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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이야기
제1부 그 땅의 사람들
돌아온 사람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활동하던 시대는 대략 주전 17 세기 경이고, 히브리인들의 이집트 탈출과 팔레스틴 정착은 기원전 13-12 세기 경으로 본다. 사울이 왕국을 세우고 다윗을 거쳐 솔로몬 때까지 이르는 통일왕국 시대는 대략 주전 1020년부터 930년까지이다. 솔로몬 사후 주전 930년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왕국 분단시대가 시작된다. 그 후 북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시리아에게 망하고, 남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빌로니아에게 망한다. 남유다가 망하면서 많은 백성이 바빌로니아로 사로잡혀 갔기 때문에 그들 중의 일부가 538년에 귀환하기까지의 기간을 바빌로니아 포로 기간이라고 한다.

이어서, 외세의 지배가 오랫동안 계속된다. 주전 538년부터 142년까지 페르시아와 헬라 시대, 주전 142년부터 주후 63년까지 하스모니아 왕조 시대, 주후 63년부터 313년까지 로마 통치 시대, 주후 313년부터 636년까지 비잔틴 통치 시대, 주후 636년부터 1099년까지 아랍 통치 시대, 주후 1099년부터 1291년까지는 십자군 시대, 주후 1291년부터 1516년까지는 이집트의 맘룩 통치 시대, 1517년부터 1917년까지는 터키의 오토만 통치 시대, 1918년부터 1948년까지는 영국 통치 시대 등이다.1)


기원전 586년 남 유다가 멸망하면서 흩어지기 시작한 유대인들은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는 거의 다 흩어지고 팔레스틴 본토에는 아주 적은 수의 유대인들만이 남아 있었다. 필자가 유학할 당시 1970년대에 이스라엘의 인구는 삼백 오십만이었다. 그 인구의 대다수는 신생 국가 탄생을 전후하여 모여든 백 오십여 만의 이민들과 이민 후 출생한 그들의 자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세계 도처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이루어진 것이 이스라엘 국민이다. 그 당시 히브리 대학교의 이만여 명의 학생 중 약 사천 명이 해외에서 온 유학생들이었다. 대학교 안에 설치된 현대 히브리어 강습소 울판(Ulpan)에서는 대개 한 반에 15-20명의 학생들이 함께 배웠다. 언젠가 우리는 같은 반 학생들 15명이 모두 출신 국적이 다른 것을 확인하고 놀란 적이 있다.


유학생들의 출신 국적을 보면,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 독일, 영국, 네덜란드, 헝가리, 이탈리아, 폴란드, 루마니아, 러시아, 미국, 캐나다 등 유럽과 북미의 여러 나라; 아르헨티나, 브라질, 콜롬비아, 에쿠아도르, 칠레, 페루, 멕시코, 우루과이, 베네주엘라 등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 알제리아, 투시니아, 이집트, 모로코, 리비아, 이라크, 중국, 터키, 시리아, 인도, 싱가포르와 같은 북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여러 나라; 남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와 오스트레일리아 등이다. 유학생이라고는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디아스포라(diaspora), 곧 나라가 망한 후 여러 국민들 속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의 자녀들이었다. 모국어와 조국을 배우기 위해 자기 조상의 나라로 유학을 온 학생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다양한 국적은 디아스포라의 다양한 분포를 그대로 말해 주었다.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뒤쫓아가서 칠 것이니, 세상의 모든나라들이

          이것을 보고 놀라게 하고, 그들은 나에게 쫓겨나서 사는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저주와 놀라움과 조롱과 조소거리가 되게 하겠다.(렘 29:18)


예레미야의 이 신탁(信託)은 한낱 위협으로 그치지 않았다. 이천 년 디아스포라의 역사에서 우리는 그 위협적 예언의 잔인한 성취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고의 신탁은 정치적 현실이 되어 버렸다. 특히 1933년 1월 30일부터 1945년 5월 8일까지 나치(Nazis)가 저지른 육백만 유대인 대학살(Holocaust)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상 최악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예루살렘 체류 5년 동안 한국에서 오는 성지 순례자들 때문에 이스라엘 안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와 기타 다른 군소 종교들의 유적지들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여러 번 방문할 수 있는 특전을 누렸다. 약 팔만 구천 평방 킬로미터 안에 산재한 그 수많은 역사적, 고고학적, 종교적 장소들 가운데에서 방문객들에게 가장 큰 인상과 충격을 주는 곳으로는, 개인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역시 예루살렘의 야드 바??(Yad Vashem)을 꼽을 수 있다. 야드 바??은 나치 치하의 유럽에서 죽어 간 육백 만의 넋을 달래는 기념 박물관이다. 박물관이 자리 잡은 기억의 산(Mount of Remembrance)에는 육백 만 그루의 나무가 심어져 있고 각 나무 밑에는 희생자의 이름이 모자이크로 수놓아져 있다. 박물관 안에 진열된 사진들과 기타 유품들은 유대 민족이 세계 열방 중에 흩어져서 당한 그 학대, 저주, 시기와 모욕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해준다. 

특히 노소를 가릴 것 없이 나체로 끌려 다니는 여인들의 모습, 강제 노동과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 가는 모습,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탈출하다가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걸려 죽어가는 모습, 가스실에서 집단으로 학살당하는 장면, 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교수대에 달리는 모습 등은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장면들이다. 12년 동안(1933-1945) 폴란드, 러시아,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벨기에, 프랑스, 룩셈부르크, 이탈리아, 네덜란드, 노르웨이,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등 나치 치하 유럽의 15개국에서 어린이 백오십만을 포함한 육백만 명의 유대인을 나치가 학살하였다. 이것은 옛 야만 시대의 역사가 아니라 바로 금세기 초의 일이며, 인류 역사의 부끄러운 오점이다.


나라 없이 살아오기 2천년, 그러나 이 기나긴 세월 속에서도 잃어버린 조국 시온에 대한 유대인들의 꿈은 변함이 없었다. 20세기의 시온주의 운동은 바로 이 오랜 꿈이 실현된 것이다. 시온주의(Zionism)란 말은 시온(Zion)에서 유래하였다. 시온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일찍부터 예루살렘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솔로몬이 건축한 제 일 성전이 무너진 이후, 시온이란 말은 디아스포라들의 조국에 대한 애틋한 향수와 결부되어 특별한 의미로 그들의 심금을 울렸다. 기원 후 586년 나라가 망한 이후 바빌로니아에 잡혀 온 이스라엘 포로들 중 한 시인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우리가 바빌로니아의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면서 울었다. 
          그 강변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수금을 걸어 두었더니,
          우리를 사로잡아 온 자들이
          거기에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고,
          우리를 억압한 자들이
          저희들 흥을 돋우어 주기를 요구하며,
          시온의 노래 한 가락을
          저희들을 위해 불러 보라고 하는구나.
          우리가 어찌 남의 나라 땅에서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도 수금 타는 재주를 잊을 것이다.
          내가 너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내가 너 예루살렘을
          내가 가장 기뻐하는 그 어떤 일보다도
          더 기뻐하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 것이다. 
          (시 137:1-6)

 

위의 시에서 우리는 시온이란 말이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사무친 사모의 대상이 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시온주의란 용어가 생겨난 것은 19세기 후반기였다. 요컨대, 시온주의란 이스라엘 민족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 자유인이 되어 살자는 운동이다. 이러한 시온주의의 기원을 찾자면 옛 메시아 사상으로 소급해 올라가게 된다. 이성주의 시대를 거쳐오면서도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옛 메시아 사상은 많은 유대인들의 마음 속에 그대로 잠재해 있었다. 망국(Exile)과 광복(光復)에 대한 기대(Longing of Redemption)와 국토의 회복(Return to Zion)! 이것은 이스라엘의 신앙 구조 속에서 거의 도식화되다시피 한 것이다. 이처럼 옛 메시아 사상에 뿌리를 두고 출발한 시온주의는 처음부터 두 주류로 갈라졌다. 하나는 정치적 시온주의(Political Zionism)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적 시온주의(Practical Zionism)이다. 전자는 외교적 통로를 통해 국토를 회복하자고 주장한 반면, 후자는 먼저 가능한 수단을 다 써서 일단 팔레스틴에 이주부터 하고 보자고 주장했다. 그 둘 사이의 대립을 해소한 것은 1907년 하임 바이즈만(Chaim Weismann, 신생 이스라엘 국가의 초대 대통령이 됨)이 주장한 종합적 시온주의(Synthetic Zionism)였다. 종합적 시온주의에 따르면, 이스라엘 땅에 실제로 정착하지 않고 해외에서 하는 정치적 활동은 호소력이 없고, 반면에 정치적 노력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이주나 정착 역시 만족할 만한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2)


시온으로 복귀 운동은 동부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떠돌아다니는 유대인들의 입국을 제한하거나 유대인들의 정치적 활동을 억제하기 시작한 19세기 말부터 시작되었고, 나치가 자행한 대학살 기간(1933-45년)에 그 절정에 달했다. “우리는 우리의 조상의 땅에 돌아가서 살 역사적 권리가 있다” “땅이 없는 백성은 백성 없는 땅으로 간다”(a people without a land on the way to a land without a people) “나라 없는 자에게 나라를”(a home for the homeless) 등의 구호를 외치며 유대인들은 주로 위에 열거한 나치 치하 유럽의 15개국에서 팔레스틴으로 이민해 왔다.

그러나 출애굽 이후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가나안으로 들어 왔을 때나 스룹바벨의 영도 아래 바빌로니아에서 귀환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최근에 디아스포라들이 조상들이 살던 땅으로 다시 돌아 왔을 때도 역시 팔레스틴은 그들만을 위해 마련된 신천지는 아니었다. 거기에는 이미 수천 년 동안 땅은 있으나 나라는 없었던 아랍 민족들이 터어키(1516-1917년)와 영국(1917-1948년)의 통치를 받으며 살고 있었다. 따라서 새 이주민인 유대인들과 원주민들인 아랍 사람 사이에서는 토지 매매, 시장 개척, 취업 등등의 문제로 충돌이 잦았다. 이미 19세기 말(1891년)에 시온주의 운동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아카드 하암은 “이스라엘 땅의 진상”3)

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땅이 지금 황량한 불모지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아랍인들, 특히 도시에 살고 있는 아랍인들은 우리의 활동, 우리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는 알면서도 모르는 체 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활동이 아직은 그들의 눈에 그들의 미래를 위협할 것 같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 우리를 이용하고 있다. 속으로는 우리를 비웃으면서 새 손님들에게서 이익을 보자는 심산이다. 그러나 현재 소수의 우리 유대인들이 장차 이 땅에서 다수가 되는 날 아랍인들은 쉽사리 이 땅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예측은 이미 냉엄한 현실이 되었다. 아랍인과 더불어 어떻게 이 땅에 샬롬(shalom,평화)을 가져오느냐 하는 것은 역사적 이스라엘이 지닌 어려운 과제이다.

 


1) 이스라엘의 역사 개요에 관해서는 Facts about ISRAEL, Israel Information Center, 1992, pp.7-52를 볼 것.
2) 시온주의에 관한 개략적 소개로서는 Encyclopedia Judaica의 "Zionism" 항목을 참고할 수 있다. 그 항목만을 따로 뽑아 엮은 Zionism, Israel Pocket Library, Keter Publishing House, 1973을 볼 것.
3) Ahad Ha-Am, "Truth from Erez Israel". Zionism, Israel Pocket Library, p.91에서 거듭 인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