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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이야기
제1부 그 땅의 사람들
기혼샘에서 실로암 못까지


 히스기야 터널


기드론 계곡의 기혼샘에서 타이로포에온 계곡의 실로암 못으로 이어지는 터널은 예루살렘의 명물 중 하나이다. 기혼샘에서 솟아나는 물이 터널을 통하여 실로암 못으로 흐른다. 이것이 바로 유다 왕 히스기야(주전 715-687)가 만들었다고 하는 물길(水路)이다.

이스라엘은 비의 복을 받지 못한 나라이다. 긴 여름(4-10월)은 건기에 속하기 때문에 비가 오지 않는다. 따라서 식수 관리는 언제나 심각한 문제이다. 팔레스틴에서 도시의 입지 조건은 전략상 요지이기도 해야 하지만 가까운 곳에 수원(水源)이 있어야 하는 것도 필수적인 조건이다. 도시들은 대개 높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데, 급수원은 대개 성 밖 계곡에 있기 마련이다. 옛 예루살렘이 그러하고, 발굴된 므깃도, 기브온, 게셀 등이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도시들은 성 밖 저 밑에 있는 물을 성 안의 낮은 곳으로 끌어들이는 일과, 적군이 공격해 올 때 적군이 그 물 근원의 줄기를 끊어 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용하지도 못하게 해야 하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 히스기야 터널은 바로 이런 문제를 기술적으로 처리한 것이다. 구약 성서는 그의 이런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ξ

 

          히스기야의 나머지 행적과, 그가 누린 모든 권력과, 어떻게 그가 저수지를 만들고

          수로를 만들어서 도성 안으로 물을 끌어들였는지는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어

          있다. (왕하 20:20)

 

          위쪽 기혼의 샘 물줄기를 막고, 땅 속에 굴을 뚫어서, 그 물줄기를 ‘다윗 성’ 서쪽 안

          으로 곧바로 끓어들인 것도 바로 히스기야가 한 일이었다. (대하 32:30)


          또한 ‘옛 못’에 물을 대려고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기도 하였다. (사 22:11)


외경 집회서에도 히스기야 왕의 업적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히즈키야는 그의 도성을 견고히 하고

          성 안에 물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쇠로 바위에 굴을 파서

          저수지를 만들었다. (「공동번역」 집회서 48:17)

사실 주전 702년경 앗시리아의 산헤립이 쳐들어 와 예루살렘을 포위하려 했을 때 히스기야는 재빨리 성 밖의 샘들과 기혼샘을 파묻어 적군이 수원을 이용하지도, 성 안으로 들어오는 물줄기를 차단하지도 못하게 하였다. 그 사실을 반영하는 내용이 다음 글에 나타나 있다.

          히스기야는 산헤립이 결국은 예루살렘까지 칠 것을 알고, 대신들과 장군들을 불

          러서, 성 밖에 있는 물줄기를 메워 버릴 것을 의논하였다. 그들은왕의 계획을 지지

          하였다.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모든 샘과 들판으로 흘러 나가는 물줄기를 막았다.

          앗시리아의 왕들이 진군하여 오더라도 물을 얻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대하 32:2-4)


히스기야의 그 굴은 지금도 그대로 그 기능을 다하고 있다. 그 굴의 지도상 직선거리는 335 미터이지만 굴이 굴곡을 이루고 있어서 전체 길이는 533 미터나 된다. 처음에 기혼샘에서 실로암 못까지 곧바로 굴을 뚫으려고 시도했던 흔적이 있다. 미완성의 초기 터널(A)이 그것을 보여준다. 터널을 뚫는 작업은 양쪽에서 동시에 시작되었는데, 굴을 뚫고 들어가던 사람들이 굴의 중간 지점에서 서로 마주쳤다고 한다. 그것이 지금부터 2700여년 전의 공사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놀라운 기술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바위의 어떤 결을 따라 꿰뚫은 것 같다.

1880년 아랍 소년들이 실로암 못에서 목욕을 하다가 벽에 붙어 있는, 이상한 글씨(고대 히브리어 글씨체)가 새겨져 있는 빗돌(碑石)을 발견하였다. 그 빗돌의 크기와 모양은 가로가 72 센티미터 세로가 38 센티미터 되는 직사각형이다. 모퉁이가 파손되어 있으며 특히 첫 부분이 절반 가량 떨어져 나가고 없다. 전부 여섯 줄만이 남아 있었는데 읽을 수 있는 부분만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히스기야의 터널 공사를 말해주는 실로암 비문, 고대 히브리어 글씨로 쓰여있다.굴 파는 작업이 (끝났다). 굴이 뚫리기까지 경위는 다음과 같다. (암벽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인부들이 서로 마주 향하여 도끼로 (바위를 찍고 있었는데), 그리고 아직도 뚫어야 할 암벽의 두께가 세 규빗 정도 남았을 때 양쪽 인부들이 서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암벽 오른쪽과 (왼쪽)으로 좁고 길게 갈라진 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업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을 때, 양쪽 인부들은 서로 마주치려고 바위를 파 나갔다. 도끼와 도끼가 서로 마주쳤다. 그러자 샘에서 솟아난 물이 1200 규빗의 저수지까지 흘러 들어갔다. (그들이 뚫은) 바위의 높이는 인부들의 머리 위로 100 규빗이나 되는 것이었다.

 

글의 내용과 글씨체로 보아 유다의 히스기야 왕시대의 것이 분명하다. 이 빗돌이 발견된 것은 터키 통치 시대이다. 그것은 지금 이스탄불의 고대 동방 박물관(the Museum of the Ancient Orient in Istanbul)에 보존되어 있다.
 

  ① 히스기야 터널 입구


  ② 기혼 샘

  ③ 초기 터널

  ④ 서로 만난 지점
 
  ⑤ 실로암 못

  ⑥ 히스기야 터널의 여러 지점 높이

  ⑦ 남쪽 출구

  ⑧ 만난 지점

  ⑨ 북쪽 지점

 


① 후대 건물 ② 기혼 샘 ③ 가나안과 여부스와 이스라엘 시대의 벽 ④ 수평 터널 ⑤ 수갱b ⑥ 수갱a ⑦ 히스기야 터널 ⑧ 지 면 ⑨ 암반 표면 ⑩ 하스모니안 시대의 벽

 

① 계단 ② 기혼 샘 ③ 수갱b (물을 길어 놀리는 바위굴) ④ 수평 터널 ⑤ 여부스와 이스라엘 시대의 벽 ⑥ 수갱a ⑦ 가나안과 여부스와 이스라엘 시대의 벽 ⑧ 히스기야 터널 ⑨ 하스모니안 시대의 벽

 

성지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이 곳을 빼놓지 않고 찾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입구인 기혼샘과 출구인 실로암 못을 구경하는 것으로 그치고, 직접 이 터널을 통과해 보는 사람은 드물다. 늘 물이 흐르고 있어서 깊은 곳은 1 미터 40 센티미터나 되며 터널 안에 아무런 조명 장치가 없는 데다가, 굴 폭이 80-100 센티미터로 좁고, 굴 높이는 북쪽 입구가 2-3 미터, 남쪽 출구가 4-5 미터 정도 되지만 가운데로 갈수록 낮아져서 가장 낮은 곳은 1 미터 70 센티미터 밖에 되지 않는다. 키가 큰 사람은 바로 이 지점에서 고생을 좀 하게 된다. 천장에 머리를 부딪칠 것 같아 약간 고개를 숙이면 입이나 코로 물을 먹기가 십상이다. 

그렇게 낮은 곳을 지나 양쪽 인부들이 만난 곳(북쪽과 남쪽에서 각각 굴을 뚫던 인부들이 서로 만난 중간 지점, C의 10)에 오면 갑자기 천장이 넓어지고 높아진다. 손전등이나 초를 가지고 삼삼오오 떼를 지어 통과하게 되며, 소요 시간은 보통 30분 정도이다. 여름이라 하더라도 수영복 차림으로 들어가면 중간 지점쯤에서 심한 추위를 느끼게 된다. 그냥 옷 입은 채로 굴을 통과하면 쾌적한 기분을 맛볼 수 있다. 흠뻑 젖어서 나오지만 예루살렘의 뜨거운 여름 햇볕을 받으며 다윗성을 거닐다 보면 한 시간도 되기 전에 젖은 옷이 다 말라 버린다.

 

 물을 길어 올리는 바위굴

다윗왕은 나이 삼십에 왕위에 올라 사십 년을 다스린다. 첫 일곱 해 여섯 달 동안은 헤브론에서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을 정복한 다음에는 거기에서 유다와 이스라엘을 통일시켜 서른 해 동안 다스린다. 아직 예루살렘을 장악하기 전에 다윗은 부하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간 일이 있다. 그 때 거기에 사는 여부스인들이 다윗에게 이렇게 빈정거린다.


          너는 여기에 들어올 수 없다.

          눈 먼 사람이나 다리 저는 사람도 너쯤은 물리칠 수 있다. (삼하 5:6)


여부스인들은 다윗이 감히 여부스인의 성벽(a와 b의 D)을 쳐들어오지는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날 다윗은 명령을 내린다.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려거든 물을 길어 올리는 바위벽(굴)을 타고 올라가서,

          다윗이 몹시 미워하는 다리 저는 자와 눈 먼 자들을 쳐죽여라누가 여부스인을 치

          려느냐? (삼하 5:8).


드디어 다윗은 그 견고한 성 시온을 점령하고, 그것을 ‘다윗의 도성’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 ‘물을 길어 올리는 바위굴’(「개역」에는 ‘수구’(水口)라고 되어 있음)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1867년 와렌(Sir Charles Warren)이 이 ‘물을 길어 올리는 바위굴’을 발견하기 전까지 이 구절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본문이었다.

와렌이 발견한 수직 바위굴이란 예루살렘 성 위에서 땅속으로 수직으로 파내려 가 기혼샘에 이르는, 말 그대로 물을 길어 올리는 통로이다. 그림을 보면, B가 와렌의 수직 바위굴이며 7번이 바로 ‘물을 길어 올리는 바위굴’이다. 다윗의 부하 요압과 그의 군대가 여부스인의 예루살렘을 공격할 때 바로 이 물을 길어 올리는 바위굴을 통해서 감쪽같이 성 안으로 잠입하였던 것이다. 이 수직 바위굴의 길이는 12 미터 60 센티미터이다. 본래 이 통로는 성이 포위 당했을 때 성 안에 있는 입구를 통해 굴로 들어가 성 밖의 물을 안전하게 길어 올릴 수 있는 통로이다. 처음에는 우물을 파듯이 위에서 아래로 수직으로 파내려 가려고 했던 흔적이 보인다(b의 6). 아마도 당시의 도구로서는 도저히 뚫지 못할 암반에 부딪쳐 우물 파기를 포기하고 대신 물을 길어 올리는 길을 만들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