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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장 :  오순절 날로부터

복음을 일상 생활의 말로 번역하는 일은 신앙의 새로운 모험이거나 하나님의 경륜에서 이탈(離脫)된 일이거나 하지 않다. 사실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전도를 들은 것은 一천九백년전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놀라운 뉴스다. 동방의 바대와 메대며 북방의 부루기아와 밤빌리아며 남방의 애굽과 리비야며 서방의 구레네와 로마로부터 온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입교한 이방인들이 이 전도를 다 자기 방언으로 들었다. 봄에 거행되는 거룩한 절기에 참예하려고 예루살렘에 모여 든 상인(商人)들과 선원(船員)들과 그밖에 순례자들이 있었다. 성전에서 예배하려는 사람들, 옛 친구들을 만나보려는 사람들, 그리고 이 기회에 장사를 하여보려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거의 모든 사람은 희랍어로 통하였다. 그러나 희랍어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하여서는 희랍어와 아람어를 할줄 아는 통역자들이 있었다. 그때에 한군데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성신이 내리자 군중 가운데 놀랠만한 소식이 삽시간에 쭉 퍼졌다. -『저 갈릴리 사람들의 말을 들었소? 그들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말을 하지 않소? 저 들어보소.』요엘의 예언과 다윗의 언약을 선포하는 베드로의 전도를 듣는 군중은 놀램과 이상함에 정신을 못차렸다. 그 날에 3천여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말로 분명하고 능력 있게 말하는 구원의 복음을 들은 것이다.

오순절의 이적은 초대교회의 갈 방향을 가리켜 준 것이다. 생명의 복음은 산 말로 전하여야 할 것이다. 신약을 그 때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코이네 희랍어로 기록하였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복음 기자들은 자기들의 순박한 말을 기사여구(綺辭麗句)와 학술적술어(學術的術語)로 꾸미려고 수사학 교수(修辭學敎授)들을 찾아가지 아니하였다. 그들의 기록된 책의 아름다움은 그 문장의 수식된 데 있는 것이 아니요, 그들의 사상의 숭고(崇高)한 데 있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 중에 여러 사람이 예수께서 자기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였을 것은 의심 없다. 그들은 그 때 팔레스타인에서 농부나 귀족이나 다 사용하던 아람말로 기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팔레스타인뿐 아니라 전세계를 위하여 있다. 그러므로 복음은 그 때 세계의 말인 희랍어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그 재료를 아람어로 기록된 문헌에서 가져오고 예수께서 사용하셨을 듯한 아람어의 말투가 섞이어 있기는 하나 복음은 희랍어로 기록된 것이다. 이리하여 모든 사람은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이단이라고 규정(規定)지은 예수의 교훈을 끊어 없이하려고 한 음모도 이 교훈이 세계적으로 번져 나가는 힘을 두려워한 데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헤쳤다. 그러나 그 결과로 교회는 더 늘었다. 이것을 무서워한 그들은 사울이라는 청년을 다메섹에 보내어 이 염병 같은 교를 뿌리채 뽑아버리려 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가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회개와 용서와 새로운 생의 길이 전파되었다. 이 복음이 어느 말로 맨먼저 번역되었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맨먼저 번역된 말은 유대 기독교인들의 북쪽 이웃인 수리아말인 듯하다. 수리아 사람 타시안이 제2세기에 복음 이야기를 기록하였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 타시안은 선교정신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네 복음서의 기록에서 그리스도의 일생에 대한 연속적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의 저작을 『띠아테사론』이라고 부르는데 그 뜻은 『네 복음에 의하여』다. 이것은 수리아어를 말하는 기독교인들을 위한 예수전이다. 그 후 얼마 아니되어 신약전체가 수리아말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을 『페시토역』이라 한다. 페시토는 『단순』이라는 뜻이다. 여기서도 번역자들은 보통사람들의 사용하는 말로 성경의 교훈을 옮겨놓으려 하였다. 이것이 수리아어역인데 이 성경을 네스토리안 기독교인들이 사용하였다. 네스토리안 교회는 파사에서 퍼져 나가 아라비아와 인도와 터키스탄과 중국에까지 이르렀다. 중국에서는 이 교회가 없어졌는데 그 이유는 수리아에서 가졌던 자기들의 전통을 옮기지 못하고 또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지 못하였던 까닭이다. 인도 남부에서는 아직도 성도마교회라는 이름으로 계속되고 있는데 거기서는 지금까지도 그 교회목사들은 성경을 수리아어로 읽고 말라얄람 말로 번역한다.

우호적 민족(友好的民族)들만이 생명의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상고희랍과 로마 세계의 무서운 원수들도 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배타고 다니는 비시까트족들이 희랍과 소아세아를 쳐서 파괴시킨 전설이 있다. 튜톤족의 이 무사들은 금, 은, 철, 비단, 베, 향품을 얻는 데만 만족하지 않고 거기 주민들을 잡아다가 종을 만드는 데도 만족을 느꼈다. 이 약탈을 일삼는 까트족에게 잡혀간 포로들 중에는 진실한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 겸손한 신앙과 스스로 드러나는 성결의 생활로 자기들을 잡아온 사람들에게 복음의 빛을 비취었다.

로마가 완전히 정복할 수 없는 족속들은 로마로 동화(同化)시키려 하였다. 그리고 주후 332년에 로마가 까트족들을 크게 이긴 후에는 까트군인들로 하여금 로마제국 방위를 맹세하게 하고 로마군대에 편입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지위는 볼모로 잡힌 사람들의 지위였고 오직 대우만 잘 받았을 뿐이었다. 이 까트군인들에게 종군목사처럼 봉사하던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울필라스였다. 그는 공식으로 알려지기는 군대에서 성경을 읽는 사람이었다. 그가 컨스탄티노풀 근처에 이 까트군대와 함께 주둔하고 있을 때에 그들을 위하여 성경을 그들의 말로 번역할 필요를 느낀것 같다.

전도자로 하여서 울필라스의 재능과 또는 희랍어, 래틴어, 까트어에 대한 그의 지식과 그의 행정적수완(行政的手腕)을 그 지역 교회 지도자들은 인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얼마 아니하여 이 비교적 젊은 사람은 까디아 감독으로 임명함을 받았다. 그의 직함은 그가 맡은 교회들 보다는 더 위엄스러웠다. 그의 교회들이란 선교지 교회로 보잘것이 없었다. 노하기 잘하고 종교도 모르는 왕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는 자기 감독구에서 전도하여야 되고 세례를 주어야 하고 새 교회를 조직하여야 되었다. 그는 칠년간 따늅강 북에서 자기의 적은 교중을 먹이며 예배보다 전쟁을 더 흥미 있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회개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마침내 까트족 장군들은 이 전도인과 그의 신도들을 쫓아냈다. 까트의 감독은 컨스탄시어스 황제에게 이 쫓겨난 사람들을 로마제국 지경 안에 살게하여 주기를 청하여 따늅강을 건너와 현대의 풀레브나 근처에 정주(定住)하게 되었다. 그래서 울필라스는 『까트족의 모세』라는 이름을 듣게 되었다. 그후 울필라스는 따늅강 북쪽으로 얼마나 더 갔었는지, 그 시대에 있었던 신학상 논쟁에 그가 얼마나 그의 시간과 경력을 썼었는지 우리는 모르나 한가지 아는 것은 까트어로 성경을 번역한 것은 그의 영구불멸할 사업이다. 어떤 상고 기자는 그를 까트어 알파베트를 만든 사람이라고까지 말하였다. 그가 그 알파베트를 개량하였을 것은 의심없으나 만들어내지는 아니한것 같다. 그가 까트에서 일하기 전에 이미 까트어를 기록하기 위하여 희랍과 로마의 알파베트를 채용(採用)한것 같은 흔적이 있다. 울필라스 전에는 그 말 기록법이 여러가지였다. 그것을 울필라스가 많이 개량하였을 듯하다.

울필라스의 신약의 대부분이 『씰버 코덱스』(은 사본)라는 사본 안에 보존되어 있고 구약은 몇 단편이 역사적자료로 알려졌을 뿐이다. 그의 번역으로 말미암아 선교사업에 성서번역의 중요성을 알뿐 아니라 영어의 기초에 대한 좋은 참고자료를 얻게 되었다.

우리는 그가 주후 383년 경에 죽기전 전성경을 다 번역하였었는지 모르나 그가 죽은후 20년에 그의 번역을 돕던 사람 중 몇이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성경을 래틴어로 번역한 저 유명한 쩨롬과 편지왕래하던 것은 안다. 이 까트번역자들은 성경의 어려운 구절들에 대하여 쩨롬의 도움을 청하였다. 예나 이제나 한 번역자가 다른 번역자에게 그 당하는 문제의 도움을 청하는 것은 자연히 있을 노릇이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수리아인에게 애굽의 캅트주민, 에디오피아인, 그리고 로마의 원수인 까트인과 같은 그 이웃 주민들에게만 성경을 주는 것으로 만족하여 하지않고 그들을 다스리는 사람들 곧 로마인에게도 그 말씀을 주려고 하였다. 성경을 래틴어로 처음 번역한 사람들은 누구들인지 모르나 어거스틴이 자기 시대에 『통역자가 너무 많다』고 불평한 것을 보아 번역자가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초기 래틴 번역 성경들 중에 가장 널리 전파된 번역을 『이탈라』라고 부르는데 이 번역에는 본문에나 번역에나 서로 모순되는 것이 많아 주후 382년에 로마 교황 다마서스는 총명하고 젊은 수도사 유세비어스 쏘프로니어스 하야로니머스를 명하여 이 혼란한 번역을 정리하여 누구든지 알 수 있는 래틴 번역을 하게 하였다.

후세에는 쩨롬이라고 알려진 하야로니머스는 일찍이 로마에서 수사학과 철학을 연구하였다. 거기 유하는 중에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 세례까지 받았다. 그는 직업을 얻고 그 직업에 안정하려고 하는 대신에 정신적 불안의 해결을 얻으려고 정처 없는 길손이 되었다. 그는 꼴지역을 여행하고 소아세아를 여행하였다. 마침내는 칼씨스광야에 살고 있는 금욕주의 수도자들과 같이 살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성경을 철저히 공부하였다. 그후 컨스탄티노풀에 잠간 갔다가 로마로 돌아왔다. 그의 얼굴은 사막의 해볕에 걸었고 몸에는 금욕주의자의 거친 옷을 걸치었다. 로마의 화려한 생활에 도취한 사람들은 그의 능력있는 전도에 크게 감동이 되어 회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는 그들을 권하여 모든 세속적생활에서 떠나라고 하였다. 이 사람들 가운데 두 여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자기들의 소유인 굉장히 큰 집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내놓았다.

다마서스법왕을 도와 로마에서 교회집회 때 서기노릇을 하였다. 그후 쩨롬은 신약 개역을 시작하여 3년만에 완성하였다. 사람들은 이탈라역본에 애착을 가졌었기 때문에 그의 개역사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원번역을 고친다는 것은 하나남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였다. 쩨롬은 자기의 괴로운 형편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만일 내 직업이 왕골 바구니를 엮는 것이거나 종려잎사귀로 방석을 짜는 것이어서 내 이마에 땀을 흘림으로 매일 살아갈 벌이를 하는 것이었더면 남의 시기는 받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 구주의 명령을 순종하며 모든 영혼의 유익을 위하여 썩지 아니하는 떡을 준비하며 어떤 지식 없는 사람이 심은 잡초를 지식의 밭에서 뽑아내는 일을 택한 이후에 두가지 비평을 받게 되었다. 만일 내가 성경본문에 있는 잘못된 것들을 고치면 나를 곡필가(曲筆家)라고 배척하고 만일 내가 그런 잘못된 것들을 고치지 아니하면 잘못된 것을 눈가리는 놈이라고 욕한다.』
여하간 쩨롬이 가졌던 꼭 한가지 소원은 이탈라역본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전하여진 여러 가지 드러난 모순점들을 자유로히 고칠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탈라역본에는 같은 희랍어 글자들을 아무 특별한 이유도 없이 매우 다른 래틴 글자들로 번역하였다. 예를 들면 대제사장이라는 희랍어 『아~키에레우스』를 세가지 서로 다른 래틴어로 번역하였다. (『푸린셉스 쌔서~도텀』『썸머스 쌔서~도스』『폰티펙스』). 쩨롬은 이런 모순점이 20세기에 서반어 성서 개역위원들에게 문제 거리가 된 것은 생각지 못하였을 것이다. 쩨롬이 무의식중에 남겨 놓은 모순점들을 초기 서반아어 번역자들이 그냥 받아들이고 그것이 그냥 전하여 내려와서 많은 서반아 그리스도 신자들은 대제사장이라는 세 가지 서반아어 『푸린씨페 떼 도스 쌔서-도데스』『써모 쌔서-도테』『폰티피세』가 세가지 다른 직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고 원 희랍어에서는 같은 한 글자인 것을 그렇게 번역한 것을 잊고 말았다.

다마서스법왕이 죽고 새 법왕은 시기를 하고 하여서 쩨롬은 부득이 로마를 떠나 로마제국중 그렇게 이름나지 아니한 곳을 찾아 피신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 때 그는 희랍어만큼 히브리어도 능숙히 알려고 하였다. 그렇다 하면 팔레스타인에 있는 어떤 곳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이다. 그는 곧 성지(聖地)로 길을 떠났다. 자기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왔다. 그는 그들과 함께 베들레헴에 와서 교회를 세우고 믿음의 동지(同志)들의 살 집을 짓고 예수의 나신 곳인 베들레헴을 찾아오는 순례자들을 유숙시킬 여관을 세우고 하였다.

34년간 쩨롬은 베들레헴에 살면서 구약을 히브리어에서 래틴어로 번역하는 사업에 그 세월을 거의 다 이바지하였다. 그는 번역사업 이외에도 시간을 내어 ?2권의 성경주석과 두 권의 교회사와 기독교 은사(隱士)들의 전기들과 교회문제와 교회문제에 대한 수 많은 논문들을 저술하였다.

구약을 래틴어로 번역하는 큰 사업에 20여년이 걸렸다. 주후 405년 쩨롬이 65세가 될 때에 그 번역은 완성되었다. 완성이 가까이 올때에 그의 안력이 쇠약하여져서 딴 사람이 히브리어를 읽어 주면 그는 그것을 입으로 번역한다. 그러면 또 한 사람은 그것을 받아썼다. 사무엘과 열왕기를 발행하자 서방에 있는 감독들이 크게 반대하였다. 그들은 쩨롬이 자기 개인의 성경해석을 전파시키려고 이런 번역을 하는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구약전체가 발행되었을 때에도 그 반대는 쉬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쩨롬은 자기 번역이 지금은 시기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반대를 받으나 마지막에는 이기게 될 것을 보았다. 그 증거로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들은 공중 앞에서는 내 번역을 공격하고 있으나 남 모르는 곳에서는 그것을 읽고 있다.』

전체 민중을 위하여 준비된 이 훌륭한 번역은 차츰차츰 교역자나 평신도가 읽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크게 퍼지고 말았다. 현대에 『벌게잇』이라고 알려진 이 쩨롬역은 그 때 『벌게터스』(일반민중을 위한)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서방교회에서는 이 번역을 높이 공경하여 공인(公認) 번역성경이 되었다. 교회 회의가 열릴 때면 벌게잇은 황금 상자에 넣어 운반되었다. 슬픈 일은 교회가 성경을 황금상자에 넣어두기만 하고 교회권위문제같은 교회정치문제에만 몰두하게 되고 만것이다. 교회는 서양초기와 중세기의 무너져가는 사회에 그 권위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으나 그 권위로 세속생활을 지배하려고 하다가 그 정신을 잃고 말았다. 교회의 참 교훈은 일반 민중과 교역자에게 다 가리워지고 벌게잇역 성경을 공경은 하면서도 그 성경이 말하는 구속의 복음의 뜻은 말갛게 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