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말씀을 사람의 마음속 깊이 들어가게 하려면 그 마음에 알수 있는 말로 전하여야 될것이다. 이것은 기이한 비유나 알수 없는 형용어를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요, 그 말에 이미 살아 있는 풍부한 표현법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선교사 번역자들은 이런 표현법을 많이 발견하여 그것으로 신령적 은사를 잘 나타낼수 있었다.
신앙 혹 믿음
이 말처럼 영혼과 정신을 깊이 움직이게 하는 말은 없다. 신앙의 깊은 개인적 경험을 나타내려고 여러 방언에서 여러가지 말 혹은 글귀를 만들어 영혼과 신앙의 대상과의 친밀한 관계를 뵈려 하였다. 불란서영 적도 아프리카의 우방기지방 삼림지대에 사는 카레족은 『신앙』을 『듣고 영혼에 받아들이는것』이라고 한다. 단순히 듣는 것으로만은 부족하다. 귀머거리의 귀와 배척하는 마음으로 들을 수도 있는 것이다. 카레족은 생각하기를 신앙의 본질은 진리를 외움으로만 아니라 영혼으로도 받아 들이는 것이라 하였다. 그 이웃 족속인 카바 라카족도 같은 생각을 가졌는데 약간 다르게 표현하였다. 그들은 말하기를 신앙은 『그 속에 듣고 나가지 못하게 하는것』이라 한다. 중요한 것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것이요, 또 듣고 나가지 않게 꽉 잡는 것이다. 이 받아들이고 꽉 잡는 일을 서부 아프리카의 한 방언으로는 『말을 취하여 먹어버린다.』라고 표현한다. 이렇게 진리를 소화하여 우리 몸과 살이 되게 하는 것은 성경의 교훈이다.
유카탄반도 끝 남부 멕시코와 꽈테말라의 밀림지대(密林地帶)에 흩어져 사는 몇백명의 라캔던 홍인종 부족은 말하기를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 마음에 들어가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이 부족의 말에는 신앙을 갖는데 인간이 그 책임을 회피하지 못한다는 뜻이 있음을 주의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향하여 그 마음을 열어놓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억지로 오시지 아니하시는 까닭이다』하고 우리는 말한다. 라캔던족은 사역동사형(使役動詞形)을 씀으로 신앙의 승리를 얻기 위하여 사람이 행할 역할을 뵈었다. 에디오피아 국경에 우덕족은 근본적으로 라캔던족과 같은 진리를 표현하였으나 조금 다른 말로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몸에 결합시키는 것 』이라고 한다. 이것은 사신 실재(實在)에 두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다 된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몸에 결합시킴으로 곧 신앙과 행동을 통일하게 함으로 참된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꽈테말라의 북부 국경 높은 산중에 사는 코놉 홍인종은 말하기를 신앙은 『진리가 그 영혼에 들어간 것』이라 한다. 이것도 같은 기본 진리를 가리키는 것이니 곧 신앙은 마음과 영혼을 붙잡는 것이라는 것이다. 신앙은 마음의 공식화(公式化)거나 의식적 교리에대한 형식적 동의가 아니라 내부 자아의 경험이다.
서부 아프리카의 많은 방언도 그 표현형식은 달르지만 같은 진리를 보이고 있다. 불란서영 서부 아프리카 우가두구에 사는 맛시족은 말하기를 신앙은 『하나님께 기대는 것』이라 한다. 이것은 믿음, 신뢰, 의지를 한 구절에 다 포함시킨 것이다. 이것은 반들반들한 신자들이 등한히 여기는 진리다. 사람들이 신앙은 하나님께 기대는 것이라는 진리를 비뚜루 만들고 사람이 만든 교리중 하나로 하여 실체화(實體化)시킨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종교재판이라는 것 같은 것을 두어 언어우상 앞에 절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일을 쉽게 행한 것은 교회역사상 불행한 사실이다. 신앙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항상 계속하여 의지한다는 뜻으로부터 이혼시키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그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학설의 우상화한 것을 동의하는 것으로 만들기는 쉬운 일이었다.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고백은 우리가 사신 그리스도께 의지한다는 것을 무시하여서는 아니된다. 맛시족의 이웃 족속은 말하기를 신앙은 『자기를 붙잡히게 내맡기는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은 어머니가 다른 할 일이 있어서 그 아기를 다른 사람의 팔에 부드러이 내맡긴다는 말과 같다. 이것도 역시 아무 의심없이 의지하는 행동이다.
멕시코 사카포악스틀라 지방에서 통하는 아스텍족의 말로는 신앙을 『뒤를 바짝 따라가는 것』이라 한다. 이 말은 남긴 발자국을 따라간다는 데서 온 말이다. 한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그의 뒤를 바짝 좇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우리를 잘 인도해 줄수 있고 우리가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면 우리는 안전하게 되리라는 신뢰심이 신앙이다. 신앙은 사거나 모아둘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신앙은 행동이다. 『그의 뒤를 바짝 따르는 것』은 우리와 그 사이에 정당한 관계를 강력하게 나타낸 말이다.
파나마의 밸리엔테 홍인종은 신앙을 좀 이상하게 표현하였다. 그들은 말하기를 신앙은 『마음에 하나님을 잡는 것』이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잡는다고 하여야 옳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찌 모르나 이 밸리엔테족의 말에는 중요한 진리가 있다. 이 말은 삼림에서 짐승 사냥하던 경험에서 온 말이다. 짐승 사냥하는데 짐승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고 그 놈의 다니는 길을 찾아내고 마지막에 잡는다-곧 자기 소유로 만든다. 이것이 신앙의 경험이다. 주의깊게 관찰하고 지켜보기도 하다가 우리는 마지막으로 신앙의 실재를 꽉 잡는다. 그러면 그것이 우리 소유가 된다. 밸리엔테족은 하나님을 사냥하여 내려는 족속이라고 생각할 것은 아니다. 그들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잡는다는 것뿐이다.
페루국에 있는 쉬피보홍인종은 말하기를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 강하다』라고 한다. 이 뜻은 『우리는 하나님 없이 힘이 있을수 없다』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만 강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영적으로 강할 수 없다. 쉬피보족은 영적 힘은 완전히 하나님께로서 오는 힘으로 안다. 쉬피보 말에 힘은 하나님께 의지하는 데서 온다고 한 까닭에 자기 개인적 능력에 대하여 영적 교만을 가질 틈서리라도 주지 않는 말이다.
쉬피보족이 사는 지방의 남쪽에 사는 피로 홍인종이 사용하는 믿음이라는 말을 직역하면 『복종하여 믿는 것』이 된다. 그들은 『믿는다』라는 동사만으로는 하나님 안에 믿음을 나타내기에 너머 약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믿음은 무엇이 되었는지, 혹 되지 아니하였는지를 인정하는 것에 불과한 까닭이다. 이런 종류의 지력적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표현하는데는 불충분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주께 대한 어떤 사실들을 지력적으로 찬동(贊同)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의 완전한 복종을 명하시는 주와 교통하기 위하여 우리 마음을 열어 놓는 것도 된다. 그래서 피로족은 『복종하여 믿는다』라는 말로 신앙과 행동의 결합을 나타내려 하였다. 곧 믿고 복종함이 없이는 기독교경험의 실재(實在)와 복음의 진리가 없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티몰족은 신앙의 또 다른 방면을 드러냈다. 그들은 말하기를 신앙은 『마음에 순응하는 것』이다. 이 말은 신앙을 다른 말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설명하였다. 이 말은 진리의 인정뿐 아니라, 그 진리의 요구에 응종한 마음에 순응하는 것도 가리키는 것이다. 순응이 없고는 참 신앙이 있을 수 없으니 이는 신앙의 기독교적 관념이다. 그리고 이 순응은 순전히 외부적 행동에 관계되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에 관계되는 것도 된다. 마음이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지 행동이 마음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중부 멕시코 서부 경사지에 사는 후이촐 홍인종은 신앙을 그 주관적방면(主觀的方面)에서 보다 그 객관적방면(客觀的方面)에서 보았다. 그들은 말하기를 믿는 것은 『진리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은 티몰족의 표현과 그리 큰 차이가 없다. 실상 신앙의 진리는 이 두 사상을 결합시키는 데 있으니 『마음으로 진리에 순응하는 것』이다. 서부 아프리카 리버리아 내부에 사는 로마족은 신앙에 대하여 또 다른 뜻을 나타냈다. 『복음에 신앙을 가진다』를 직역하여 『복음에 손을 얹는다』라고 한다. 이 번역은 로마족의 습관에서 온 번역이다. 그들은 자신을 어떤 대상이나 행동과 부합시키려 할 때에는 거기 손을 얹는 풍속이 있다. 곧 이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요 나라고 모든 사람에게 증거하는 것이다. 참된 신앙은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스스로 나타나는 것이니 사람이 자기 신앙의 대상에 자기 몸을 부합시킬 때에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 十장十절에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의 참 뜻이다.
신뢰
『신뢰』는 『신앙』과 뗄수 없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 유카탄의 메얀 홍인종은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는 것』을 『하나님께 자신을 둔다』로 번역한다. 신뢰는 약간 자포자기적 상태에서 목적 없는 소망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더 참되고 확실한 대상에 자신을 위탁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도 하고 신뢰하기를 싫어하기도 한다. 파나마의 싼뿔라스 홍인종은 이 상태를 매우 솔직히 나타냈다. 그들은 말하기를 사람이 『의심을 그 속에 가졌다』고 한다. 우리는 어떤 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면서 이것은 영혼의 진공경험이라고 말하여 얼버무려 넘기고 말려한다. 싼 뿔라스족의 말로는 이런 얼버무리는 일을 할수 없다. 신뢰 부족은 신뢰의 결핍이 아니라 의심의 존재다. 신령적생활은 적극적 요소로 되었고,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된 것은 아니다. 믿음으로 살지 아니하는 사람은 의심 속에서 사는 사람이다.
의심
많은 사람은 『의심』을 몽롱한 불확실성이거나 일종의 무의미한 염려거나 생각이 그 자리를 잡을 수 없는 마음의 불안한 상태거나로 생각한다. 어떤 방언에는 의심이 더 적극적으로 표현되었다. 페루 앤디스산맥 동쪽에 사는 후아누코 퀘추아족은 의심을 『두 생각을 가진 것』이라 말한다. 더 먼 동쪽에 사는 쉬피보족은 『두 가지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하여 후아누코 퀘추아족과 거의 같은 뜻의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의심은 여러가지 선택가능성을 뵐는지 모르나 본질적으로 쉑스피어가 말한 『있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있지 않거나』와 같은 영원한 균분법(均分法)이다. 의심은 『그렇거나 그렇지 않거나』『한편이거나 적대(敵對)거나』『이것이나 저것』을 선택하는 따위를 의미한다.
꽈테말라 알타 베라파스주에서 사용되는 켁치어에는 이 서로 충돌되는 상태를 『마음이 둘로 되었다』라고 한다. 의심은 인격을 분열(分裂)하여 적극적 활동을 못하게 한다. 미성숙(未成熟)한 많은 기독교인들 중에서 볼 수 있는 정신적 이원성(精神的二元性)의 충돌은 이런 의심에서 나는 것이다. 미국 서남방에 있는 나바조 홍인종은 의심을 『둘이 된 것이 그에게 있다』라고 한다.
의심을 다르게도 설명할 수 있다. 의심은 단순한 선택가능성을 영적순례자에게 항상 내놓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길을 여행할 때에 여러 길이 갈라져 나간 어림에 당도하여 그 여러 길이 다같이 마음을 끄는 방향으로 뻗어 나간 것을 보게 된다. 그 결과 우리는 혼란을 일으키고 전에 가졌던 우리 경험과 깊인도법을 의심하게 된다. 혹은 우리가 갈 길이 앞에 없는 것을 발견케도 된다. 우리는 막다른 골목에 다달은듯싶게 된다. 그리고 우리 믿음은 사라져 버린다. 이런 종류의 의심을 서부 아프리카 아이보리 코스트에 사는 빠울리족은 말하기를 『내 생각이 거기 있지않다』라고 한다. 사람의 생각이 어디든지 있으면 자신이 생기나 그렇지 아니하면 의심이 생긴다. 페루의 피로족은 의심을 『굳은 마음을 가진 것』이라고 한다. 뚫을 수 없이 단단한 마음은 믿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굳은 도전적상태(挑戰的狀態)는 의심으로밖에 인도할 곳이 없다 신앙은 감수성(感受性)을 의미하고 의심은 자기 만족에 쌓인 방약무인한 영혼의 상아탑(象牙塔)이다.
근심
석양 그림자가 밤을 맞아오듯 의심은 근심을 맞아온다. 본서 16페이지에서 설명한것처럼 나바조 홍인종이 근심을 『내 마음이 나를 죽이고 있다』한 것은 옳은 표현이다. 페루의 피로족은 근심하는 사람을 『맹렬히 쫓기는 사람』이라 한것은 나바조족의 말과 거의 같은 뜻이다. 근심하는 사람은 삼림 속에서 사냥군을 피하려고 쫓기는 짐승 같다. 미래라는 헤아릴 수 없는 밀림(密林), 약해가는 힘, 의심의 가뭄-이 모든 것이 영혼에게 압축해온다. 그래서 마음은 현기증이 나게 되었다. 남부 멕시코 산중에 사는 첼탈 홍인종은 이 상태를 『그 마음이 떠났다』라고 표현하였다. 많은 경우에 걱정은 자기중심이 된 영혼의 신령적 죄로 볼수 있으나 누구든지 귀중한 무엇, 자기 자신의 마음까지라도 잃음이 없이 자기 중심에 잠길 수는 없다. 근심의 중심은 자아(自我)니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으리라』(마태 16:25) 하신 말씀과 같다.
확신
확신은 근심의 해독제(解毒劑)다. 그러나 확신은 희망적 생각에서 오는 것은 아니요 아는 데서 오는 것이다. 나바조족은 생각하기를 『끝까지 뒤쫓아감』으로 확신이 생긴다고 한다. 만일 말 한 마리가 덤부사리로 연이은 작은 내를 따라 없어졌으면 그 말이 어디로 갔는지 아는 오직 한가지 방법은 그 말을 찾을 때까지 그 발굽자국을 밟아 뒤쫓아 가는 것이다.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은 가능한 진리에 대하여 게으르게 사색(思索)함으로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확신의 대상을 만들려는 그것을 잡으려고 끝까지 뒤쫓아 감으로 가지게 되는 것이다. 확신은 맹목적복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요, 능동적(能動的) 조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사랑
신앙 없이 생활이 없는 것처럼 사랑 없이 복음이 있을 수 없다. 신앙의 생활은 사랑에서 나온 갈바리의 화해로 되는 것뿐 아니라 사랑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사랑은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만 아니라 그를 위하는 우리의 사랑도 포함한다. 그를 위하는 우리의 사랑이야말로 모든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초요 우리의 최고 영적 기쁨이다. 신앙을 나타내는 말들보다 사랑을 나타내는 말들이 더 많은데 이 말들은 다 내부 주관적 의식을 반영(反映)한다.
불란서영지 서부아프리카 사하라 변두리에 사는 하베족은 『하나님을 위한 사랑』을 『하나님을 우리 마음에 둔 뫼신)다』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전부 사람의 마음 속에 넣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하신이가 자기 성신으로 사람의 마음속에 계실 수 있다는 뜻이다. 영혼을 깨우쳐 『하나님을 마음속에 두게』하는 것은 사랑만이 하는 것이다.
멕시코 오악사카 산중에 있는 싸포텍 홍인종은 하베족의 말과 반대되는 말로 사랑을 표현하였다. 하나님을 사람의 마음 속에 둔다고 말하는 대신에 『내 마음이 하나님과 함께 나갔다』라고 한다. 하베족이나 싸포텍족이 다 옳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사신다는 데도 뜻이 있고 우리 마음이 우리 것이 아니되었다라는 데도 뜻이 있다. 우리 마음은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사랑의 대상은 땅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 우리는 거기서 더 풍성한 교제를 하게 되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우덕족은 사랑에 대하여 더 피상적(皮相的)인 생각을 가진듯하니 그들은 말하기를 사랑은 『눈에 좋다』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 통찰력이나 능력을 단순히 쓰이는 말만 기초로 하여 판단할 것은 아니다. 그럴뿐 아니라 이 말에는 바른 뜻이 있다. 실상은 하나님과 기독교인 사회의 사랑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된 희랍어 『아가페』도 근본 뜻에는 『무엇의 귀함과 가치를 알아준다』는 것이 있다. 아가페는 주로 교제나 우정관계(이것은 필레오라고 한다)에서 오는 사랑이 아니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으로 다시 만드실 수 있는 가능성 외에 우리에게는 아무 귀중함이나 가치가 없다고 스스로 낮출 때에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사랑하시게 한 그 사랑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아가페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아니 들어온 남녀들에게서 성신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그 무엇을 우리로 하여금 볼수 있게 하는 그 사랑도 된다. 이것은 개인적 이해관계보다 더 높이 솟고 애정적 관계보다 더 깊이 들어가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성도들의 교제의 기초다.
사랑을 어떤 때는 강한 말로 나타내기도 한다. 동부 니카라구아와 혼쥬라의 습한 땅에 사는 미스키토족은 말하기를 『사랑은 마음의 고통이라』한다. 기쁨이 극하면 아픈것 같고 사랑도 극하면 고통스러운것 같다. 남부 멕시코 치아파스 산중에 사는 촛칠족도 미스키토족과 거의 같은 뜻의 말로 사랑을 표현하였다. 그들은 말하기를 사랑은 『마음을 상한다』라고 한다. 그래서 요한 3:16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이처럼 상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번역하였다. 죄 있는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확실히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한 감정의 고통이 아니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넓으신 마음에서 솟는 동정이다.
북부 꽈테말라의 코놉족은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갔으니 그들은 말하기를 사랑은 『내 영혼이 죽는 것』이라 한다. 만일 사랑이 그 대상과 결합하는 기쁨을 경험하는 것이 없으면 『영혼이 죽는다』는 뜻을 모르게 될것이다. 코놉어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사랑을 가리켜 『내 영혼이 하나님을 위하여 죽는다』라고 한다. 이 말은 사랑하는 사람이 느끼는 강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뿐 아니라, 참된 사랑에는 자기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진리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죽여야 할것이다. 참된 사랑은 모든 감정 중에 가장 비이기적(非利己的)인 것이다. 참 사랑은 자기를 위하여 무엇을 취해 내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하여 무엇을 내어 주는 것이다. 거짓 사랑은 소유하려고 하고 참 사랑은 남에게 소유되기를 원한다. 거짓 사랑은 무서운 질투를 가지게 되나 참 사랑은 생명을 주는 봉사를 하게 된다.
기뻐한다
『사랑』과 『기뻐한다』는 마가 1:11에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고 선언하신 말씀의 두 방면이다. 아침 햇빛이 영광스러운 해가 떠 오를 것의 희망이 되듯이 기쁨은 사랑에 뒤쫓는다. 리베리아의 냐오족은 『기뻐하노라』를 『내 마음이 네 속에서 쉬노라』라고 번역하였다. 그 근처 로마족은 『내 마음이 너와 함께 누웠노라』라고 하였다. 교제할 소망을 일으키는 자신 있는 즐거움이 여기 있는 것이다.
중부멕시코 사태난 산속에 사는 페임 홍인종은 이 감정을 좀다르게 나타냈다. 그들은 말하기를 『너는 내 마음을 끌었다』라고 한다. 이것은 불쌍히 여김을 일으켰다는 뜻이 아니라 교제와 교제로 오는 즐거움으로 끌린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피로족은 또 다른 말이 있다. 그들은 말하기를 『내 생각이 정돈되었다』한다. 부조화나 불균형이나 모순이나 혼란이나 의심과 근심으로 뒤숭숭한 것이 아니라 생각이 정돈되었으니 곧 생각이 곬을 찾고 자리를 잡아 『기쁘게 된것이다』이것은 우리가 흔히 등한하게 생각하는 영적생활의 한 방면이다. 혼란더미 속에서는 영적교제의 기초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노(怒)
『노』라는 것은 남에게 대한 것으로는 생각하나 내게 대한 것으로는 생각하지 아니한다. 어떤 방언으로는 노의 주관적 방면을 더 두드러지게 뵈었는데 이것은 우리로 보아서는 좀 이상한 느낌이 있다. 서부 아프리카의 멘데족은 노를 말할 때에 『베운 마음』이라 하고 미스 토 홍인종은 『쪼개운 마음』이라 한다. 『쪼개운 마음』은 내가 당한 불법의 결과일뿐 아니라, 내가 내 감정을 지배하게 한 적의(敵意)의 결과도 된다.
멕시코 치이파스에 촛칠족은 말하기를 『노』는 『단 (달군) 마음을 가지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정확히 나타낸 말이라고 볼수 있다. 꽈테말라 국경근처의 코놉족은 말하기를 노는 『붉은 영혼』이라 한다. 글자대로 번역하면 (『붉은 몸속』). 노한 사람의 붉은 얼굴은 노가 나오는 몸속이 붉음을 뵈는 것이다. 서부 아프리카의 맛시족은 말하기를 노한 사람은 『분?(浮腫한)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평화
소극적평화도 있고 적극적평화도 있다. 소극적평화는 전쟁이 없는 평화요, 적극적평화는 우주의 통치자요, 유지자이신 하나님을 신임하는 데서 오는 평화다. 소극적의미의 평화는 번역하기 쉬우니 『전쟁이 없다』하면 될 것이다. 적극적의미의 평화는 번역하기가 어렵다. 이 의미의 평화를 번역하려면 넓은 범위의 말을 선택하여야 된다. 그리고 그 선택한 말 하나 하나가 각각 평화의 한 특수한 방면을 나타내게 되어야 한다.
리베리아의 그비아포족은 평화를 『내 마음이 앉았다』라고 한다. 생의 불안 중에서 이리 저리 조바심하며 돌아다닐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 마음은 앉아 있게 된다. 남부 멕시코 열대 밀림 속에 사는 라칸던족은 말하기를 평화는 『내적(內的) 휴식(休息)이라』한다. 이것은 몸의 휴식이 아니라 영혼의 휴식이다. 멕시코 오악사카시 가까운 산중에 있는 사포텍 홍인종은 말하기를 평화는 『고요히 앉아있는 마음』이라 한다. 마음의 휴식으로만 충분하다고 보지않고 마음의 휴식은 고요함을 가져야 된다고 보았다.
멕시코의 쿠이카텍어로는 평화를 『고요함』이라는 말로 번역하였다. 성경 상하문(上下文)을 살펴보면 성경은 우리의 환경만이 아니라, 정신의 특색도 되는 고요함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평화를 고요함이라고 번역한 것은 불충분하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찌 모르나 우리 신자들이 이 번역의 순단한 진리를 포착할 수만 있다면 큰 유익을 얻게 될것이다. 많은 사람은 힘써서 마음의 평화 혹은 영혼의 평화를 얻으려고 하나 일상생활의 시끄러움 속에서 그 자신을 잃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게 잠시라도 고요히 있지를 못한다. 소위 문명세계라는 데서 우리가 인위적생활로 말미암아 가지게 되는 흥분을 통하여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아니하신다. 그는 고요하고 작은 소리로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그 고요하고 작은 소리를 우리의 결과 없는 생활의 애달픈 소음(騷音) 속에 빠뜨리고 있다.
밸리엔테 홍인종은 평화를 『고요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라고 한다. 설레는 마음은 불안한 마음이요, 불안한 마음은 대개가 세상을 대하여서나 하나님을 대하여 반항적이다. 꽈테말라의 켁치어로는 평화를 『고요한 선(善)』이라 하였는데 이 말은 적극적요소를 가졌다. 평화는 수동적(受動的)이 아니요, 능동적(能動的)이다. 다시 말하면 고요한 중에 능동적인 것이다.
아프리카 여러 지역에서는 평화를 일종의 서늘한 것으로 표현한다. 불령 끼니아에 푸타 풀라족은 평화를 『서늘함』이라고 말한다. 사하라사막에서 오는 더운 바람과 해안으로부터 오는 습기 낀 바람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평화를 서늘함이라고 표현한 데 수긍할 것이다. 서늘한 저녁 바람이 시들어가는 나무와 풀에게 새로운 생명을 가져오듯이 평화는 불안과 근심에 싸인 영혼에게 새로운 희망을 갖다 준다.
『쉰다』『서늘하다』로 평화는 다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멕시코에 싸카포악스틀라 아쓰텍족은 말하기를 평화는 『완전』이라고 한다. 나와 하나님 사이거나 나와 다른 사람 사이거나 나와 나 자신 사이에라도 평화가 되지 못한 사람은 완전하지 못한 사람이다. 아쓰텍족은 말하기를 이런 사람은 무엇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들은 옳다. 근심 걱정은 그 영혼이 이즈러졌고 불완전하다는 증거다. 이것은 부분적존재다. 혼주라족과 니카라구아의 미스키토족은 말하기를 평화는 『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라』한다. 평화로운 사람은 마음 하나를 가진 사람이다. 그는 그의 충성이 두갈래 졌거나 그 인격이 불완전하거나 한사람은 아니다. 평화를 의심과 대조한 것을 주의할 것이다. 의심하는 사람은 두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둘 이상 더 되는 마음을 가진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평화한 사람은 한 마음을 가졌으니 그 한 마음으로 그는 완전하여진 것이다. 『기뻐한다』(147페이지)를 『내 생각은 정돈되었다』라고 말하는 피로족은 평화를 『잘 정돈된 영혼』이라고 표현한다 『잘 정돈된 것』을 피로족은 아름다운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평화한 사람은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영혼이 이기적야심과 고귀한 박애심, 육체적쾌락과 거룩한 포부, 괴롭히는 과거기억과 광명한 장래희망등 서로 모순되는 감정의 흉칙한 혼란 속에서 불안한 생활을 살고 있으니 마음은 잘 정돈되지 아니하였다고 할것이다.
평화는 기쁨과 일가다. 이것을 아이보리 해안의 빠울리족이 평화는 『몸안에 노래』라 하고 기쁨은 『위(밥통)안에 노래』라 말함으로 잘 표현시켰다. 『몸안에 노래』는 전체에 스며드는 경험이요, 기쁨은 어느 정도 임시적인 경험이다.
인내
평화는 영혼의 바탕이요, 인내는 영혼의 움직임이다. 뿔리비아의 아이마라족은 인내를 『기다리는 마음』이라 한다.
파나마의 밸리엔테족은 인내를 더 선명하게 표현하였다. 그들은 말하기를 인내는 『그 성질을 잡아 앉치는 것』이라 한다. 인내 못하는 사람은 그 성질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데리고 도망가게 하는 사람이다. 인내는 『그 성질을 잡아앉치고 그것을 다스리는 것이다.』
마야족은 말하기를 인내는 『넘어지지 않는 힘』이라고 한다. 이 말은 인내보다 더 많은 뜻이 있는 것 같은데 마야어 번역의 중요함은 인내 못하는 것을 『넘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 중에 어떤이들은 인내 못하는 것을 정력적활동(精力的活動)이라 하여 일종의 자랑을 삼는 경향이 있으나 인내 못하는 것은 실패요, 인내하는 것은 힘인 것을 넘겨보아서는 아니 될것이다.
파나마의 싼 뿔라스 홍인종은 인내를 표현하는데 좀 이상한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말하기를 『무엇이 생기든 관계 없게 여기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살고 죽는 것에 아무 뒷생각 없는 냉담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무턱 의지하는 마음을 뵌다. 인내하는 사람은 무엇이 생길까 걱정하지 않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슬픔
슬픔은 인간 인격의 중심부를 찌른다. 서부 아프리카 맛시족은 말하기를 슬픔은 『못쓰게 된 마음』이라 한다. 그 인접한 빰바라족은 말하기를 슬픔은 『눈을 검정빛 나게 하는 것』이라 하고 기쁨은 『눈을 흰빛 나게 하는 것』이라 한다. 이 말은 슬픔과 기쁨을 뵈려고 펭끼칠한다는 것이 아니요, 검정빛과 흰빛이 슬픔과 기쁨의 감정적상태를 나타낸다는 뜻뿐이다.
격렬한 슬픔과 걱정을 불란서영 적도 아프리카 카바 라카족은 말하기를 『내 영혼이 나를 찾고 있다』라고 한다. 이 말은 카바 라카족의 신앙을 보인 것이나 그들은 믿기를 영혼은 슬픔과 울적한 기분으로 정처 없이 헤매다가 다시 본 주인을 찾는다고 한다. 이것은 그렇게 이상한 표현법이라고는 볼 수 없으나 격렬한 감정적고통은 인격을 분렬시키고 그 분렬된 부분들은 사방으로 헤뜨림을 당하는 것 같은 까닭이다. 이 분렬된 인격이 재연합하는데 실패하면 정신이상이나 죽음을 가져오게 된다.
낙심
낙심한 사람을 코놉 홍인종은 말하기를 『자기 영혼에 쑥 빠진 사람이라』한다. 낙심은 영혼에게 막다른 재앙이라는 것을 마이크로네시아의 낄버트군도에서 사용하는 낄버트어로 말하기를 『내 마음이 끝갔다』라고 한다.
위로
낙심한 사람들에게도 위로가 있다. 멕시코 타라스칸어에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서 슬픔을 취해 가신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신다』는 말이다. 이 말은 위로에 대한 단순한 표현이다. 그러나 이 말에 큰 뜻이 있다. 우리가 빌립보 二장一절을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슬픔을 마음에서 취하여 가시면…』하고 읽을 수 있게 된다면 우리의 지척거리는 걸음걸이도 더 굳세게 되어 믿음과 성신의 기쁨 안에서 자신있게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아이마라어로는 위로를 『마음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한다. 근본적으로 말하면 이것이 곧 우리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슬픔과 괴로움을 보상하여 줄 축복을 찾고 있다. 우리가 실제로 필요한 것은 『준비된 마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적 캔디를 버릇없는 아이들에게 주시지 아니할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새롭고 준비된 마음을 주실 것이다.
불쌍히 여김
불쌍히 여김은 위로의 감정적근원이다. 그러나 이것은 과장된 감상주의(感傷主義)는 아니다. 이 말은 『같이 고생한다』는 뜻이 있다. 쉴럭족의 말로 이 뜻이 아름답게 표현되었으니 그들은 말하기를 사람이 그 이웃의 어려움과 괴로움을 보고 『그 영혼으로 운다』라고 한다. 그리고 그가 『그 영혼으로 울』때에 친절한 행동으로 그 불쌍히 여김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즐거움
즐거움이 『유쾌』와 관계가 있는 것을 많은 방언이 나타내어 뵈었다. 불란서영 서부 아프리카의 빰바라족은 말하기를 즐거움은 『정신을 유쾌케 함』이라고 하고 리버리아의 크펠족은 말하기를 즐거움은 『유쾌한 마음』이라고 한다. 멕시코의 첼탈족은 말하기를 즐거움은 『사람의 마음의 좋은 맛』이라고 한다. 여러 민족이 이렇게 같은 뜻의 말을 가진 것을 보면 단(甘) 무엇을 맛보는 경험에서 오는 유쾌와 풍성한 생활로서 오는 즐거움 사이에 밀접한 심리적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즐거움에 대한 이 여러가지 표현법과 밀접하게 관계되는 것은 우덕족이 『위(胃)에 좋다』라고 한것과 빠울리족(151페이지참고)이 『위속의 노래』라고 한것이다. 늬카라구아와 혼두라의 미스키토족은 좀 기묘한 표현법을 사용하였으니 그들은 『간(肝)이 훨씬 열렸다』라고 한다. 이것은 쾌락이 간으로 꽉차진 것을 뵌것이다.
복되다
『즐거움』과 『복됨』의 분간을 하기란 쉽지않다. 그러나 어떤 방언에는 즐거움은 전체에 스며들어 더 영구한 것으로 해석되었고 복됨은 임시적이요, 외부환경에 달려 있는듯이 해석되었다. 파나마의 밸리엔테족은 즐거움과 복됨을 다음과 같은 말로 분간하였다. 『내 속에 복되다』는 즐거움이요, 『내 주위에 복되다』는 복됨이다. 즐거움은 내부에 있으며 마음의 특증이 되나, 복됨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쾌락을 뵈는 일시적 형편이다.
『쾌락』이란 생각도 복되다는 말을 써서 나타냈다. 서부 아프리카의 맛시족은 『내 머리가 쾌락하다』라고 하며 중앙 아프리카의 카바 라카족은 『내 몸이 쾌락하다』라고 한다. 리버리아의 로마족은 『내 위(胃)가 쾌락하다』라고 하고 그 이웃 족속인 멘데족은 『내 속이 쾌락하다』라고 한다. 이 모든 말은 근본적으로 다 같으니 쾌락은 복된 것이나 음식의 쾌락됨이 아니라 생(生)의 쾌락됨이다.
소망
소망은 어떤 때에 번역하기 가장 어려운 성경말 중 하나다. 사람들이 무엇을 소망하지 않는 까닭이 아니라 소망을 흔히 무엇을 기다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까닭이다. 서반아어에도 『에스페라르』라는 말은 『기다린다』는 뜻과 『소망한다』는 뜻이 있다. 많은 경우에 『기다린다』라는 뜻이 있는 순전한 중성적(中性的) 말을 사람들이 더 깊은 뜻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고쳐 쓰기도 한다. 예를 들면 남부 멕시코 쿠이카텍족어로 소망을 『기다려 바란다』라고 한것 같은 것이다. 소망은 두 행동의 혼합이니 곧 기다리는 행동과 바라는 행동이다. 이것은 소망을 이루는 일종의 기대(期待)다.
마야족은 소망의 의존상태(依存狀態)를 『무엇에 걸려 있다』라는 말로 나타냈다. 『하나님 안에 우리 소망』이라 한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걸려 있다』라고 번역하였다. 소망의 목적은 우리의 기대하는 기다림을 후원하여 주는 것이다.
탐욕
마음은 고귀하고 순결한 포부를 가질 수 있을뿐 아니라 저속(低俗)하고 추잡한 기분을 가질 수도 있는것 같다. 멕시코의 첼탈족은 탐욕 있는 사람을 『작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한다. 탐욕에는 물건의 가치를 찬양하고 다른 사람의 권리를 거부하는 것에 비례하여 그 인격이 오그러드는 것을 포함한다. 마야족은 그런 사람을 두둔하지 않고 매우 솔직하게 말하기를 탐욕은 『남이 가진 것을 원하는 것이라』고 한다.
탐욕은 이성(理性)을 눈어둡게 하고 만족할줄 모르게 하는 욕망이다. 이것을 쉬피보족은 말하기를 『물건에 미치광이가 된 사람이라』고 한다. 탐욕은 많은 사람을 유혹하여 물질적소유로써 그 우상을 만들고 그 영혼을 그 우상 앞에 절하게 하는 정신병적 자아심이다.
시기
시기는 탐욕과 자기중심주의의 새끼다. 탐욕 있는 사람을 『작은 마음을 가진 사람』(156페이지 참조)이라고 한 첼탈족은 시기하는 사람을 『욕심많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작은 마음』과 『욕심많은 마음』은 동행(同行)한다. 그리고 그 영혼은 그 가진 욕심에 비례하여 오그러들게 된다. 시기하는 사람은 만족할 때가 없으니 그는 자기의 만족시킬 수 없는 자아를 쫓아가고 쫓아가도 붙들 수 없는 까닭이다.
남부 멕시코 저습한 지대인 티바스코에 사는 촌탈 홍인종은 시기를 더 이상하게 표현하였다. 그들은 자기 이웃을 시기하는 사람을 가리켜 말하기를 『그는 자기 이웃을 보기를 원치 않는다』한다. 이것은 시기의 마지막 결과를 뵌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들만 가졌다고 생각하는 특권을 남들이 가지는 것을 볼때에 속이 쓰린 것이다. 시기하는 사람은 남의 즐거워하는 것을 보려고 자기 몸에서 눈을 옮길 수 없을만큼 저만 보는 버릇이 있다.
감사
사람들 사이에 어긋난 관계를 다시 정당하게 만들 수 있는 감사는 시기의 해독제(解毒劑)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방언에는 감사하다고 말하는 형식적방법이 없고 『좋다!』라고만 말함으로 넉넉하다. 그러나 많은 방언은 감사를 표현하는 데 형식적 방법을 가졌고 더러는 과장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불란서영 서부 아프리카의 맛시족은 말하기를 『내 머리가 흙속에 있다』고 한다. 이 말은 그들의 풍속에서 온 말이니 그들은 감사하다고 할 때에는 머리를 거의 흙속에 박히기까지 숙인다. 이렇게 남의 은혜에 대하여 아주 끝가는 감사의 정을 표시하는 것이다.
『감사를 모르는 사람』을 가리켜 『주둥아리를 닦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 말은 병아리들이 모이를 작은 껍질과 티같은 부스러기까지도 게걸스럽게 다 쪼아먹고 그 주둥아리를 두세번 급한듯이 닦고 아무 것도 먹어보지 못한듯이 게걸이 들어 하는 것을 본데서 온 말이다. 병아리들은 한초라도 멈추어 감사할줄을 모르고 그저 먹을 것만 더 찾느라고 바쁘다.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입 쓱 씻고 이익될 것만 찾아다니는 것이다.
카바 라카족은 말하기를 감사는 『두 손으로 잡는 것』이라고 한다. 거기 사람들은 『고맙습니다』하고 말할 때에 두 손으로 남을 붙잡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 손을 잡고 그 기쁨, 그 고마움을 한끝가는 말로 주고 받는다.
마야족은 더 신학적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갚으시기를 바라노라』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향하여서도 『하나님께서 갚으소서』하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여도 아무 모순을 느끼지 않는다. 이 말은 지금은 돌 다된 형식적 말 밖에 아니된다.
카레족의 말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땅위에 앉는다』라고 한다. 감사할줄 아는 카레사람은 그 은인의 집에 가서 그 집앞 땅위에 앉는 풍속이 있다. 아무 말도 아니하고 가서 고요히 앉았는 것으로 자기의 감사를 웅변으로 나타내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 감사한 사람도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앉아서 하나님의 와 계심을 즐기며 그 조물주의 자비하심에 의지하고 자기의 감사함을 선포할 것을 노력할 것이다. 하나님께 빚진 바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카레족의 이 말에서 배우는 것이 많을 것이다. 그 자녀들이 친근하여 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자기 앞에 땅위에 앉을만한』시간을 즐겨 내고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원함으로 그 감사함을 나타내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복을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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