을 드러내지 못하나니 그런 번역은 말의 뜻을 순전히 물질적 의미로만 해석하게 되는 까닭이다. 예를 들면 파나마의 밸리엔테족은 "stiff necked" (직역하면 『뻣뻣한 목을 가진』, 의역하면 『완고한』)라는 말을 목에 『중풍』혹 『류마티스』를 앓는다는 뜻으로밖에 모른다. 이 말의 적당한 번역은 『사람을 억제한다』라고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완고한 사람들은 인도도 아니 받고 밀쳐도 꼼짝 아니하는 완강하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욕적 항거를 하는 것이다. 밸리엔테족 근처에 사는 싼 뿔라스족도 같은 말이 있는데 그들은 그런 완고한 사람을 『귀를 틀어막는 사람』이라 한다. 이 두 말은 자기 고집대로만 하려는 반동적, 비협력적 인물로 표현하는 좋은 형용사다.

어떤 직역(直譯)은 아무 뜻도 나타내지 아니한다. 그런 직역은 서로 맞지 않는 말들의 모음만 되고 만다. 어느 수단 방언으로 『성신』을 『깨끗한 숨』이라고 번역하여 한동안 사용하였는데 그 말은 아무 뜻이 없으니 아무도 『깨끗한 숨』을 볼수 없는 까닭이다. 번역자들이 그 『누마』라는 희랍어를 찾아보고 그 말은 『숨』도 되고 『신』도 되는 것을 알았다. 그 번역자들은 육체가 깨끗한 것을 형용하는 말은 『거룩』하다는 뜻을 뵐줄로 생각하여 『성』을 『깨끗』으로 번역하였다. 이런 생각은 『정결은 성결의 다음이다』라고 성경구절 같으면서 성경구절이 아닌 구절을 인용할 때에 발뵈고 있다. 이 아프리카 종족은 깨끗하다는 것은 거룩하다는 것과 관계가 없고 관계가 있을 수도 없다고 믿는다. 그뿐 아니라 『깨끗한 숨』이라고 하는 결합(結合)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무엇이 깨끗하다고 하면 볼 수 있어야 할터인데 숨은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떻게 이것을 깨끗하다 할 수 있으랴? 무엇이든지 깨끗하려면 빨아야 할터인데 누가 숨을 빤다고 하는 것을 들었는가? 선교사들은 이 말의 뜻을 설명하려고 무한 애를 썼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번역자들은 방언이라는 흙에 새로 만든 형용사라는 꽃을 키우려 하다가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자라는 것을 보게 되는 수가 많다.

우리와 다른 문화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본토인의 생활과 관점(觀點)을 할수 있는대로 포착(捕捉)하여야 할것이니 그렇지 아니하면 남쪽 멕시코에 사는 홍인종들에게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마가 12:40) 서기관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우스운 일이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 홍인종들은 옥수숫대로 담을 삼고 풀로 지붕을 이었다. 가축들이 먹이가 드물 때에는 집지은 옥수숫대와 풀을 먹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린 가축이 집을 다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어떤 곳에서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것은 대담한 비유가 아니요, 실제적 위험이다. 그래서 거기 홍인종들은 대체 이 서기관들은 누굴까? 굶주려빠진 가축중 하나의 이름일까? 이런 경우에 번역자는 『과부의 가산을 없앤다』고 번역할 것이다.

문화적차이 때문에 번역을 못할 것은 아니다. 그 차이는 같은 말이 지시하는 방향만 뵐뿐이다. 넓은 빅토리아호의 구불대는 언덕에 사는 사나키족에게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계시록 3:20)를 말하여 주기는 곤난하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도둑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사나키지방에서는 도둑들이 도둑질하려는 집의 문을 두드리는 버릇이 있다. 만일 집안에서 무슨 움직임이나 소리가 나면 도둑은 도망가고 만다. 도둑 아닌 사람은 남의 집에 가면 그 집 주인의 이름을 불러 그 목소리로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사나키어로는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부르리니』하고 번역하여야 한다. 이런 말투는 영미 사람들에게는 우스울 것이나, 그 뜻은 마찬가지다. 무슨 말투든지 뜻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더러 문 열라고 청하시는 것이다. 그는 도둑이 아니시고 또 억지로 문 열고 들어가지도 아니하실 것이다. 그는 문을 두드리신다. 사나키 말로는 『그는 부르신다.』가 된다. 생각하여 보면 사나키 말은 어느 말보다 더 친근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문화적 상사점(相似點)이 때로는 너무도 희미한 수가 있다. 불령 서부 아프리카 우아가두구시 주위의 ?은 사하라사막 변두리에 사는 맛시 사람들은 배나 닻에 대하여서는 아는바가 도무지 없다. 이 사람들에게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히브리 6:19를 고대로 말하여 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닻』이란 말을 가르쳐 주려고 긴 설명을 하여야 할것이요, 그리고 이 말씀은 『영혼을 위하여 무겁고 갈래나고 뾰죽한 쇠덩이』를 의미한다고 하면 그들은 괴롭고 무서운 짐이라고 생각하고 영적 안전을 준다는 뜻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게 될것이다. 그러나 맛시족에게 그와 근사한 말이 있으니 곧 『짐승 매는 말뚝』이다. 그들은 귀중히 여기는 말이나 소가 있으면 그 짐승들을 밤에 밖에 있는 말뚝에 매어 재우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맛시족 방언으로 번역된 성경에는 『영혼의 말뚝 박아 튼튼하고 견고하여』로 되어 있다. 이 『말뚝』이란 말이 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고 있다. 그들의 속담 중에도 『좋은 말을 나쁜 말뚝에 매는 사람은 없다』하는 것이 있다.

어떤 경우에는 문화적 상사점이 도무지 없기도 한다. 들리기에 이상할찌 모르나 세계의 어떤 지역에 사는 민족은 노름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런 민족은 무한한 푸른 들을 뚫고 구불 구불 흐르는 아마손강의 페루국에 있는 지류(支流)들 언덕에 살고 있는 쉬피보족들 중에 있다. 쉬피보 방언을 자세히 조사하여도 『노름』이라는 말은 없다. 그 민족은 요행을 노리는 노름을 하지 아니한다. 마가 15:24에 군병들이 예수의 옷을 나누려고 『제비를 뽑더라』를 이 민족의 말로는 어떻게 번역할찌 어렵다. 매우 불충분하게 그 때 일어난 일을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쉬피보번역은 『그들은 누가 무엇을 가질까 결정하려고 작은 물건을 흔들었다』로 되어 있다. 물론 『작은 물건을 흔들었다』라는 말은 설명해야 할 말이다. 성경의 여러 가지가 이렇게 번역되는 때가 많다.

많은 지역에서 선교사들이 이 문화적문제에 포함된 모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번역하여 많은 실수를 하고 또 널리 퍼진 오해를 가져오게 한 일이 있다. 서부 아프리카에서 한 번역자는 『구원한다』는 뜻이 있다고 생각되는 말을 하나 찾아냈다. 그는 여러해 동안 이 말을 사용하다가 우연히 이 말은 누더기 옷을 꿰맨다는 뜻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런 뜻이면 성경에 기록된 속죄적 구원을 가리키기에는 적당치 못한 말이다. 엎친데 덮친다고 그는 『은혜』라는 말로 그 본토인들이 『남을 저주한다』는 뜻이 있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많은 문화를 보면 초자연적 능력은 선한 것이기보다는 더 흔히 무섭고 해로운 것이다. 그 선교사가 사용한 말은 그 본토인들이 남이 마법사로 여길까보아 크게도 말하지 못하는 말이다. 그 선교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대신에 마술의 힘과 하나님의 저주의 효력을 찬양한 셈이 되었다.

이렇게 눈에 뜨게 잘못된 것보다 더 심한 것은 본토인 사상을 쉽게 적응(適應)시키려는 경향(傾向)이다. 서부 아프리카 어느 지역에서는 『구원』이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자유』라는 뜻이 된다. 이것은 좋은 번역 같으니 그 말의 진정한 뜻을 따지면 구원은 곧 자유다 - 죄의 능력과 구속에서 자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용주의(實用主義)의 정신을 가진 본토인들에게는 이 자유라는 말이 딴 것을 의미하고 있다. 학교에 가서 읽고 쓰기를 배운 소년(少年)들은 부역(賦役)을 나가지 않아도 좋고 또는 억지로 정부관리들의 사환과 같은 직업을 가지게도 아니하며 어떤 소년들은 세금도 내지 않게 된다. 선교사와 일하는 신자들은 강제노동에서 자유케 되고 세금에서도 자유케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는 기독신자가 되어 『자유케 된다』는데 아무 영적 의미가 없다. 그들은 정치적, 경제적 자유만 생각하고 선교사와 교제하는 것은 이 자유를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해 동안 헌신한 선교사들의 진실한 전도가 물질주의에 젖은 귀에 떨어지고만 있었다. 이 서부 아프리카 사람들은 매일 우물에 물 길으러 갈 필요가 없어지게 생수를 얻고저 한 수가 우물 옆 사마리아 여인과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녀의 물질주의로부터 영적 요구를 깨닫게 되는데까지 지도하셨다. 복음의 교훈은 순전히 육체적 목적을 위하여 흔히 이용되나 사람을 인도하여 영적 진리에까지 가도록 하여야 한다. 서부 아프리카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이 그곳 방언에 능난하지 못하여 물질적에서 영적으로 인도하는 일을 못하는 수가 있다.

선교사들은 자기 사상표현에 합하도록 많은 새말을 만들어내려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물론 새말 제조를 많이 하게 되기는 하나 자기 서재의 평안한 상아탑 속에서 할것은 아니다. 말은 늘 사용함으로 시험해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멕시코의 오는 홍인종 방언에서 생긴것 같은 터무니 없는 표현을 하게 되는 것이다. 번역자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하고 말한 요한 1:14을 번역하려고 하였다. 그 번역자는 스스로 변론하기를 『은혜』는 『선물』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 상하문(上下文)을 보면 선물보다 더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생명의 선물』더 나아가서 『산 선물』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자기 조역자에게 이것을 물어보니 그는 알 수가 없다고 대답하였다. 마침내 그 조역자는 말하기를 『이것은 아마 「닭」인 게지요』하였다. 그 지방 사람들에게는 산 선물이라고 하면 닭 밖에 모르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 구절을 본토인들은 『닭과 진리가 충만하더라』로 알게끔 되었다.

번역하는데 더 복잡한 문제중 더러를 해결하는 한 방법은 그 지역내에서 유행하는 상업용어로부터 어떤 전문용어를 꾸어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꾸는 일을 주의깊은 조사가 없이는 할 수 없다. 말을 한번 꾸어오면 그 말은 본토 문화를 배경으로 한 새뜻을 가지게 되고 그 말이 생기게 된 그 본래(本來)의 문화를 배경으로 하지는 않게 되는 까닭이다. 베네수엘라의 모틸론 홍인종들은 『가장 순결하다』라는 서반아 말 "purisima"를 꾸어왔는데 그 말은 "Maria purisima"(가장 순결한 마리아)라는 구절에서 온 말이다. 그러나 이 『프리시마』라는 말은 모틸론 홍인종의 말로는 『마귀』라는 뜻으로 씌어지고 있다. 그 홍인종들은 어떻게 그 말의 뜻을 그렇게 정반대로 만들었나 하고 이상히 여길찌 모르나 그 이유는 알기 어럽지 않다. 서반아 사람들이 이 『마리아 퓨리시마』라는 말을 모틸론 홍인종들이 자기네들의 위하는 귀신들을 위할 경우와 꼭 같은 경우에 사용하는 것을 들었다. 서반아 사람들은 의심스러운 장사를 할 때에 이 말을 씀으로 착한 신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요 나쁜 신에게 말하는 것일 것이라 믿어 이 말 퓨리시마는 서반아 마귀라고 그 홍인종들은 알았다. 

이와 똑 같은 일이 비률빈 루손도 종족중에서 일어났다. 본토인들은 "seguro"(참말)라는 서반아어를 빌어왔는데 그들은 『아마』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서반아 사람들은 남이 믿어주지 않을것 같은 말을 할 때에는 "seguro"라는 말을 쓰는 것을 보고 이 말은 『아마』라는 뜻인가보다 생각하여서 그대로 쓰게 된 것이다.

래틴 아메리카에서 사용되는 종교용어에 피상적인 뜻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끌루리아』(서반아어 "gloria"『영광』의 빌어온 말)를 어떤 지방에서는 술 먹고 날뛰는 종교적행사를 가르치기 위하여 사용하고 멕시코의 사포텍 지협(地峽)에 사는 종족은 『뚜밍구』(서반아말 "domingo"『일요일』에서 빌어온 말)라는 말을 『춤 춘다』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서반아어 "ayuno"(금식)는 볼리비아의 퀘츄아어로 번역한 성경에는 사용할 수 없었으니 그 지역에서는 이 말을 어떤 성자를 위하노라고 정오까지 종교적 금식을 한후 난잡히 술마시고 뛰노는 행사에 사용하는 까닭이다.

영어만이 세밀히 분간된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다른 방언에도 어떤 사물에 대하여 영어보다 더 분명하게 표현되는 것을 보고 놀랠 것이다. 리베리아의 크펠레 방언으로 『내 양은 나를 따르느니라』(요한 10:27) 한 말씀을 세가지 다른 방법으로 번역할 수 있다. 한가지는 『나를 따라오되 멀찌기서 따라오너라』라는 뜻이 있다.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참될 것이나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참 뜻은 아니다. 또 둘째 번역은 나쁜 생각을 가지고 『몰래 뒤를 밟는다』『쫓아온다』라는 뜻이 있다. 셋째 번역은 『인도자 뒤에 따라오라』는 뜻이 있다. 이것은 정당한 것이다. 그리고 첫 두가지는 잘못된 뜻이다.
방언들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다고 강조(强調)하므로 방언들은 같은 은유(隱喩)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이것은 잘못이다. 북부 멕시코 고산지대의 타라후마라 홍인종 여자들은 그 남편을 가리켜 『우리 영감 (젊어도)』이라고 부른다. 파나마의 밸리엔테족은 어떤 사람을 골내게 하였을적에 『그는 그 사람을 불 태웠다』라고 한다. 이런 은유는 우리 말과도 통한다.

쉬피보족은 인정 있다는 말을 『염통을 가졌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영어와 같을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 완성된 인격을 가리키는 것도 된다. 쉬피보족은 인격의 중심은 염통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적 형편으로 보면 사람이 인격을 가졌다는 것은 그가 그 부족사회에서 남과 원만한 생활을 한다는 뜻이 있는 것이다. 쉬피보부족 사회에서는 가장 큰 중점(重點)을 유명한 인격에 두지 않고 사회구조에 융합(融合)할줄 아는 재능 곧 자기 주장을 힘차게 내세움이 없이 사회에 무슨 공헌이고 하는 그 재능에 두었다. 이 이상을 『염통을 가졌다』라는 은유로써 나타냈다.

은유나 이미 되어 있는 표현구(表現句)가 없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대답은 『묘사(描寫)하라』는 것이다. 모든 방언에 묘사하는 것은 다 필요하다. 페루의 후아누코 퀘추아 방언에는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마태 4:7)라는 표현구(表現句)가 없다. 이 민족은 성경에 있는 것 같은 뜻으로 이 문제를 생각하여 보지못한 듯하다. 그래서 번역자는 이 경우를 훌륭하게 묘사하기를 『내 하고 싶은대로 하려고 하나님을 떼밀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 묘사구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라는 것보다 더 뜻이 좋으니 그것은 『시험』이라는 말은 죄 짓게 된다는 뜻이 더 센데 마태 4:7의 참 뜻은 우리는 하나님을 강압(强壓)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인 까닭이다.

인도 지나의 한 섬나족어에는 『새로 난다』라는 말을 옮길 아무 말이 없는듯 하였다. 그 말로 『새것』은 『난다』는 말과 합하여 말을 되게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새 마음을 받기 위한 남』이라고 말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사실 이것이 『새로 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두번 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성질로 나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알파베트를 만들어 내고 문법을 분석해내고 하는 것을 비교적 단시일내에 한다. 그러나 그 방언의 맨 안방에 들어가려면 여러 해의 근고가 필요하다. 그 방언의 맨 안방 그것은 그 방언의 관용구의 곳간이다. 무뚝뚝하고 생명없는 번역은 단시일내에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지역 사람들에게 친밀히 말하는 번역이 되려면 상업상이나 업무상에 쓰이는것 같은 겉에 붙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깊이 부딪치는 말로 되는 것이다. 영국과 애굽령 수단의 우덕어로 『네 일이나 보살펴라』를 직설적(直說的)으로 번역할 수 있으나 우덕족의 말대로 번역한면? 『네 집 그늘 속에 앉았거라』가 된다. 다시 말하면 남의 일에 오지랍 넓게 참견 말아라 하는 것이다. 『이 세상 풍속을 좇고』(에베소 2:2)를 느곡 띵카어로 직역할 수 있으나 이렇게 하면 느곡 띵카어로는 좀 어색하다. 그 말로 이 뜻에 합하는 말에 『이 세상의 자리에 앉는다』가 있다. 밸리엔테어로 『저녁』을 『해 진 후』라고 번역할 수 있으나 밸리엔테 말에 『그날의 넋』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말이 적당하다. 뽈리비아의 바람센 고원지대(高原地帶)에 사는 아이마라 홍인종의 말로는 호수의 언덕을 『호수의 입술』이라고 한다. 쉬피보족은 『구름』을 『하늘 연기』라 하고, 북부 콜럼비아의 꼬아지로족은 『맑은 하늘』을 『푸른 구름』이라고 한다.
많은 본토족어(本土族語)는 여러가지 신화신앙을 반영(反映)하고 있다. 불령(佛領) 서부 아프리카 맛시족은 월식(月蝕)을 『고양이가 달을 먹는다』라고 하는데 니카라구아의 미스키토족은 『달이 그 장모를 붙잡고 있다』라고 한다. 그러나 모든 이런 관용어는 이런 사상에 직접 관련이 있는 신앙을 발뵈는 것이라고 생각하여서는 아니된다. 싼 뿔라스 홍인종은 문둥이를 『뱀문 병』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문둥병은 뱀이 물므로 되는 것이 아닌 것을 잘 안다. 오직 이런 관용어만 생긴 것이다. 이것은 영어에 『떼블스 프드 케익』(마귀의 음식과자)이라는 말은 영미인이 그런 신앙이 있다는 것을 뵈지 아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본토 관용어는 익살맞은 것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면 우덕족은 『아담스 애풀』(아담의 능금=목통뼈)을 『맥주를 원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느 방언을 그 방언이 대표하는 문화와 또 그 문화의 산 한 부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연구하면 연구하는대로 처음에는 모순투성이요, 불가능한듯이 보이던 것들이 차차 밝아져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컬럼비아와 베네수엘라의 변경 험한 산속에 사는 싸움 좋아하는 모틸론족은 『에토카파』라는 말을 가졌는데 그들은 이 말을 세가지 서로 다른 뜻으로 사용한다. (1) 자살한다. (2) 옥수수 과자를 만든다. (3) 알을 깬다. 이런 뜻은 서로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나 모틸론족은 이 세가지 뜻으로 쓰이는 에토카파라는 말은 하나요, 또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모틸론 문화를 자세히 연구하면 이 세가지 말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을 알게 되나니 이 세가지 동작은 알 모양의 물건에 관련이 있는 까닭이다. 사람이 죽으면 그 송장을 알 모양의 관에 넣어 집안 마루 밑에 묻는다. 三년후에는 그 뼈를 파내어 타원형 꾸러미에 싸서 먼 산속 굴에 넣어 둔다. 옥수수 과자는 손으로 알 모양으로 빚어서 찐다. 알 깨기는 물론 첫 두가지 뜻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 동사 『에토카파』의 기본 뜻은 『알 모양의 물건에 관계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 배경을 알게만 되면 분명히 관계가 없는 뜻으로 보이던 것이 관계가 있는 것으로 뵈어진다.

많은 방언에는 특수(特殊)하고 구체적(具體的)인 말들은 있으나 일반적(一般的)이요, 추상적(抽象的)인 말들은 적다. 예를 들면 쉬피보어에는 여러 동물의 이름들은 있으나 우리말로 『동물』하는 것처럼 동물 일반을 가리키는 말은 없다. 그런데 본토어들 중에는 광범위(廣範圍) 한 뜻을 가진 명칭이 있기도 한다. 느곡 띵카어에 "dhueen"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에는 『선(善)』으로부터 관대(寬大)와 위신(威信)까지도 그 뜻에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한 말 속에 여러 가지 사상을 뭉치어 놓은 것은 띵카족의 문화적 배경을 반영하는 것인듯 싶다. 띵카족이 사는 지역에서는 열대성 폭우가 몇달 계속하는중에 습기가 심하여 곰팡이의 해(害)가 많고 또 여러 가지 쏠아대는 작은 비례의 해가 크기 때문에 무슨 물건이고 안전히 저장하여 두는 수가 없으므로 남에게 너그럽게 나누어 주는 풍속이 생기게 되었다. 이렇게 나누어 주고 자기가 필요할 때에는 남에게 얻으러 간다. 부(富)와 위신(威信)은 자기 쌓아놓은 소유가 얼마나 많으냐 하는데 있지 않고 자기가 가진 물건을 얼마나 잘 허트리느냐 하는데 있다. 이 한마디 말 "dhueen"이 모든 문화적 배경을 포함하고 있다.

여러 외국 문화에는 서로 모순 되는듯한 성분(成分)이 많다. 뽈리비아의 한 방언인 퀘추아어에는 과거를 앞이라 하고 미래를 후(後)라고 한다. 이 말을 듣고 이 사람들은 바보들이거나 뒤바뀐 방위(方位) 철학을 가지지 아니하였나 하고 흉을 볼찌 모른다. (우리 한국에서 『전, 후』라는 말은 퀘추아어와 같다고 볼수 있다. 『연전』『一년후』『앞서 왔다 갔다.』『후에 온다』) 그러나 퀘추아족은 자기들의 말이 옳다고 할 상당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말하기를 『당신의 마음 눈으로 과거와 미래를 보려고 하여 보시오. 어느 것을 볼수 있소?』우리의 할 수 있는 대답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볼수 있다고 할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옳은 말씀이요. 그러므로 과거는 당신의 앞에 있고 미래는 당신의 뒤에 있는 것입니다.』과거와 미래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움직임에 근거를 두었고 그들의 해석은 원근법(遠近法)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들의 해석이나 우리의 해석이 다 옳은 것이다.

『장방형 원(長方形圓)』이란 것을 얘기할 수 있는가? 누구든지『못할것이라』할 것이다. 동남쪽 페루의 밀림지대에 사는 피로 홍인종들은 그런 말을 사용하는데 그것이 옳게 사용된다. 그것은 피로족의 기하학적 원근법(幾何學的 遠近法)은 우리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포푸로롤루』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모지다』혹 『둥글다』로 번역할 수 있다. 그 참 뜻은 물상(物象)의 변(邊)은 곧거나 굽거나 불구하고 같은 비률(比率)이라는 것이다. 『낏포』라는 말은 일반으로 『원』이라고 번역하나 원래는 『어떤 물상(物象)이 굽은 선(線)으로 둘리다』라는 뜻이다. 『꼬쉬포탈루』(위에 말한 제二, 제三의 말이 합해서 된 말)라는 말은 얼른 보고 번역하기를 『장방형 원』이라 할찌 모르나 균형(均衡)이 잡힌 굽은 변들을 가진 긴 타원형( 圓形)의 물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말중 어느 것이든지 영어에 어떤 한 말로 번역할 수 없는 것은 전체 기하학적 형상을 맞추는 방법이 우리와 다른 까닭이다. 그들의 방법은 우리의 것과 똑 같이 유효(有效)하여 그들이 만든 도기(陶器), 의복, 안면(顔面)에 정교(精巧), 복잡(複雜)하게 그려진 모양(模樣)을 설명하기에 극히 적당하다. 그들의 방법이 우리와 다르다 하여 그들을 흉볼 근거는 없다.

우리가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背景)을 소화하게 되는대로 우리는 다른 족속들의 관용어를 더 원만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까본의 이파나우 말로 『저희가…거저 보내었거늘』(마가 12:3)을 『저희가…그의 손만 들려보내었거늘』로 번역하였다. 포도원에서 과실을 가지고 그 주인에게 돌아가야 할 종은 아무 것도 갖지 못하고 갔다. 자기 손 외에 든 것이 아무 것도 없이 떠나가는 이 모욕(侮辱)을 당한 종의 모양을 이 번역을 읽고 분명히 볼 수 있다. 이런 번역이 성경 교훈에 생명을 주는 말로 나타내는 그림이다. 우리는 성경에 말로 나타내는 그림을 점점 희미하게 보게 되었으니 그것은 우리가 그런 말이 나오게 된 문화를 이해할 수 없게 된 까닭이다.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에베소 1:13에서 인침을 받는다는 영어는 "seal d"인데 영미 사람들은 『씰드』라 하면 통조림하였다는 것이나 설탕에 절인다는 것으로 아나 성경시대에서는 소유권의 확인(確認)을 위하여 인치는 것이다. 이것도 문화적배경을 몰라 이해가 희미하게 된 한 예다. 느곡 띵카족은 어느 가축의 소유권 확인을 위화여 인(印)을 사용하지 않고 또 계약서의 유효(有效)를 증명하려고 인치는 봉납(封蠟)을 사용하지 않고 자기들의 가축에 화인(火印)을 찍음으로 그 소유를 표한다. 그리스도인의 하나님과 관계를 말할 때에 『화인을 찍는다』고만 말하여 충분하지 아니하여 『마음에』라는 말을 더하여 그 교훈을 강하게 하였다. 느곡 띵카어로 에베소 1:13의 번역은 이러하다 -『너희는 약속의 성령으로 마음에 화인을 맞았다』

전에는 매우 강한 비유적 표현(比喩的表現)이던 말들이 지금은 그 뜻과 맛을 잃은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영어로 『히파크릿(외식자)』이라는 말은 희랍어에서 빌어온 말인데 원뜻은 『배우』라는 말이다. 말라까시족은 외식자를 가리켜 『깨끗한 라피아(라피아 자리는 라피아라고 하는 종려섬유로 짠 자리다)를 까는 사람이라』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일상 생활에서 온 말이다. 이 말은 손님이 오는 것을 보고 얼른 깨끗한 라피아 자리를 꺼내어 쓸지 않고 더러운 마루에 깔아놓는 말라까시의 깨끗지 못한 살림군의 행동에서 나온 말이다. 외식자라는 것은 이와 같이 속 마음은 여전히 더러우면서도 얼른 겉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