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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이야기
제1부 그 땅의 사람들
이스라엘의 전쟁과 평화


 전쟁과 전쟁의 소문

모두들 집으로 돌아갔다. 히브리 대학교 기숙사에는 갈 곳 없는 외국 학생들만 각 동마다 한 둘씩 남아 있을 뿐이었다. 1973년 10월 6일, 그날은 대속죄일이어서 이스라엘 학생들은 휴가를 가족들과 함께 보내기 위해 대부분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일주일만 있으면 즐거운 초막절이 되기 때문에 그들은 그 명절이 지나야만 다시 기숙사로 돌아올 것이었다.

그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정오가 가까울 무렵 우리는 의문의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 대속죄일은 이스라엘의 달력에 표시되어 있는 모든 휴일 중에서도 가장 엄숙하고 성스러운 날이다. 대속죄일이 되면 사람들은 마시지도 않고 먹지도 않으며, TV와 라디오도 방송되지 않고, 기차나 버스도 다니지 않고, 각급 학교,상점,카페, 사무실 등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국제공항마저도 24시간 동안이나 폐쇄되는, 그야말로 나라가 온통 정지 상태가 된다. 이런 대속죄일에 울려 퍼진 사이렌 소리는 참으로 의외였다. 처음에 나는 우리 식대로 그것이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하라는 신호쯤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계속 울리는 사이렌은 공습경보처럼 들리기도 하였다. 라디오를 켜고 다이얼을 맞춰 보았지만 대속죄일에 방송이 나올 리 없었다. TV도 쉬고 있었다.

라디오가 방송을 시작한 것은 첫 사이렌이 불고 나서 한참 후였다. 방송이 전하는 내용은 놀랍게도 남쪽과 북쪽에서 갑작스런 협공을 당하고 있다는 전쟁 발발 소식이었다. 남쪽에서는 이집트와 국경 지대에서, 북쪽에서는 시리아 접경 지대에서 동시에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이었다. 라디오에서는 예비군을 소집하는 암호 방송이 시간마다 반복되고 있었다. 저녁 무렵에는 기숙사 방문마다 예비군 소집 영장이 나붙었다. 물론 학생들은 방송을 듣고서 기숙사에 들르지도 않고 곧장 소집 부대로 달려갔기 때문에 이 소집 영장을 볼 수는 없었다.

바로 이것이 ‘제 4차 중동 전쟁’ 또는 ‘대속죄일 전쟁’ 또는 ‘욤 키푸르 전쟁’이라고 불리는 전쟁의 시작이었다. 말로만 듣던 중동 화약고에 불이 붙은 것이었다. 1967년 6월 초에 일어난 6일전쟁의 상처가 미처 말끔히 아물기도 전이었다. 이로써 신생 이스라엘은 나라를 새로 세운 지 27년만에 벌써 다섯번 째의 전쟁을 겪었다. 그 전쟁은 이스라엘 국경 밖에서(남쪽에서는 이집트와 시나이 반도, 북쪽에서는 시리아와 골란 고원 지대)에서 싸운 전쟁이었는데, 결국 이스라엘이 승리했다. 그러나 무려 2,500여 명의 이스라엘 젊은이들이 이 전쟁에서 희생되었다.


 전쟁 기념비들

‘욤 키푸르 전쟁’이 터지기 열흘 전, 그해 9월 27일은 유대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그때 나는 길보아산 밑에 있는 한 모샤브1)에서 새해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둘째 날 아침 나는 혼자서 길보아산에 올랐다. 아주 가파르지는 않았으나 올라가기에 그리 만만찮은 산이었다. 한참 올라가다 보니 산중턱쯤에 일개 대대 정도의 병력이 주둔할 만한 넓은 군 주둔지가 있었다. 그러나 약간의 잔여 병력만이 남아 있는 듯 주둔지가 텅 비어 있었고 조용했다. 한 막사에서 부대기 같은 것이 펄럭이고 있었지만 보초도 정문 위병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낡은 주둔지의 구석구석을 둘러 볼 수 있었다. 방갈로처럼 생긴 한 막사의 문을 열어 보니 병사 혼자서 늦잠을 자고 있었다. 병력이라고는 거의 없이 텅 빈 부대였다. 부대 주변에 참호가 파져 있었지만 풀이 무성한 것이 꽤 오랫동안 아무도 그 참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야외 세면장의 수도꼭지를 틀어 보니 물이 나왔다. 거기서 잠시 땀을 식힌 다음 다시 정상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위로 오를 수록 아래로는 이스르엘 초원 지대가 점점 더 넓게 펼쳐져 보였다. 혼자서 길보아산을 오르면서 나는 다윗의 통곡을 생각했다. 기원전 11세기,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이 불레셋군과 대결하다가 이 산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이 슬픈 소식을 전해 듣고 다윗이 부른 애가는 그것을 읽는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이스라엘아, 우리의 지도자들이 산 위에서 죽었다. 가장 용감한 우리의 군인들이

          언덕에서 쓰러졌다. (중략) 요나단, 어쩌다가 산 위에서 죽어 있는가? 나의 형

          요나단, 형 생각에 나의 마음이 아프오. (중략) 어쩌다가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무기들이 버려져서, 쓸모 없이 되었는가? (삼하 1:19-27)
 
이스라엘 안에는 역사 유적지와 성소들도 많지만 그에 못지 않게 전쟁 기념비들도 많다.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던 전투 지역임을 알리는 비문들, 무명 용사들과 영웅들을 기리는 비문들, 독립 전쟁 당시 희생자들이나 부대 이름을 딴 마을 이름들과 도로 이름들 등, 마치 전 국토가 온통 전쟁 기념비로 가득 찬 것 같다.

용사들의 죽음을 기리는 비문들의 내용은 대부분 구약 성서에서 직접 인용한 것이거나 구약 성서에서 영감을 받아 적은 구절들이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아, 우리의 지도자들이 산 위에서 죽었다. 가장 용감한 우리의 군인들이

           언덕에서 쓰러졌다.” (삼하 1:19)

          “저희는 독수리보다도 더 재빠르고, 사자보다도 더 힘이 셌다.” (삼하 1:23)

          “성벽을 쌓는 이들은 저마다 허리에 칼을 차고 일을 하였다." (느 4:18).

          "여기 고이 잠든 이들은 싸움을 돕는 용사들 중에 있던 자들이었다." (대상 12:1을 보라)

          “용사여, 통곡하지 말라. 그대가 지불한 희생은 이미 보상받았다.” (렘 31:16을 보라)

          “그 때가 되면 너를 억누르던 자를 다 없애 버리고 절름발이는 고쳐 주며 길 잃은 자들

           은  찾아내어 고국으로 데려 오리라.” (습 3:19를 보라)

 승리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민족

6? л ? ? . ? ? ?. 이스라엘이 치른 다섯 번의 전쟁 중에서도 세계를 놀라게 하고 큰 충격을 준 것은 6일전쟁이다. 1967년 6월 당시 250만(이스라엘) 대 1억(아랍 국가들)의 대결은 그 숫자만으로는 이미 끝난 싸움이었다. 그러나 그 전쟁은 상식을 부수어 버린 전쟁이었다. 250만이 1억을 상대해서 싸운 6일전쟁이 승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유대인이 어째서 250만 명뿐입니까? 우리에게는 나치에게 살해된 600만 명이 더 있습니다.” 600만 명은 이미 죽었다. 그들은 죽은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유대인들과 더불어 살며 살아 있는 자들에게 계속 영향을 끼친다. 살아 있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 죽은 자들은 살아 있는 유대인들에게 아픈 상처인 동시에 지울 수 없는 기억이다.
 
예루살렘 서쪽에 위치한 ‘기억의 산’ 위에 600만 나치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기념관 이름을 ‘야드바?’(손과 이름)이라고 부른다. 희생자들의 이름들을 영원히 기억하고 기념해야 한다는 뜻이다. ‘야드바?’ 출구에는 ‘욥’이라 이름 붙은 동상이 있고 그 동상 받침대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다.

 

“망각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포로가 되게 하고 기억은 우리로 자유민이 되게 할 것이다.”

 

600만은 지울 수 없는 기억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지금도 유대인들의 삶의 크나 큰 한 부분으로 살아 있으면서 유대인들을 가르치고 고무하고 격려하고 꾸짖고 있는 것이다. 이 죽은 자들의 힘이 지금 유대인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빅토르 솔로몬은 이렇게 진술한다.

 

“중동의 6일전쟁 때 이스라엘을 편 든 나라는 한 나라도 없었다. 이스라엘은 혼자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치에게 죽음을 당한 600만 명의 영혼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우리는 혼자서라도 싸워야만 한다. 싸우지 않으면 하나도 남김없이 없어지고 만다’라는 교훈을 줌으로써 이스라엘을 편들었다. ‘세계의 여론을 믿지 말라. 세계에 친구가 있더라도 그들은 믿고 의지할 친구는 못된다’고 600만의 혼백은 부르짖었다.”


“세계의 여론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은 철저히 이스라엘다운 것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사태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소위 국제 여론에 이스라엘은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국제 여론이라는 것이 이스라엘의 생존 문제를 이스라엘 당사자만큼 심각하게 다루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 민족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섰을 때도 국제 여론은 그것을 강건너 불구경 하듯 하기 때문이다. 국제 여론이란 것이 죽음에 직면한 한 민족을 살리지 못했다는 것을 이스라엘은 역사 경험을 통해서 체득하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생존권은 오직 이스라엘 자신만의 힘으로 지켜 왔고 또 앞으로도 지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2천여 년 동안이나 계속된 디아스포라의 경험을 통해 배웠다.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의지할 곳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의식, 철저히 고립되어 있다는 의식은 지금도 유대인들에게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역사 경험을 통해 인류의 사람다운 인간성마저도 믿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특히 나치의 600만 학살에서 유대인들은 인간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것을 철저히 경험하였다. 20세기의 대학살 이전에도 중세 암흑시대를 전후하여 오랫동안 유럽에서 유대인들은 온갖 박해를 받아 왔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다만 유대인들이란 이유 때문에 살해되었다. 그러나 20세기의 새로운 문명이 밝아 오던 아침,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교육받고 교양을 갖춘 20세기 문명인들(유럽인들)에게 희망을 걸었다.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낳은 나라, 칸트를 낳은 철학 하는 민족의 교양과 양식을 믿었다. 자신들의 장래를 낙관했다. 즉 유대인들은 20세기에 이르러 인류가 또 다시 자신들을 욕보이고 구경거리로 삼을 만큼 타락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유대인 추방 운동가’들이 극성을 떨 때도 교육받은 유대인들은 그것을 무시하거나, “개같이 짖어 대는 놈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지”라고 말하며 태연해 했다. 심지어 “유대인을 죽여라”는 함성이 거리에서 울려 퍼질 때도, “짖어 대는 개는 물지 않는다”라고 말하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인정하려 들지 않던 유대인들도 유럽에는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었다. 문명인이라고 하는 20세기 유럽 사람들은 야만인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어린이 150만 명을 포함해서 무려 6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유럽의 문명인들, 교양인들의 손에 이끌려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리고 죽음의 용광로 속에서 살 타는 냄새를 피우며 번제물이 되었다. 유대인들이 희생 제물로 비명 속에 사라질 때 교양 있는 세계는 침묵을 지켰다. 유대인들이 이유 없는 피해자였을 때 세계는 방관자였다.


6일전쟁이 벌어졌을 때 세계 도처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들 중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지원병이 되어 이스라엘로 몰려들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유대인 청년들이 그 전투 대열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은 이스라엘 특유의 집단적 고립 의식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바티칸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세계도 잠자코 있었다. 기독교 국가들, 문명 국가들 역시 외면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한다. 세계 도처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 젊은이들이 전쟁이 터진 이스라엘로 가기를 열망했고 또 실제로 그리로 가서 전쟁에 참여했던 것은 이런 절실한 이유, 곧 궁지에 몰린 희생자들에 대한 연대감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연대감과 함께 다아스포라들의 절망감을 지적하기도 한다. 디아스포라들이 전운이 자욱한 이스라엘로 몰려든 것은 절망감에서, 곧 자신들의 꿈이 사라진 뒤에 살아 남기 보다는 오히려 그 꿈을 끝까지 지키려는 마지막 사람들과 함께 죽기를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6일전쟁이나 욤키푸르전쟁은 둘 다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3백만 대 1억의 대결은 승부가 뻔히 예상되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그 전쟁에서 결국 소수가 다수를, 약한 것이 강한 것을 굴복시켰기 때문에 세상은 경악했다. 이 전쟁은 사무엘상 17장에 나오는 소년 다윗과 골리앗 장군의 대결을 연상시킨다. 이것 역시 가장 약하게 보이는 것(목동 다윗)이 가장 강한 것(장군 골리앗)을 이긴 싸움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이스라엘이 싸울 때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 때마다, 이스라엘 군의 전술과 용맹성을 입이 닳도록 말했지만, 승리의 주역들이 치른 희생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았다. 수많은 희생자들, 죽음과 직결되는 전쟁에 대한 공포, 그 앞에서 느끼는 번민,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겪어 온 전쟁 분위기 속에서 형성된 집단적인 정신 질환, 남편을 잃은 젊은 여인들의 방황과 고독. 이스라엘에는 독립전쟁 과부들, 6일전쟁 과부들, 욤키푸르전쟁 과부들 등 수많은 전쟁 과부들이 있다. 이 여인들은 출생 때부터 여자 수보다 남자 수가 적은 중동 지역에서 애써 얻은 젊은 짝을 전쟁의 신 ‘마르스’에게 바치고 만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유학하던 5년 동안 내가 사귄 이스라엘의 젊은이들과 군인들의 외모는 오히려 나약한 편이었다. 그들도 전쟁을 즐기는 호전가들은 결코 아니다. 그들도 전쟁이 휘몰고 오는 죽음 앞에서 그 죽음의 쓴잔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어하는 별 수 없는 인간들이다. 다만 민족의 생존이라고 하는 더 큰 뜻 앞에서 자신의 작은 욕심을 버리기 때문에, 집단적으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승리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의식을 가지고 현실에 대면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승리밖에 없었던 것이 아닌가!

 

 


1) 모샤브는 가족 단위의 집단농장 마을로서 사유재산이 인정되는 점에서 키부츠와 다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