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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이야기
제1부 그 땅의 사람들
사마리아 사람들

 

필자가 이스라엘에 유학할 1970년대에 이스라엘 전국에 약 400여 명의 사마리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 중의 약 반은 텔아비브(성서의 욥바) 부근의 홀론(Holon)에, 나머지 반은 세겜(Shechem)의 그리심산 중턱에 살고 있었다. 1차 대전 직후에 사마리아인의 숫자가 불과 150여 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그 당시 400여 명은 꽤 불어난 숫자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그리심산의 사마리아 사람들을 처음으로 방문한 것은 1973년 여름이었다. 그 때 동행한 분은 당시 대구 제일 감리교회에 계시던 김재황 목사였다. 기독교인들의 일반 순례 여정에는 사마리아인 동네(the Samaritan Quarter) 방문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해 여름 우리는 강행군을 각오하고 일반 순례 여정에서 잠시 이탈하여 세겜 시내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그리심산 산마을을 찾았다. 이정표에 따르면 세겜은 예루살렘 북방 66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해 있다. 예루살렘에서 택시로 한 시간 남짓 걸린다.

세겜 입구의 옛 수가 성에는 야곱의 우물이라고 전해지는 깊은 우물이 있어서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예수님과 한 여인의 대화(요 4:1- 42)가 엮어졌던 그 역사의 현장에 서면, 오른쪽으로는 에발산이, 왼쪽으로는 그리심산이 한꺼번에 보인다. 그리심산을 가리키면서, “우리 조상은 이 산 위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고 예수께 말하던 사마리아 여인의 말이 실감날 만큼 그리심산은 바로 코 앞에 보인다. 거기에서 목을 추긴 우리는 몇 번씩이나 길을 물어 가면서 순례자나 관광객의 발길이 드문 사마리아인의 동네를 찾아갔다.

 ? , ?ε .세겜 시내 중앙에는 거대한 모스크(이슬람교의 예배당)가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 건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예수님 당시만 하더라도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그 여인 때문에 온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나중에는 그들이 그 여인에게,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그대의 말 때문만은 아니오. 우리가 그 말씀을 직접 들어 보고, 이분이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심을 알았기 때문이오”(요4:42)라고까지 고백했다는데, 그들의 이와 같은 믿음이 이제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또한 사도시대에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빌립에게 전도를 받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아니라 베드로와 요한의 안수로 성령까지 받지 않았던가! 그래서 사도들이 주의 말씀을 전한 후에 사마리아 여러 마을에는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하는데(행 8:4-25), 필자가 방문했을 당시, 세겜에서 쇼므론(Shomeron, 옛 사마리아 성)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예루살렘, 나사렛, 베들레헴, 가나 등지에는 아랍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지만 사마리아 사람들 가운데 기독교인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사실 필자가 사마리아인의 동네를 처음으로 방문할 때만 하더라도 그들에 관하여 알고 있던 지식이란 고작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관한 비유(눅 10:25- 37),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요 4:1-42), 사도들의 사마리아 선교(행 8:4-25) 등 신약의 기록을 통해 얻은 것뿐이었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방문하기 전에 우리는 그들에 관한 예비지식을 좀 더 보충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제브 빌나이의 『이스라엘 안내』1)에 실린 사마리아인들에 관한 기록을 읽으면서 갔다.

빌나이는 구약 열왕기하 17장 24절을 인용하면서 사마리아인들의 기원을 소개하고 있었다. 즉 기원전 722/1년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멸망당했을 때, 북이스라엘의 열 지파는 모두 사로잡혀 사마리아를 떠났고, 아시리아는 제국 안의 여러 족속의 죄수들을 사마리아 지방으로 이주시켰는데, 지금의 사마리아 사람들이란 바로 그 여러 족속 출신 죄수들의 후예라는 것이다. 구약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그래서 이 날까지 이스라엘은 그들의 땅에서 앗시리아로 사로잡혀 가 있게 된

          것이다. …앗시리아 왕은 바빌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으로부터 사람

          들을 데려와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성읍에 살게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사마리아를 자기들의 소유로 삼았으며, 이스라엘 성읍들 안에 정착하여

          살았다. 그들은 그 곳에 정착하면서, 처음에는 주를 경외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마리아로부터 사로잡혀온 제사장 가운데 한 사람이, 그리로 돌아가 베델에 살면

          서, 주를 경외하는 방법을 그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각 민족은 제각기 자기들의

          신들을 만들어 섬겼다. …이렇게 그들은 주님도 경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

          이 잡혀 오기 전에 살던 그 지역의 관습을 따라, 그들 자신들이 섬기던 신도 섬겼다.

          (왕하 17:23-34)


드디어 우리는 사마리아인 제사장들이 사는 집을 찾았다. 제사장들은 그들의 가족과 함께 회당 옆에 살고 있었다. 마침 한 방에서 50대 전후의 건강한 남자 너댓이 긴 의자에 비스듬히 누어 한가하게 잡담을 하고 있다가 자기들을 제사장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는 뜻밖의 방문객들(그렇다! 당시 그들의 마을에 아시아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은 아주 드물다는 것이다)에게 자기들을 찾아온 목적을 묻는다. 아랍 차(茶)를 대접받으면서 우리 역시 자기 소개를 하고 우선 피차 알고 지내자는 인사부터 건넸다. 그러자 그 중 한 제사장이 대뜸, “당신네들도 우리들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소. 더욱이나 당신이 히브리 대학교 유학생이라면 말이요. 그네들이(유대인들이) 우리더러(사마리아 사람들에 관해서) 무어라고 말하던가요?”라고 다그치는 것이었다. 나는, “유대인들이 무어라고 했다기 보다, 우리는 신약 성서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당신네들을 알고 있지요. 그리고 오다가 들렸습니다만 저 밑 수가성의 야곱의 우물에 얽힌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서도 당신들을 알고 있구요. 그리고 또 사도행전에 보면 당신들의 조상들도 사도들의 전도로 예수를 믿었던 것을 알고 있지요”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다른 한 제사장이 말을 받았다. “아, 그건 사실이요. 그 중에서도 특히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들도 잘 아는 이야기요.” 그 말을 듣고 나는 다시, “우리는 당신들을 방문하기에 앞서 빌나이의 『이스라엘 안내』에 쓰여진 당신네들에 관한 기록을 읽고 약간의 지식을 더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신들을 방문한 주요 목적 중 하나는 이곳 회당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는, 사마리아 오경 두루마리를 한 번 보는 것입니다. 좀 뵈어주실 수 있는지요?”라고 물으면서 그들을 둘러보았다. “여기들 오면 모두 그 두루마리를 찾습니다. 보여 드리고 말고요. 아이들을 시켜 열쇠 가진 이들을 불러와야 하니까 좀 기다리시오. 그런데, 어디, 우리를 소개했다는 이스라엘 안내라는 그 책 한번 봅시다”하며, 처음의 그 제사장이 빌나이의 『이스라엘 안내』를 빼앗듯이 받아간다.


 , ?? ? ? , ? ? ?. ?? ? a ?, ? ? 翡 ? ? ?, ? ?. y, 츮 ? ?. ? 츮 ? ?. ? ??? ?, , ? ? ? ?(?? 24:25-27).  바쁜 일정이었지만 당시 구약성서 히브리어 본문과 고대의 번역본들을 연구하고 있던 필자로서는 꼭 그 사마리아 오경 사본을 보고 싶었다. 사마리아인들이 유대교에서 완전히 갈라져 사마리아 오경을 따로 갖게 된 것은 기원전 4세기이다. 현존하는 유대인의 오경(Torah, 율법서)과 사마리아인의 오경(the Samaritan Pentateuch) 사이에는 약 6000여 곳에 차이가 있다. 그 차이들의 대부분은 사소한 문법적 요소나 철자법의 차이이지만 간혹 주석적 첨가나 삭제, 내용의 차이 등도 있다. 성서학계에서는, 유대인의 오경이 역사적으로 많이 변천되고 수정 가감이 여러 번 가해진 것에 비해 유폐된 소집단이 전승시킨 사마리아 오경의 본문은 본문상의 변화를 비교적 적게 겪어왔다고 평가하여, 귀중한 자료로 취급하고 있는 터이다. 더욱이 마소라 본문과 비교할 때 나타나는 6000여 곳의 이독(異讀) 중 1600여 곳에서 칠십인역과 일치하고, 특히 기원전 2세기의 사해사본과도 많은 곳에서 일치하기 때문에, 사마리아 오경은 본문의 신빙성을 크게 인정받고 있다.2)



그러나 물론 사마리아 오경 안에도 사마리아인들이 교리적 이유에서 본문을 수정한 예가 보인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 20장 17절과 신명기 5장 21절 등의 십계명 끝에다가 각각 신명기 11장 29절의 내용을 삽입시켜 그리심산이 야훼의 성산(聖山)임을 나타내려 한 것, 또는 신명기에 자주 나오는 “주께서 택하실 그 곳”(신 12:11,14,18,21,26 등)이라는 미완료 형태를 “주께서 택하신 그 곳”이라고 완료태로 바꾸고, ‘그 곳’이 바로 ‘세겜’이라고 하는 것 등이다.


? η?   바로 이러한 사본이 이곳 회당에 보관되어 있는 것이다. 대문 열쇠, 출입구 열쇠, 두루마리 보관 상자 열쇠를 세 사람이 각각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기까지 거의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만 했다. 그들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사마리아인들이 자신들의 기원에 관해 말하는 것을 사마리아 제사장들로부터 직접 들어 볼 수 있었다. 빌나이의 책에서 자기들에 관한 기록을 다 읽고 난 그 제사장은 피식 웃으면서 자기들끼리 무어라고 한참 말하더니, 우리에게 말했다. “유대인들은 역시 이처럼 우리들을 세계에 잘못 소개하고 있어요. 이스라엘을 찾는 관광객들마다 이런 따위의 설명으로 우리를 이해하고 있을 테니 말이요.” 그들의 말에 따르면, 사마리아 사람들이야말로 요셉의 직계인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로 형성되었고, 자기 제사장들은 바로 레위 지파의 직계라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사마리아인’ (Samaritans)이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한다. ‘사마리아인’이란 말은 ‘사마리아 지방에 이주해 와서 사는 여러 족속들의 후예’라는 뜻으로 유대인들이 그들을 경멸하여 부르는 칭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을 ‘샤메림’(Samerim,율법을 지키는 자들)이나 ‘샤메림 하에메트’ (Shamerim Haemet,율법을 진실하게 지키는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남들도 그렇게 불러주기를 바란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기들이 곧 참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히브리어가 아닌 아랍어로 말한다.

드디어 우리는 그 역사적인 두루마리 사본을 보기 위하여 휘장으로 가려진 어둑컴컴한 회당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들더러 문 앞에 서 있으라고 하더니, 제법 큰 상자를 두 사람이 입구 쪽으로 운반해 왔다. 상자를 열고 두루마리를 꺼내서 비로드 천으로 덮은 의자 위에 조심스럽게 세워 놓는다. 양피지가 많이 낡아 있고, 본문은 옛 히브리어로 쓰여져 있었다. 그 두루마리를 설명하는 제사장은 그 두루마리를 가리켜 모세의 손자 아비슈아가 가나안 진입 후 13년되던 해에 직접 쓴 원본이라고 설명하였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 두루마리의 나이는 3,000년이 넘는다. 『아비슈아 두루마리』는 주후 1335년 대제사장 비느하스 벤 요셉(Phinehas ben Joseph)이 발견한 이래 그들이 보관해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자들은 『아비슈아 두루마리』가 쓰여진 연대를 그것이 발견되었다고 하는 1335년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해로 잡는다.

 


1) Zev Vilnay, The Guide To Israel, 15th ed.,Jerusalem,1972, 182 쪽 이하
2) 우리나라 학자로 김경래 씨가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에서 사마리아 오경과 그리스어 칠십인역을 비교하여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Kyung-Rae Kim, Studies i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Samaritan Pentateuch and the Septuagint , unpublished, thesis for the degree "Doctor of Philosophy" submitted to the Senate of the Hebrew University,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