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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 성경에 복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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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찰스五세는 혁명의 기운을 교회와 나라에 불붙이는 설교를 하는 골치덩어리가 된 수도사에게 자기는 이단자라고 하는 자복을 받기 위하여 교역자들과 국가대관들의 회의를 열었다. 로마 천주교는 전에 이단적 의견을 가진 많은 개혁자들을 손쉽게 박멸(撲滅)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 수도사에 대하여서도 그리 큰 관심을 처음에는 두지 아니하였었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아주 다르다. 이 사람은 굳센 뜻과 총명한 마음을 가졌다. 이 사람은 철저한 수양과 풍부한 지식을 가졌다. 이 사람은 교회의 법령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 충성하였다. 이 사람은 과거 어떤 개혁자들보다 다르다. 출교(黜敎)와 사형(死刑)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그는 방약무인(傍若無人)한 그 원수들과 몇 아니되는 용감한 자기 친구들이 모인 앞에서 『나는 성경에 복종하노라』하고 외쳤다.
루터의 이 외친 말은 개혁운동의 힘과 영감이 되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은 무수한 세력을 움직이게 한 세력이다. 이 때까지 대중은 교회만이 하나님의 구원의 단 하나의 길인줄로 알았다. 그러나 성경에서 그들은 새로운 샘물을 발견하였다. 사신 그리스도는 교회제도라는 착고에서 놓이게 되시고 생명의 복음은 영적으로 노예가 된 민중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교회의 권위에 도전(挑戰)하고 성경에 복종한 사람은 루터가 그 첫 사람은 아니었다. 주후 1170년 불란서 리욘스의 상업가이던 왈도는 성경의 내용을 알려고 매우 열심이었다. 그러나 그는 래틴어를 읽을줄 모르기 때문에 성경은 그에게 있으나 마나한 책이었다. 그는 돈 좋아하는 수도사 두 사람을 고용하여 그 때 교회가 엄격히 금지하는 법을 어기면서 성경을 남부 불란서의 방언인 푸라벤살어로 번역하게 하였다. 이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크게 감동된바 되어 자기 상업을 버리고 가난하게 살겠다는 맹세를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쉬운 말로 전도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바치었다. 1179년에 로마 법왕은 그가 가난하게 살겠다고 맹세한 것은 인정하였으나 그가 전도하겠다는 것은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그 이유는 『래틴어도 모르는 사람이 무슨 진리를 전도하겠느냐』는 것이었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래틴 말은 그 듣는 사람들을 얼떨떨하게 하였으나 왈도의 순박한 전도는 사람들의 영혼을 깨나게 하였다. 사람들더러 회개하라고 외치는 그의 말은 훌륭하지는 못하였으나 능력은 있었다. 그와 그의 제자들의 전도는 거의 다 성경의 구절을 보통말로 읽어주는 것이었다. 그들중 많이는 손으로 베낀 성경이 값이 비싸 가질 수가 없었고 또 가진댔자 교회 당국자들에게 그것을 빼앗겼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속에 외어둔 성경은 아무도 어찌하지 못하였다. 이 한미(寒微)한 전도인들은 부르짖기를 시제(施濟)와 미사는 죽은 사람을 위하여 아무 소용이 없으며, 연옥(煉獄)은 성경적이 아니요, 감독의 사죄(赦罪)는 효험이 없는 것이며, 기도는 교회의 화려한 속에서보다 골방의 비밀한데서 하는 것이 더 값이 있고, 용서를 받는 것은 교회에서 공포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전도로 진실된 사람들을 많이 얻고 그 반면에 강렬한 반대도 많이 자아냈다. 1194년 서반아왕 알폰스二세는 왈도를 따라가는 사람에게 음식을 주는 사람이나 이 불법전도자의 전도라도 들은 사람은 가산을 몰수하고 형벌을 주겠다고 을러메었다. 1211년 스추래스벅에서 80명의 왈도파 신자들이 그 신앙을 내버리지 아니한다고 태워 죽였다. 그러나 이 교파는 독일, 불란서, 뽀헤미야, 항가리, 폴랜드로 퍼져나갔다. 왈도파 전도인들은 목수로나 상인으로나 대장장이로나 재봉사로 가장하고 다니면서 비밀히 전도하였다. 그들은 어디서나 자기들의 전도를 들으려는 사람을 만나면 소망과 신앙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이렇게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을 『친구들』이라고 불렀다. 종교재판소는 이 『친구들』을 무참히도 찾아내어 죽여 없앴다. 그래서 어떤 지방에서는 이 사람들의 전도는 거의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진리의 씨는 심겨졌고 그 열매는 영국의 위클리프의 용감한 활동으로 말미암아 맺혀지게 되었다.
모든 이단자들은 박멸된 줄로 알았다. 영국의 교회 당국자들은 교회에 대한 이 홧덩어리를 피할 수 있을 줄로 알아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짠 위클리프는 1384년까지 살아 있어 계속하여 교회의 부패상을 공격하고 또 영국 사람이면 누구나 다 성경을 자기 나라 말로 읽을 수 있게 되어야 한다는 그의 진실된 소망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큰 노력을 하였다. 교회당국자들은 여전히 위클리프를 미워하되 그가 죽은 후까지도 미워하였다. 그들은 그가 죽은지 24년 후에 그의 번역한 성경까지 아울러 그의 저술한 것은 무엇이나 말끔 없애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 위클리프가 끼친 영향은 계속하여 그들에게 도깨비처럼 나타났다. 그들은 위클리프가 죽은지 44년 후에는 그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 뼈를 꺼내 살라 그 재를 그가 살던 집이 있는 동네 가까이 흐르고 있는 강물 속에 던졌다. 이런 이단자에게 붙은 것은 무엇이나 다 없이하여 영국의 거룩한 땅을 더럽힘이 없게 하려 하였다.
위클리프의 신앙은 그가 살고 있던 시대의 절망적 상태와 그가 신학을 가르치려고 조직적으로 생각한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영국교회는 귀족과 결탁하여 일반 민중을 노예화하려 하였다. 설교는 예전 성인들의 전기에서 가져온 이야기나 몇가지 말함으로 그쳤다. 교직자들은 자기들만이 교인들에게 무슨 생각을 하여야 할찌 가르쳐 줄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위클리프는 악스포드대학에서 신학을 강의하면 할수록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되겠다는 그의 믿음은 더욱 굳어져갔다. 영국에서 꼭 필요한 이 변화는 일반 민중이 성경을 그 본 방언으로 읽게 되지 않고는 일어나지 못할 것을 그는 확신하였다. 그 때는 래틴어 성경만 있었고 이 성경도 가진 사람은 교역자 중에서도 얼마 아니되었다.
악스포드대학에서 위클리프의 인기는 커서 많은 명사들이 그를 따랐다. 그 중에는 짠 퍼-비, 위클리프의 성경번역을 도와준 늬콜라 데 히여포드, 위클리프가 번역한 성경을 출판하게 재정으로 도운 캅함경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출판하는 것으로만 넉넉지 아니하였다. 그 때는 일반 민중은 거의 다 글을 읽을줄 몰랐고 인쇄기가 발명되기 전이라 손으로 성경을 베끼므로 값이 싸게 먹히지 못하여 널리 전파가 못되었다. 그래서 위클리프는 『가난한 목사들』이라는 전도단을 조직하여 그들로 하여금 영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성경을 읽어주고 기억하였던 긴 성경구절을 외어 들려주고 회개하고 새생활을 하라고 권면을 하게 하였다. 집에서 난 옷감으로 옷을 해 입고 짚세기를 신고 늘 주의하는 교회당국자들의 눈을 피하느라고 그 거친옷속에 성경을 감추어 가지고 다니는 이 한미한 하나님의 종들은 그때 부자로 호화로히 지내는 교역자들과는 하늘과 땅의 차였다.
짠 퍼-비는 참된 번역자는 어떠하여야 한다고 기록한 글 가운데서 이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경건한 정신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번역자는 깨끗한 생활을 살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자기 마음을 세상 일로 충만하게 말며 지혜와 재주와 진리의 저자(著者)이신 성신으로 하여금 역사하시게 하고 잘못으로 가지 못하게 붙드시게 할 것이다. 이런 태도와 좋은 생활과 많은 여행으로 사람들이 참되고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을 하게 되고 성경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것은 처음에 어려운 듯하나 하나님께서 그 은혜로 힘있게 하사 마침내는 기쁨으로 어려움을 이기게 하신다."
롤라-드라고도 브로는 『가난한 목사들』은 민중 가운데 큰 인기를 끌어서 국왕과 교회는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 진실된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시대가 오게 되었다.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말뚝에 매여 태움을 받기도 하고 고향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캅함경은 롤라-드운동을 도운 까닭에 살라 죽임을 당하였다. 몇이 뽀헤미야로 도망갔다. 뽀헤미야에는 위클리프의 저서를 읽은 사람 하나가 그 나라의 종교 혁명의 불을 일으켯다.
악스포-드 신학교수 짠 위클리프의 열렬한 저서를 탐내듯 읽은 짠 허스는 푸라그대학의 한 가난한 학생이었다. 허스는 위클리프의 실제주의와 또 그가 성경은 제쳐놓고 교회의 전통만 위주로 하는 신학을 공격한 논리에 크게 공명하였다.
1405년 허스는 안수받은 목사가 되었다. 그의 설교는 능력이 있었다. 그의 커 가는 인기는 교회와 정부 당국자들에게 위험감을 주었다. 그들은 그가 롤라-드운동을 일으키는가 의심하였다. 그는 목사직을 빼앗겼다. 그러나 곧 푸라그대학을 포함한 큰 논쟁이 벌어졌다. 허스는 위클리프의 변론법을 잘 배워 그것으로 자기 논점을 힘있고 분명하게 뵈었다. 이 변론 통에 푸라그대학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대학이 되고 말았다.
그때 첵코슬로바키아어로 번역된 성경이 있었으므로 허스는 위클리프 모양으로 성경번역에 애쓸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허스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이 첵어 성경을 철저하게 개역하는 일을 하였기 때문에 허스는 책성경과 관계를 가지게 된것이다. 교회의 머리는 법왕이요, 또 교회의 몸은 법왕을 돕는 추기경(樞機卿)들이라고 주장하는 교회당국자들의 교리와 싸울 때에 허스가 항상 들고 나온 자기 주장의 권위는 그 근거를 성경에 두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늘 성경을 상고하고 그 잘못된 번역을 교정할 필요를 느꼈다. 허스는 그리스도 외에 누가 머리가 되고 그를 믿는 사람들 외에 누가 그 몸이 될 수 있으랴고 생각하였다.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는 허스의 이단설은 교회의 찬성을 받을 수 없어 교회재판에 부치게 되었다. 교회당국자들은 재판소로 가는 도중과 재판이 진행 중에 허스의 신변안전을 보장하였으나 실제 그가 재판소로 가게 될 때에 그들은 그를 잡아 결박하고 옥에 던졌다. 재판정에서 만일 그가 그 믿는 바를 취소하지 아니하면 죽이겠다고 그들이 을러댈 때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성경의 진리로 나를 믿게 하는 것 외에 나는 원하는 것이 없다.』그리고는 자기를 사형하려고 이미 작정한 재판관들 앞에서 그는 무릎을 꿇고 목소리를 높여 자기 원수들을 용서하여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재판관들은 더 참을 수가 없어 그의 목사의복과 장식을 찢어 벗기고 그의 머리에 『이단자』라 쓴 운두 높은 종이 모자를 씌웠다. 그리고는 사형장으로 끌어냈다. 그를 기둥에 잡아매고 나무와 짚을 그의 목에까지 이르도록 쌓아놓은 후 자기 믿는바를 취소할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그는 『나를 거짓 증인들이 고발한 것 같은 것은 내가 도무지 가르쳐본 일이 없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증거하신다. 내가 저술하고 가르치고 전도한 복음의 진리 안에서 나는 오늘 기쁨으로 죽는다』하고 굳세히 말하였다. 나무와 짚에 불을 붙이자 불꽃이 그를 둘러쌀 때에 그는 높은 목소리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하고 노래하였다.
프라그대학의 한 고학생으로 생계를 위하여 노래를 부르던 허스는 1415년에 자기를 태우는 불꽃 속에서 새로운 교훈을 선포하였다. 이 새로운 교훈은 1세기쯤 후에 독일에 있는 다른 고학생에게 들리운바 되었다.
『나는 성경에 복종한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포로다. 나를 성경으로나 조리 있는 변론으로 수긍(首肯)케 함이 없고서는 나로하여금 내 소신(所信)을 최소하게 못할 것이다.』
루터를 수긍케 한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소신을 취소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반대는 커서 그는 융커쬬지라는 거짓 이름을 가지고 왈트뻑성에 피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그의 가장 중요한 사업을 시작하였으니 곧 신약의 독일어역이다. 이 번역은 1년 후에 마치고 1522년 9월에 그 첫 출판이 되었다.
죄의 벌로 하나님의 노를 면하지 못한다는 무서움을 가지게하는 엄격한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루터는 자라났다. 그는 변호사가 되려고 얼퍼트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이 공부가 젊은 마-틴의 영혼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지는 못하였다. 그는 수도사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1505년 7월 17일에 얼퍼트에 있는 어거스틴파 수도원에 들어가고 1507년에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의 신학공부라도 그에게 속 평화를 갖다 주지 못하였다. 그는 계속 공부하여 1512년에 신학박사의 학위를 얻었다. 그러나 박사학위나 로마로의 순례나가 하나님을 알려 하는 이 사람의 열망하는 마음을 만족시켜 주지 못하였다. 이 때에 루터의 주의는 철학적으로 변론된 신학으로부터 성서적으로 선포된 실재주의(實在主義)로 옮겨졌다. 루터는 자기 고민의 해결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입는다』라는 바울의 선언에서 발견하였다. 교회의 권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에 나타나신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이다.
요한 텟쓸이 사죄부를 팔러 1517년 윗톈뻑에 왔을 때에 루터는 실제 행동을 취할 것을 결심하고 윗텐뻑성 왕립교회당 정문에 95개 조문을 붙였다. 이 조문에서 루터는 변론하기를 사죄부는 교회당국자들이 민중에게 죄의 사함을 돈 주고 얻을 수 있다고 약속함으로 돈을 모으는 방법이라고 하였다. 두 주일이 못다 되어 이 95개 조문은 전독일에 퍼지고 루터는 갑자기 유명하여졌다. 루터의 동정자들은 루터의 선언을 기쁨으로 칭찬하고 그의 원수들은 그를 이단자로 몰아 그의 인기를 떨어뜨리려고 그를 반대하는 선동을 하였다. 그 때에 루터는 교회가 가난한 사람을 함부로 부리는 것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법왕의 권력은 성경 교훈으로 보아 정당한 것이 아니라 하고 또 주의 만찬에 대한 천주교의 교리는 잘 못된 것이라고 공격하였다. 천주교에서는 목사가 기도하면 포도주와 떡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루터는 교회에서 받는 세납을 경감(輕減)하고 동냥하는 수도사의 나쁜 행동을 억제하고 교직자의 사치생활을 금지하며 교회가 정치를 간섭하는 것을 반대하는등 개혁을 강조하였다.
이 모든 사건 때문에 루터는 정죄되고 1521년 4월 16일 윎스의 황제앞 회의에서 재판을 받게 불려왔다. 그러나 그의 반대자들은 그의 자복이나 그의 자기 소신 취소를 얻지 못하였다. 그들은 루터를 잠시동안 피신케 만들기는 했으나 그의 목소리를 잠잠케는 못하였고 그의 붓의 격렬한 활동을 막지도 못하였다.
루터의 설교의 감화와 독일어로 번역된 신약의 발행은 민중을 자극시켜 내란과 혁명이 일어나게끔 되었다. 루터는 이렇게 소란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소란이란 사회의 기초를 흔들어 놓는 것으로 그는 생각하였던 까닭이다. 그래서 그는 농민전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기를 요구하면서 동시에 농민전쟁을 진압후 관대히 처리하기를 요구하는 것도 잊지 아니하였다. 루터는 자기의 주장을 열심히 받아들일뿐 아니라 자기 생각보다도 더 앞서 나간 사람들을 반대하였는데 그런 루터의 행동은 우리로서 이해하기가 곤난하기도 하다. 우리는 그의 행동을 찬성하거나 아니하거나 루터는 자기가 해석한대로인 성경의 빛밑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 보려고 하였다는 것은 인정해 주어야 할것이다.
루터는 윗텐뻑에서 계속해 교수하였다. 그리고 그는 결혼함으로 그 친구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 때 그는 구약 번역을 시작하였다. 이 일에 그는 11년간 자기의 성의와 정력을 바치었다. 1534년에 가서야 번역이 완성되어 독일어로 성경전체가 출판되었다.
루터는 주장하기를 자기 번역은 『하나님을 모르는 땅에서 들려질 주의 노래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루터 시대의 독일에는 알려지지 아니한 것들이 성경에 많이 있는 까닭에 이렇게 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루터는 성경에 있는 생소한 글자들이나 어려운 구절들을 독일어로 축자역(逐字譯)하는 것으로 만족해 하지 아니하였다. 그렇게하면 독일어 알파베트로 앵무새 옮기듯하는 것 외에 투철한 뜻을 밝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 학자들을 찾아 구약의 도량형(度量衡)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 하였고 푸주간들을 찾아 구약 제사의 여러가지 순서와 제물을 기록하는 말들을 알아내려 하였다. 그는 요한계시록에 있는 보석들의 적당한 이름들을 알려고 보석보(寶石譜)를 연구하였고 성경 여러 책에 있는 비유나 이야기를 독일말로 살게 번역하려고 장난하고 있는 아이들과, 일하고 있는 장인(匠人)들의 말을 자세히 들었다. 이 모든 사람들로부터 성경번역에 사용할 풍성한 말을 거두었다. 성경은 마땅히 보통 민중이 사용하는 말로 번역할 것이요, 대학 교수시간이나 재판소 변론 때 사용하는 학구적인 굉장한 문자를 써서 번역할 것이 아니라고 그는 항상 주장하였다.
루터의 번역한 성경은 새로운 푸로테스탠트 신앙의 모퉁이돌이 되었다. 『푸로테스탠트』는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은혜를 증거한다는 뜻이다. 이 증거는 영국사람 윌리암 틴델을 자극하여 루터가 독일을 위하여 성경번역을 한것처럼 자기는 자기 본국을 위하여 성경을 번역할 것을 결심케 하였다.
런던감독은 펄쩍 뛰었다. 윌리암 틴델이 구라파에서 출판한 신약이 계속해서 영국으로 몰래 들어와 교회혁명의 불꽃을 퍼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턴스탈감독은 영국의 법률을 무시하고 대륙으로 망명하여 1525년 성경을 영어로 출판한 이 영국사람을 찾아내려 떠났다.
턴스탈감독은 영국 안에서 성경 읽는 이단을 쓸어버리려고 하였다. 이렇게 하려고 그는 집을 뒤지고 신약을 압수하라고 명하였다. 신약을 가진 사람들은 이단자라고 하여 잡았다. 그는 또한 대륙으로 가서 이 거짓말을 퍼뜨리는 자를 찾아내려고 하였으나 그 숨은 곳을 찾지 못하였다. 감독은 대륙에서 어거스틴 팩킹톤이라는 상인을 하나 만났다. 그 상인은 감독을 돕는 듯이 꾸미고 이 불법한 책을 대량으로 얻어오겠다고 언약하고 그 값은 적지 아니할 것이라고 다짐을 두었다.
팩킹톤은 즉시 자기 친구 틴델에게 가서 런던감독과 맺은 흥정을 설명하여 주었다. 얼마 아니가서 감독은 출판된 신약 전부를 사라는 말을 받았다. 이 것은 틴델이 고쳐야 쓰겠다고 생각하는 곳이 많은 책들이었다. 감독은 좋아서 얼른 후한 값을 내고 샀다. 틴델은 이 돈을 가지고 새로 고친 신약을 발행할 수가 있었다.
턴스탈감독은 수백권의 신약을 가지고 개선장군 모양으로 런던에 돌아와서 울시 추기경과 함께 런던 폴스 크로스 거리에서 그 신약들을 불사르는 일을 행하였다. 그는 틴델의 신약이 든 158 바구니를 그 거리에 쌓아놓고 신약을 가졌었다는 죄로 잡힌 이단자들로 하여금 불붙는 나뭇단을 책들 위에 던지게 하였다.
감독은 그 신약들을 불살랐으나 얼마 아니가서 영국은 더 좋고 더 많은 신약을 가지게 되었다. 윌리암 틴델은 그 성경번역을 할만큼 잘 준비한 사람이다. 그는 악스포드대학과 캠부리즈대학에서 거의 20년을 연구하였다. 그가 캠부리즈대학에 온 것은 아마 그때 유명한 에래스머스의 강연을 들으려 한것인 듯하다. 애래스머스는 1509년으로 1514년까지 캠부리즈대학에서 교수하였다. 틴델의 충성된 친구요, 조역자인 짠 프리트를 만난 것도 캠부리즈대학에서였다. 그 후 틴델은 끌로스터솨야의 작호(爵號)를 가진 짠 왈쉬경의 가정 교사가 되었다. 얼마 아니가서 틴델은 왈쉬경의 관대한 손님대접하는 가풍을 누리는 고위성직자(高位聖職者)들의 울분을 사게 되었다. 그것은 틴델이 늘 성경을 인용하여 그들이 답변할수 없는 변론을 하며 기독교생활과 성경 읽는 것으로 말미암아 참된 신앙의 단순성을 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까닭이었다.
틴델은 이때 자기 시대의 영어로 성경을 번역하려고 결심하였다. 위클리프시대 이후 영어의 변화는 큰 것이어서 전의 번역은 소용이 없게 되었다.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려면 런던감독 턴스탈의 허락을 받아야 할터인데 그 감독은 윌리암 틴델과 같은 의심스러운 목사에게 이런 일을 허락할 것 같지 않았고 게다가 틴델은 끌로스터솨야 감독구에 있는 모든 목사의 감독자인 파커씨로부터 공공연히 위협과 꾸지람을 들었음에랴?
틴델은 런던에 가서 서쪽에 있는 성 떤스탄이라고 하는 가난한 교구에서 목회하였다. 그의 진실한 설교에 많은 사람이 끌려왔는데 그 중에 써 허프레 만마우트라는 부자 의복상이 있었다. 이 의복상은 틴델을 자기 집에 와 있게 하고 틴델이 하려고 하는 일을 실행할 수 있게 도와 주었다. 그러나 영국은 이런 혁명적계획을 가진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써 험프레이에게서 돈을 꾸어 가지고 대륙으로 건너갔다. 그는 처음에 햄부르그로 갔으리라고 하고 독일서 루터와 접촉하였으리라고 하나 스스로 이름을 아니 내려고 한 이 시기에 대한 기록은 없다싶이 되고 오직 몇 전설만 남아 있어 잘 알기 어렵다. 한 일년쯤 망명생활후 틴델은 신약을 가장 단순하고 평민적인 말로 번역하였으나 이런 금지된 책의 인쇄를 즐겨할 사람을 얻으러 켈룬으로 가야만 하게 되었다.
할수 있는대로 조심하였는데도 이런 일을 한다는 소식이 코칠리우스의 귀에 들렸다. 코칠리우스는 푸로테스탠트주의를 박멸하려는데 유명한 사람이었다. 첫째로 그는 영국의 울시 추기경과 턴스탈감독에게 자기 할 일을 통지하고 틴델 압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가 인쇄소를 침입하여 그 인쇄물을 압수하기 전에 틴델은 그 음모를 미리 알고 그 귀중한 원고와 마태복음 첫 22장의 인쇄된 것을 가지고 독일 웖스로 피란하였다. 얼마 아니되어 인쇄는 끝나고 1526년 봄에는 적더라도 六천권의 성경이 영국으로 밀수입 되었다.
턴스탈감독은 죽을 기를 쓰고 이 밀수입을 막으려 하였으나 그의 노력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신약을 불사르기 때문에 그 요구만 더 커가서 어떤 화란인쇄인은 틴델이 모르게 인쇄하여 팔아 이를 보기도 하였다. 틴델을 잡을 수 없게 되자 런던감독은 틴델의 예전 친구들을 잡기 시작하였다. 여럿이 출교를 당하고 더러는 옥에 갇히고 더러는 기둥에 매여 태워 죽었다. 써험프레이 만마우트도 성하지 못하였다.
그 때 틴델은 구약 번역을 시작하여 미친 듯이 급하게 그 완성을 서둘렀으나 교회에서 보낸 스파이의 간계에 속아 1535년 잡혀 안트웗에서 멀지 아니한 빌보-드성에 감금될 때에 역대기까지도 완성하지 못하였다. 그의 재판은 16개월을 끌었다. 그 동안에 그는 옥사정의 도움으로 구약 번역을 몰래 하고 있었다. 그 옥사정은 틴델의 감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사형을 받고 감옥소 뜰에서 목매달려 죽었다. 죽은 후 그의 몸을 불살랐다. 전설에 그는 죽을 때에 『주여 영국 왕의 눈을 열어 주옵소서』하고 말하였다고 한다.
오라지 않아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으니 그가 죽은 바로 그 해에 그의 번역한 성경이 영국 안에서 출판된 까닭이다. 법왕을 반대하는 헤느리8세는 턴스탈 감독을 반역죄로 몰아 죽이고 성경 출판을 공공연히 허락하였다. 그래서 틴델이 오랜 세월을 재판받고 있을 때에 자기와 몇해 전에 햄부르그에서 같이 일한 일이 있는 마일스 커버데일이 성경전부를 번역하여 출판할 수가 있었다. 커버데일의 번역은 틴델의 영웅적 번역에 의지한바 크다.
그 후 다른 영어 번역들이 나왔으니 틴델과 커버데일의 번역을 결합한 매틔유성경(1537), 크롬웰이 발행한 대성경(15?9) 쩨네바성경(1560), 감독의 성경(1568)들이다. 이 모든 번역 중에 틴델과 커버데일의 번역을 가장 낫게 본다. 쩨임스왕은 청교도들이나 영국교도들이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성경을 번역하기 위하여 1?04년에 위원들을 임명하였다. 그 위원들의 수는 47인의 학자들이었는데 그들은 틴델과 커버데일의 번역을 토대로하여 사업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1611년에 출판되어 우리들에게 익숙하여진 쩨임스왕 번역에는 틴델과 커버데일 번역의 말이 많이 사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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