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진리는 위대한 교리 안에 구체화(具體化)되어 있다. 우리 주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교훈 안에 진리가 구체화되어 있다. 이 위대한 교리들은 살아 있는 말로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이 되어야 할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교리들은 아무 소용이 없다. 소용이 있게 되려면 하나님의 신의 능력으로 생명을 그 교리들 속에 집어넣어야 하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탄알 없는 헛대포와 같이 되거나 죽은 생명을 거짓으로 장식하여 놓은 것들만 되고 말것이다. 회개, 구속, 구원, 은혜, 의롭다 함을 받음, 성결등의 교리는 사람의 숭앙(崇仰)과 예배를 위하여 세워진 신학적전당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인도하시는 길의 겸손한 지로표다.
회개와 돌아옴
회개는 돌아온다는 경험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이 변화의 첫 걸음인 까닭이다. 남부 아프리카 북부 쏘토족은 회개를 말할 때는 『꾄 것이 풀리다』라고 하고 돌아옴을 말할 때는 『사람이 그 자취를 다시 더듬는다』라고 한다. 죄는 생을 뒤틀고 비꼬며 생을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 정당한 생의 목적을 삐뚜르게 만든다. 회개의 행동으로 사람은 비로소 이전 형편을 의식케 되어 그의 생각이 꾄데서 풀리게 된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치 않다. 회개한 사람은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감정에 억눌릴 수 있고 또 자기 실패의 쓰라림을 깨닫기는 하나 유다 모양으로 가서 자살할찌 모른다. 혹은 자살은 아니하여도 더 큰 타락생활로 뛰어들찌도 모른다. 참된 회개는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앞세우는 것인데 이 회개는 탕자가 자기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듯이 『자기의 발자취를 다시 더듬어』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빨리족은 말하기를 회개는 『새 마음을 입는 것』이요, 돌아옴은 『새 행위를 입는 것』이라 한다. 이 입는다는 말은 바울이 로마 13:14에서 말한 『그리스도로 옷입고』와 에베소 4:24에서 말한 『새 사람을 입으라』를 기억나게 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빨리족은 『새 마음』은 『새 행위』보다 먼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치어진 행위는 비틀어진 마음을 다시 올곧게 만들어 줄 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회개한 마음만이 회개한 행동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수단의 엔곡 띵카족은 말하기를 회개는 『마음을 돌리는 것』이요, 돌아옴은 『몸을 돌리는 것』이라 한다. 이것은 분명한 말이 아닌가? 앵골라의 루베일족은 말하기를 회개는 『슬퍼하고 돌아오는 것』이요, 돌아옴은 『돌아오는 것』이라 한다. 싼 뿔라스 홍인종은 말하기를 회개는 『마음에 슬퍼한다』요, 돌아옴은 『마음을 변한다』라 한다. 이 모든 말은 근본적으로 다 같은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영혼이 하나님의 변화시키시는 능력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하여 회개는 돌아옴이 앞서야 하는 것이다.
코놉족은 이 회개와 돌아옴의 과정을 이렇게 말한다. 첫째 『마음에 생각하고』둘째 『털벗고 변한다』나비가 그 볼상없는 고치를 깨뜨리고 새 생물이 되듯이 영혼은 그 전체 용모를 변하고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용모를 가지는 것이다. 이런 변화가 생기려면 궁리하고 설계할줄 아는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 통찰(通察)하고 반성(反省)할줄 아는 영혼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이것이 생의 변화를 위한 조건이다.
회개에 따라오는 정신적 고통은 꽈테말라의 켁치 홍인종이 잘 표현하였는데 그들은 말하기를 회개는 『마음에 생긴 고통』이라 한다. 아이보리해안 빠울리족은 솔직히 말하기를 『사람으로(죄를) 끊게 하기가 아프다』라 한다. 이것은 어떤 변화에든지 먼저 있어야할 조건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더럽게 죄많은 성질을 얼버무려 넘기거나 보기좋게 꾸며주려고 하지 아니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려 하신다. 다시 말하면 주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거듭남을 주려 하신다. 남부 멕시코의 촐족이 말하듯 『우리는 우리 죄를 떠나야』곧 회개하여야 거듭남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회개는 실패에 대한 정신적 관심만은 아니다. 성경의 회개는 희랍어 『메타노이아』가 의미하는 『변화된 생각』곧 새 마음을 가지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티모르족은 말하기를 회개는 『마음을 뒤집어 엎는 것』이라 한다.
회개는 죄지은 까닭에 떠나오게 된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중부 멕시코 파메족이 잘 표현했으니 그들은 말하기를 회개는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라 한다. 첼탈족은 더 분명하게 『죄 때문에 떠났던 마음을 돌아오게 한다』고 한다. 이 돌아오는 것은 잃어버린 기회에 대하여 맥없는 소원을 하는 것이 아니요,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그 마음이다. 회개를 돌아옴과 분간하기 위하여 첼탈족은 돌아옴을 가리켜 말하기를 『마음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라 한다. 회개의 근본 관심은 죄요, 돌아옴의 근본 관심은 하나님이다.
돌아옴은 회개 후에 오는 것이라고 말하였지만 죄를 확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변화시키시는 능력에 대한 의식과 관계가 없는 경험이라고 생각하여서는 아니 될것이다. 사실상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은 죄의식이 아니요,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며 이것이 사람을 인도하여 죄를 충분히 인정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보시듯 우리도 죄를 볼줄 모르면, 다시 말하여 죄는 하나님을 항거하는 것이라고 볼줄 모르면 죄라는 것은 불행한 과오(過誤)에 지나지 못한다.
구속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오게 된 구속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에게로 오도록 터 놓으신 길이다. 이 길로 말미암아 돌아옴의 경험이 하나님의 신의 역사에 의지하여 영혼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돌아옴은 우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뵈는 것인것처럼 구속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마련하여 주신 것이다. 구속은 『속(贖)』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사는 것』이다. 불란서영 끼니아의 깃시족은 속죄를 『사서 물른다』라고 한다. 어느 대상물의 소유권이 뺏김을 당하거나 잃어버림을 당할찌 모르나 근본 소유주는 그 소유물을 사서 물름으로 그것을 속할 수 있다. 그와 같이 우리를 자기와 같이 만드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셔서 자기를 받아들이거나 배척하게 두셨다. 반역적인 인류와 화목하기 위하시어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로 우리를 대신하여 죽게 하심으로 자기의 구속적 사랑을 뵈셨다. 『사서 물른다』라는 생각을 더 분명히 뵌 방언이 있다. 인도 차이나의 뿔랙 타이족은 말하기를 구속자는 『와서 찾고 사(買)신 주』라고 한다. 오셔서 우리를 찾으시고 자기를 위하여 우리를 사(買)신 그가 우리 주(主)시다. 『사람을 찾는 것』은 자기 종을 하나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사려고 와서 찾는이는 자기 영혼의 목자에게서 떠나 자기 죄악 중에서 산골짜기로 헤매는 양을 진실되어 찾는 이시다. 싼 뿔라스 홍인종은 구속을 더 신령한 뜻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말하기를 구속은 『정신을 도로 찾는 것 (탈환-奪還)』이라고 한다. 죄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반역한 사람이니 하나님께서 그를 도로 찾으셔야 할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자기가 자신을 멸망케 할 것이다. 그의 정신은 하나님께 포로되어야 할것이다. 슬픈 일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찾지 못하실 곳이 우주에 있는듯이 여기고 하나님을 몰래 피하려 하고 이렇게 하는데서 큰 기쁨을 얻는듯 느끼는 것이다. 그들은 생을 순전히 그들의 사사로운 일로 여기고 교회로 말미암아 깨닫게 된 하나님의 요구를 반대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악의 비밀을 부질없이 간섭한다고 목사를 원망한다. 이런 영혼들은 속함을 받아야 할것이며 도로 찾음을 입어야 할 것이다.
구원
구원은 구속(속죄)의 객관적 사실의 주관적 실재다. 쉬피보족은 말하기를 구원은 『살게 하는 것』이라 한다. 죄의 값이 사망이라 하면 구원은 생명이다. 죽어 영생할 생명일뿐 아니라 영원한 품질을 가지고 지금부터 시작되는 생명이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 5:24)
싼 뿔라스 홍인종은 구원의 신학적 방면을 더 분명히 표현하였으니 그들은 말하기를 구원은 『나쁜 행실을 없이할 도움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이 도움은 아무런 것이 아니라 죄 지은 영혼을 돕는 도움이다. 수단의 엔곡 띵카족도 구원을 도움이라고 하나 그들은 말하기를 『자기 영혼에게 오는 도움』이라고 한다.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자기 숨에게』). 이와 같이 구원은 『영혼의 도움』이다.
카바 라카족은 구주를 가리켜 『우리를 그 손으로 붙드시는이』라고 한다. 이 말은 영적으로 참되다. 예수께서는 세상에서 사업하시는 동안 언제든지 사람들의 개인적이요, 사사로운 요구를 들어주실 시간을 내시기를 아까워 아니하였는데 지금도 『우리를 그 손으로 붙드시고』삼위일체이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리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신다.
구원은 도피(逃避)가 아니다. 영혼은 도피주의자의 신학으로 만족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현실에서 도피할 것을 권고하지 아니하시고 생을 위한 힘을 주신다. 나갈 길이 아니라 올라갈 길이다. 두던하시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되시는 것이다.
화목
화목은 하나님께서 구속과 구원의 큰 역사(役事)에 대하여 가지신 관계를 설명한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린도후 5:19)하고 선언한 복음이다. 화목은 사람의 반역과 하나님의 솔선용서(率先容恕)를 의미하는데 이것이 기독교 메세지를 다른 모든 종교와 다르게 하는 것이다. 기독교만이 죄의 문제를 엄숙히 취급하고 대상에 대한 부조정(不調整)을 죄라고 보지않고 하나님께 대한 반항으로 본다. 기독교만이 하나님은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는 데 솔선하시는 하나님으로 뵈었다.
알라스카 빠로에 사는 에스키모족은 화목을 『친구가 다시 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친구가 다시 되게 하신다』이다. 수단에 우덕족은 이 같은 진리를 저으기 재미난 말로 표현하였으니 『만나서 손가락을 다시 맞댄다』라고 한다. 이 말은 그들의 풍속에서 온것이니 그들은 만나서 악수하는 대신에 엄지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어 찰깍 맞대는 풍속이 있다. 친구들만이 이렇게 하는 것이다. 서로 틀린 사람들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구원받기 전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로 하나님과 손가락을 맞대기를 싫어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려고 오시고 에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을 자기와 교통할 수 있게 하셨다. 사람과 하나님은 만나서 손가락을 다시 맞대게 된 것이다.
인도 차이나의 뿔랙 타이족은 매우 다른 형용사를 썼다. 그들은 말하기를 화목은 『모서리를 문질러 없애는 것』이라 한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모서리를 문질러 없애므로 두 물건이 서로 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를 변형시키고 자기 인격에 생긴 흉한 혹 같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과 교통하는데 합당치 못한 존재로 되었다. 죄악의 모서리를 문질러 없애야 하나님과 화목케 될수 있고 또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합당하게 될수 있는 것이다.
사함(赦=용서-容恕)
사(용서)는 화목의 영적매개물이다. 사람을 그 창조주로부터 막아놓은 장벽은 죄다. 그런데 이 죄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죽음으로 나타내신 사하심에 의지하여 무너지게 되었다. 그러나 공로 없이 받는 이 사하심을 표현할 정당한 말을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쉬피보족의 본토인 조역자는 『보지않고 넘겨버린다』라는 말로 사함의 뜻을 나타내려 하였으나 이 말은 우연히 보지않고 넘겨버린 뜻이 더 많다. 『생각지 아니한다』라는 말을 또 제시하였는데 이 말에는 『기피(忌避)』라는 뜻이 있다. 또 다른 말을 제시하였는데 그 말은 『빚을 탐감한다』는 뜻으로 『사함』의 영적중요성을 원만히 나타내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문질러 없앤다』혹 『지워버린다』라는 말이 제시되었다. 이 말은 죄의 존재를 인정할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식적으로 죄를 씻어 주셔서 더 존재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도 있다.
싼 뿔라스족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들은 말하기를 사함은 『악한 마음을 지워버리는 것』이라 한다. 하나님께서 사하려고 하시는 것은 죄의 행동뿐 아니라 마음을 물고 늘어져 있는 범죄의식도 포함하신다. 『악한 마음을 지워버리는 것』은 이 범죄의식을 제거하고 사하는 방법이다.
컬럼비아 북쪽에서 멕시코만으로 뻗어나간 갈래진 땅에 사는 꼬아지로 홍인종은 말하기를 『사함』은 『죄를 지나가게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죄는 지나가고 다시 더 머물르지 아니한다. 아이보리해안의 빠울리족은 거의 같은 말을 가졌는데 그들은 말하기를 『죄로 떠나가게 하는 것』이라 한다. 멕시코의 후이촐족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를 취해가시는 것』이라 한다.
리버리아의 케펠족은 말하기를 사함은 『죄에서 돌아서는 것이라』 한다. 이 말은 사람이 죄를 멸시하고 배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있는 죄를 비난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혹 생각할찌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하시는 행동에서 우리 죄를 주의하지 아니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등을 죄에서 돌이키시는 것이다. 빠로의 에스키모족은 말하기를 사함은 『지금으로부터는 무시해버리는 것』이라 한다. 이 말은 죄를 일부러 용서하는 사람은 죄를 어름어름 해 버리려고 하거나 다른 명칭으로 부르려고 하지 아니하고 죄를 말쩡히 무시해버리려고 작정하는 것이다.
사함에 대한 어떤 표현법은 우리가 그 말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혼란을 일으키기 쉽다. 예를 들면 나바죠족은 사함을 『사람의 죄를 그에게 돌아가게 하는 것』이라 한다. 이 말은 죄를 더하여 주는것 같은듯 하다. 그러나 나바죠는 그렇게 생각지 아니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죄를 범하였으면 그 상대자는 그 범죄자의 영혼을 지배할 힘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 상대자가 『그 죄를 범죄자에게 돌려보내면』모든 것은 죄 짓기 전과 마찬가지로 복구되어 범죄자는 무죄자로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하심의 오묘한 이치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으로 하여금 자기와 교통하게 허락하시는 것이다.
어떤 방언에는 용서를 용서자의 성격으로 표현한다. 남부 멕시코 산중에 있는 적은 부족 추릭족은 말하기를 용서는 『큰 마음을 가지는 것』이라 한다. 더 남쪽에 사는 첼탈족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그 마음 속에서 해방하신다』라고 한다. 『그는 우리 죄를 그 마음에서 해방하실』만큼 그의 마음은 크시고 그의 사랑의 범위는 한정이 없으시다.
은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하심의 오묘한 이치를 설명한다. 서부 아프리카의 킷시족과 풋타 풀라족은 말하기를 은혜는 『선함』이라 한다. 선(善)함만이 하나님을 움직여 그 은혜를 우리에게 부으시게 할수 있는 것이다. 『동남부 아프리카의 쓰와족은 은혜를 호의를 가지고 본다』라 한다. 싼 뿔라스족은 『하나님께서 우리 이익을 위하여 생각하신다』라고 한다. 이 말은 사람에게 근본적 선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 말은 사람들의 실제 형편이 어떠하든 그들이 선한것처럼 여기시고 보신다는 뜻이다. 은혜는 죄의 겉껍데기 밑에 있는 죄를 깊이 뉘우치는 마음을 보시는 그 태도다.
어떤 경우에는 은혜는 근본적으로 호의를 베푸는 행동의 결과다. 은혜의 이 방면을 빠로 에스키모족이 표현하여 말하기를 『어엿비 여기심에서 오는 도움』이라고 한다.
멕시코만을 향하고 있는 산맥의 동쪽 비탈에 살고 있는 토토낵족은 은혜는 은혜를 받는 사람의 반응이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감사심을 일으켜야 할 것』이라는 것 같은 말을 썼다. 우리는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지않다. 우리가 아무 공로 없이 받게 된 이런 자비에 우리는 마땅히 감사하여야 할것이다.
전 구속적과정(拘束的過程)에 다 퍼져있는 은헤가 여러가지 입장에서 설명되었다. 어떤 사람은 은혜를 『하나님의 선하심』이라고 설명하고 어떤 사람은 『호의를 가지고 보는것』이라고 설명하고 또 어떤 사람은 받은 은전(恩典) 곧 『어엿비 여기심에서 오는 도움』이라고 설명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은혜는 『고마워하는 마음의 반응』이라고 설명한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은혜를 여러가지로 번역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은혜는 볼수 있고 다룰수 있고 잴수 있고 해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은혜는 하늘을 가득이 채우고 땅에 자비가 되어 내려오는 영적향기다.
의(義)
의는 영원한 표준에 부합되어야 하는 까닭에 하나님의 경륜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의로운 사람은 착한 것만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정하신 법을 따라야하기도 할것이다. 착하다 하는 것은 흔히 순전한 주관적언사로 규정하는 까닭에 착함은 변하는 성질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의롭다 하는 것은 신성적(神性的)이요, 비인간적 표준으로 헤아리게 된다. 쉬피보족은 말하기를 의인은 『같게 행하는 사람』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아는바 의(義)에 일치하게 행하는 사람이라 한다. 표준에 부합한다는 것을 『정직의 본질이라』고 여러 방언에서 표현하였다. 카바 라카어로 의인은 『곧고 곧다』이다. 이렇게 곧고 곧다 라고 말하여 그 곧음을 강조하였다. 싸카포악스틀라 아쓰텍족은 말하기를 의인은 『곧은 마음』을 가졌다 한다. 남부 멕시코에 사는 촐족은 말하기를 의인은 그 사람 자신이 『곧다』라고 한다.
의는 행위만은 아니다. 사람이 행하여야 할 의가 있으니 이를 도덕적 의라 하고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의가 있으니 이를 맡기운 혹은 수여(授與)된 의라 한다. 수여된 의를 『의의 선물』(로마 5:17)이라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지금 어떠하다는 것을 보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어떻게 될수 있다는 것을 보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선포된 의다. 빠로의 에스키모족은 말하기를 이 의는 『죄가 제거된 것』이라 한다. 이 말은 사람이 완전케 되어 죄를 또 짓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요, 사람을 죄없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죄 많은 인류가 가질 수 있는 한가지 의니 곧 이것도 은혜의 선물인 까닭이다.
인의(認義=의롭다 하심)
우리는 『인의』『성결』과 같은 말들을 피하려고 한다. 이런 말들은 우리 생각 밖에 있는것 같고 올라갈 수 없이 높은 곳에 세워진 신학적산성 같이 보인다. 이런 말들은 기독교신앙의 실제적이요 근본적인 경험을 설명하기에는 좀 거북한듯 하다고 본다. 그러나 슬픈 일은 어떤 진리를 설명하기가 귀찮거나 붙잡기가 어렵거나 하다고 그 진리를 치지도외하는 일이다.
의롭다 하심(인의)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바르게 혹은 의롭게 만드시는 방법이다. 싸카포악스틀라 아쓰텍족은 말하기를 인의는 『마음을 곧게 펴는 것』이라 한다. 코놉족은 말하기를 이는 『곧게 편 영혼을 가지는 것』이라 한다. 멕시코 버라크루쓰주에 사는 포풀루카스족은 말하기를 인의는 『곧게 걷는 것』이라 한다. 이 모든 말은 인의의 결과로 오는 형편을 설명하려 한것들이다. 인의가 되는 방법 자체는 설명하기 어려운듯 하나 멕시코의 타라스칸 홍인종이 사용하는 말이 이것을 어느 정도 설명하였다. 이런 경우를 생각하여 볼것이다. 타라스칸족의 아버지 한 사람이 있어 그 아들을 매우 사랑하고 그 아들의 뚜렷한 품격을 찬탄한다. 그런데 그 아들은 나쁜 소문이 있는 사람을 친구로 삼고 있다. 그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사랑 때문에 그 아들의 그 친구라도 환영한다. 아들의 이름으로 그 친구를 받아들이는 이 태도를 표현하기 위하여 타라스칸족은 이렇게 말한다-『그는 자기 아들의 선함을 가지고 그를 본다』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게 된 구속에 대한 복음을 설명할 때에 타스칸 전도인은 지적하기를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칭찬할 것이 없고 그리스도 밖에 없으니 그는 죄인의 친구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기 때문에 『우리를 그 아들의 선하심으로 보시는』하나님께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접함을 받았다. 인의는 의 자체가 의로와서가 아니라 진실되이 회개하는 마음 까닭에 자비의 정당한 대상이 되어서 영접을 받는 방법이다.
『인의』교리를 비웃고 이 교리를 신학자의 두려워하는 양심이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와 정반대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생활 안에 계시된 은혜의 오묘한 진리다. 이것은 복음의 중심이다. 인의가 없이는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공로로 말미암은 것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않으셨다. 우리를 택하신이는 하나님이다. 이 진리를 루안다 우룬디의 런디족은 말하기를 『사람을 죄 없다고 선언하신다』라고 하고 퀘츄아의 후아누코족은 『우리를 죄 없는듯이 붙드신다』고 말한다.
이런 종류의 교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영적교만과 나는 너보다 거룩하다는 완고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고 어떤 사람들은 염려한다. 그러나 우리처럼 죄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은혜로 우리를 자기와 교통하게 하도록 하나님은 거룩하신데 이 거룩하심에 대한 분명한 생각이 있어야만 사람은 자기의 무가치함을 완전히 자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기 공로로 구원을 얻는 사람은 뽐내게 된다. 그러나 은사로 하여 구원을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의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을 하여야 된다는 감정을 가지게 된다.
성도(聖徒)
보통 돌아다니는 생각으로 보면 성인은 팔짱끼고 경건한 얼굴을 가지고 자기의 받을 상급을 남이 받을 상급보다 낫다고 주장하는데서 상쾌함을 느끼며 장래에 받을 상에 대한 망상(妄想) 때문에 현세의 쾌락을 버리고 마침내는 멋없는 성격을 이루어 이 세상을 위하여서는 쓸데없고 오는 세상을 위하여서는 의심스럽게 되는 사람이라고 보통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거룩함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서 온 결과다. 거룩함은 잘못이 없다는 것보다는 선이 있다는 그것이다. 참된 거룩함은 세상에서 도피하려고 아니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능력과 통치 밑에 두려고 하는 것이다.
어떤 방언으로는 성도를 『하나님의 자녀』라고만 한다. 이것은 희랍어 『하기오스』의 뜻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말은 아니다. 하기오스는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특별히 구별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구별한 사람들인데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바리새인적 의미에서가 아니요 거룩하여지기 위하여 분리되었다는 의미에서다. 싸카포악스틀라 아쓰텍족은 말하기를 성도는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하고 엔곡 띵카족은 말하기를 『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한다. 코놉족은 성도의 생활에 특색이 되는 행동 하나로 표현하였으니 곧 『기도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중국 어떤 지방어로는 성도를 『거룩한 종자(從者)』라고 한다. 속됨과 거룩함에 대하여 거짓된 구분을 하는 것을 버리고 거룩함이란 생의 모든 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바치려고 하는것이라고 하는 새로운 생각을 교회가 받아 들이게 되지 아니하면 사람들은 계속하여 『성도』라는 말에 혼란을 받게 되어 마침내는 성도라고 하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은 구속된 죄인이라는 뜻으로 깨닫지 못하게 될것이다.
거룩하게 한다
거룩하게 하는 것은 의식과 이상한 방언으로 웅얼대는 기도문을 외는 외부적 행사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생활을 새롭게 하는 데서 오는 거룩함이다. 마야족은 말하기를 성결은 『사람의 속을 깨끗케 하는 것』이라 한다. 잔의 밖은 닦고 속은 더럽게 두는 바리새인의 성결이 아니다(마태 23:25). 이것은 영혼과 마음의 거룩함이다. 싼 뿔라스 홍인종은 말하기를 성결은 『사람에게 착한 마음을 주는 것』이라 한다. 페루의 후아누코 퀘츄아족은 말하기를 성결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케 하심』이라 한다. 거룩하게 하는 과정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주의하여야 한다. 이것도 기독교 신앙의 다른 모든 영적경험과 같이 하나님께서 끌어내시는 것이다. 카바 라카족은 말하기를 성결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밖으로 자기에게 불러내시는 것』이라 한다. 이 말은 이 족속의 마술 부리는 사람의 의식(儀式)에서 나온 말이다. 마술 부리는 사람은 견습생을 만들때가 오면 자기를 따르고 자기의 비결과 능력의 전수(傳授)를 받을 청년을 심방한다. 이 청년은 무척 흥분하게 하는 의식을 행하여 그의 절정에 이를 때 불러냄을 받고 그 날부터 그는 그 선생의 지위와 권위와 지식을 전수하여 받을 계승자로하여 그 선생과 같다고 여기게 된다. 『자기에게로 불러내신다』라는 말이 생기게 된 이 풍속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불려냄을 받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된 천국의 계승자로 하여 하나님과 동일하게 된다는 것을 어느 정도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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