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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1장 :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어휘(語彙)중에는 우리 감정을 두드리는 말들과 큰 교리적 중요성이 있는 말들이 있을뿐 아니라, 생활의 일상 경험을 표현하는 말들도 있다.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로 정확히 서술할 수 있는 경험을 표현하는 말들도 있다.





죄는 우연한 행동이 아니요, 영혼의 경향이다. 죄에 대한 성서적견해는 다른 유행하는 태도보다 더 깊다. 성서적견해를 표현하려고 여러 방언에 여러가지 말을 사용하였다. 꽈테말라의 코놉족은 말하기를 죄인은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한다.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함으로만은 충분치아니하니 행동이 그 마음을 반영하기는 하나 하나님께서 더 큰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마음이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마태 15:19) 싼 뿔라스족은 죄인에 대하여 특수한 말이 있으니 그들은 말하기를 『나쁜 일을 마음에 하는 사람』이라 한다. 이것은 죄의 주관적성질을 표현하려한 말이다. 이런 죄, 곧 밖에 나타난 행동이 아니라 악한 마음의 소원을 예수께서 정죄하신 그것이다.

표준을 깨뜨리는 것도 『죄』라는 말 속에 포함되었다. 나바조족은 말하기를 죄는 『탈선한 것』이라 한다. 곧 곧은 길에서 떠났다는 말이다. 이런 생각은 희랍어 『파랍토마』직역하면 『옆으로 떨어지다』인데 보통 번역하기를 『범죄』라 한다. 희랍어 『하말티아』는 문자대로 번역하면 『과녁을 빗나가다』가 된다. 이 말은 역시 지키지 못한 표준 혹 목표를 가리키는 것이다.

밸리엔테방언에서 죄라는 말은 죄의 결과에 기초하여 되었으니 즉 『죄를 범하게 만든다』라고 한다.

어떤 경우에는 죄에 대한 말에 여러 가지 뜻이 함축(含蓄)되었기 때문에 그 말을 사용하기 전에 그 충분한 뜻을 이해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쉬피보 본토인들이 죄라는 말과 대등되는 이말라하여 『호차』라는 말을 쓰는 것을 들었다. 처음에는 그 말이 옳은듯 하였었는데 하루는 선교사 번역자가 한 계집애가 작은 오지단지 하나를 깨뜨리고 말하기를 자기는 『호차』의 죄를 지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자 의심이 나게 되었다. 그런 작은 오지단지를 깨뜨리는 것을 죄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쉬피보 사람들은 『호차』는 참으로 죄라고 하고 그 말의 뜻을 더 충분히 설명하였다. 그 오지단지가 남의 것이면 그것을 깨뜨렸을 때에 이 말을 쓰게 된다. 호차는 남의 물건을 깨뜨렸을 때에 저지른 행동이다. 그러나 단순히 물질적 소유에만 국한되지 아니한다. 그들의 믿음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소유하셨다. 하나님의 사업과 경륜을 깨뜨린 사람은 호차를 범한 것이다. 살인자는 무엇보다도 큰 호차를 범한 것이니 세상의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소유 곧 사람을 멸한 까닭이다. 파괴적이거나 악의적인 정신은 다 『호차』다. 그런 정신은 하나님의 창조물에 적대적이요, 해로운 까닭이다.

죄에 대한 이 말은 어떤 우연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생긴 약한 말이기보다는 그 뜻이 매우 깊고 또 하나님의 구속적행동을 드러내는 데 좋은 기초를 놓게 되었다.



외식



예수께서는 모든 죄 중에 의식을 가장 엄하게 공격하셨으니 외식은 영혼을 해하고 뒤틀리게 하는 죄 중에 으뜸가는 까닭이다. 그 생활의 모든 것을 말로만 하려 하면서 무척 종교적인체하는 것이 이 외식이다. 외식의 표리부동한 것을 멕시코의 세가지 홍인종 방언에서 뵈었다. 믹스테코족은 말하기를 외식은 『두 머리를 가진것』이라 하고 첼탈족은 『두 마음을 가진 사람』을 외식자라 하고 파메족은 말하기를 외식자는 『두 입을 가진 사람』이라 한다.

불령 서부 아프리카에 맛시족은 말하기를 외식자는 『달콤한 입을 가진 사람』이라 한다. 우리 말에도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는 말이 있다.

피로족은 외식자를 『하기만 하는 사람』이라 한다. 이 말은 우리 한국말로 직역한 것과 같은 뜻은 아니다. 이 말은 참된 동기나 소원에 주의를 보내지 않고 편리한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킨 것이니 이리하여 행동이 품격과 분리된 것을 뵌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어떤때 넘겨보기 쉬운 교묘한 종류의 외식이다. 우리는 외식을 참된 성찰(省察)을 가리려 하는 행동에만 국한하려고 한다. 그러나 피로족은 마음과 영혼에 일치하지 않는 무의식적행위도 외식이라 한다. 그래서 순전히 영업관계 때문에 그 손님을 잘 대접하는 버릇이 있는 상인은 근본적으로 외식자다.
어떤 방언에는 『외식자』라는 말에 재미있는 전설적배경이 있다. 예를 들면 빨리족은 외식자를 『제사장 백로』라 한다. 본토인 전설에 의지하면 예전에 고기를 잡아 먹으려는 백로가 못이 말라가는 것을 보고 제사장으로 가장하고 죽어가는 고기의 운명을 걱정하는듯이 꾸몄다. 고기들을 다른 못에 옮겨준다 하고 그 긴 주둥이에 집어넣음으로 그의 너그러움을 나타냈다. 그래서 그 고기들은 백로의 밥통보다 더 멀리 옮겨가지는 못하였다.



거짓말장이



거짓말장이는 말의 외식자다. 북부 멕시코에 타라후마라족은 이런 사람을 『바람 맞은 사람』이라 한다. 더 남쪽에 파메족은 『말장이』라 한다. 많은 경우에 진리에 덧붙임 없이 말을 많이 계속하여 하기는 어려우므로 이 위에 모든 족속이 말많은 것과 진리를 삐뚜르게 만드는 것을 연결시킨 것은 옳은 일이다.

서부 아프리카의 모레족은 말하기를 거짓말장이는 『물을 쪼개는 사람』이라 한다. 이런 불가능한 행동은 꾸며내기를 좋아하는 얘깃군에게 적당한 비유일 것이다.



교만



교만은 자기를 우상숭배하는 것이다. 거만은 그 제사장이요, 탐욕은 그 제물이요, 아첨은 그 의식이다. 쉬피보족이 교만을 『「내가 남보다 윗자리를 가지겠다」버티는 것』이라 말함으로 그 요소(要所)를 찔렀다. 교만은 겸손이라는 가면을 쓰고서 자아를 신화(神化)한다. 교만은 품격에 오점을 찍고 영혼을 영적진리에 접촉치 못하게 한다. 교만은 천만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침범한다. 교만한 바리새인과 회개하는 세리에 대한 공과를 가르치고 그 반원들에게 그들은 바리새인과 같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자고 말하는 주일학교 선생에게도 침범한다.

꽈테말라의 캑치켈방언에는 교만을 『숙이지 않는 목』이라 한다. 남을 거만히 멸시하는 태도로 그 머리를 꼿꼿이 들고 있는 사람은 페루와 뽈리비아의 낙마(駱馬)와 같다. 낙마는 줄 하나로 스물 혹 그 이상의 수를 붙들어 매어 끌 수 있다. 한 짐승의 목에 줄을 매고 그 다음에 그 옆에서 목을 빳빳이 하고 멍하니 보고 서 있는 짐승의 목에 맨다. 각 짐승을 딴 줄로 따로따로 맬 필요는 없으니 이 짐승들은 그 머리를 숙이는 일이 도무지 없는 까닭이다. 그 머리를 회개로 숙일 수 없을만큼 교만한 사람들이 죄로 매임을 당하는 것은 이 짐승과 같다. 자기 체면을 지키려고 고집하는 사람은 자기 목숨을 잃을 것이다.



온유



교만한 자가 아니라,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온유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있을 곳을 준비하여 놓으신 그 나라의 자녀들이다. 그러나 온유는 게으름도 아니요, 팔짱끼고 빙빙대는 것이나 희망적관측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온유는 사람이 물질은 잃어버려도 생을 발견할 수 있는 영혼의 습관이다. 서부 아프리카의 모레족은 말하기를 온유한 사람은 『그늘진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한다. 그의 마음은 이기적 경쟁의 맹렬한 햇볕에 폭로되지 아니하였다. 그의 마음은 그늘진 까닭에 그의 생활은 서느럽다. 동부 아프리카 케냐의 킵시기족은 말하기를 온유는 『천천히 행동하는 것』이라 한다. 교만한 사람은 빠르게 행동하나니 자아(自我)는 자기 이익만 보고 그 깃에 오는 것을 갖기에 무척 빠른 까닭이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근본적으로 자아에 대한 관심이 적다. 남의 소원에 관심을 두면 자연 행동을 천천히 또 곰곰히 생각하여 하게 된다.

카바 라카족은 말하기를 온유는 『아이의 속 사람을 가진 것』이라 한다. 온유는 겸손의 선물이요, 교만은 우리의 죄와 독선주의의 자식이다.



실족



신약에서 사용된 『실족(혹 범죄)』이라는 말은 적더라도 두 주요한 뜻을 가졌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실족)케 하거든』(마가 9:47)은 한 종류의 실족이요, 마태 13:21에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 사람들이 진리를 버리는 것을 『넘어진다』라고 하였는데 이것도 실족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나 마가 9장의 실족과 다른 것이다.

첫째 종류의 실족을 싼 뿔라스족은 『만일 네 눈이 네 마음을 나쁘게 하거든』이라고 하였다. 이 말의 희랍어를 직역하면 『넘어지게 하는 것』이나, 여러 방언은 이 뜻을 글자 그대로 번역할 수가 없다. 그런데 싼 뿔라스어는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를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 글자 그 뜻대로 넘어지는 것이거나 나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사람이 그 인격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죄의 도구가 되게 내맡김으로 상해(傷害)를 보는 인격을 말함이다. 케냐의 킾시기어로는 희랍어의 뜻을 『만일 네 눈이 너로 치이게 될 덫을 놓거든』이라는 말로 잘 드러냈다. 눈의 유혹은 자아 유혹이라고 볼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영혼과 생명을 보존하려면 이것을 빼어버려야 할것이다.

『넘어지게 하는 것』혹은 『죄를 짓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의 『실족』은 개인 인격 자체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여러 사람들의 관계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 마가 9:42에 『또 누구든지…이 소자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이라 말씀하시어 경고하신 것을 토토낙족어로 『누구든지 이 소자중 하나에게 잘못된 길을 뵈일 것이면』이라 번역하였다. 우리의 일상행동으로 우리는 우리를 주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길을 가리켜 뵈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더러 걸으라고 주신 길로부터 벗어져 나가는 것은 우리가 잘못된 길을 남에게 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소자중 하나를 실족케 한다』라는 생각에 깜짝 놀랠는지 모르나 『잘못된 길을 뵌다』고 번역한 토토낙어에서 들어난 뜻과 같이 이 사상을 실제생활의 말로 표현할 때에 우리는 왈칵 붙잡힌것 같이 이 분명한 말로 기록된 우리의 실패를 우리 눈 앞에 역력히 볼 수 있게 된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남을 실족케 한 사람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하셨다.

그 결과가 어떠리라는 것을 깨달은 후에도 진리를 버린 사람들이 느낀 실족을 여러가지 모양으로 표현하였다. 무서워하거나 흥미가 없어서 내던진 사람들을 피로족은 말하기를 『그들은 다른 길로 간다』라고 한다. 이 말은 그들이 같은 목표에 도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아니한다. 자기들의 기분에 맞을 길만 걸으려고 남들과 떠나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나바조족은 단순하게 말하기를 『그들은 「갈 길」을 버리다』라고 한다. 그들은 진리를 조사하여보고 버렸다. 무엇을 받아 들였다가 내버린 사람의 감정적형편을 카바 라카족은 말하기를 『그의 영혼은 병들었다』한다. 이 말은 떡덩이와 고기 때문에 예수를 좇았으나 요한6장에 있는 엄한 말씀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백성을 잘 표현한 말이다. 그들은 그들의 영혼이 병든 것을 몰랐다.

143페이지에 기록한 것처럼 리버리아의 로마족은 신앙을 설명하여 말하기를 『그 손을 무엇 위에 놓는다』라고 한다. 이것을 풀어 말하면 자기를 그 신앙의 대상과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족한 사람은 『그 손을 거기서 얼른 떼어 갔다』라고 한다. 예수께서는 실족한 사람들은 예수와 자기를 동일시하는데 아무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자기의 부인(自己의 否認)



예수의  모든 말씀 중에 다른 어느 말씀보다 더 엄밀히 영혼의 깊이를 헤아리는 말씀 하나가 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나를 없이 하고, 자기를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제자의 자격을 가지는 것-이 세가지 중요한 조건을 이 단순한 말씀으로 나타내사 그리스도인들이 나아가는데 지로표 모양으로 뵈어주셨다. 자기의 부인은 보통 경험이 아니요, 기독교신앙을 떠나서는 확실히 있을 수 없는 경험이다. 그래서 이 표현을 번역하기란 매우 어렵다. 많은 방언에는 이에 대한 예로부터 내려오는 말이 없다. 통 그런 생각은 하여도 보지 못한 족속에게 그 생각을 표현할 말이 있을수 없는 것이다.

남부 멕시코의 쏙 홍인종은 말하기를 자기의 부인은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이라 하고 더 북쪽에 사는 마사텍족은 『자기를 싸 감추는 것』이라 한다. 멕시코 티텔씽고의 아스텍족은 말하기를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를 승인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이 말들은 다 자기 거절 혹은 자기 배제(排除)를 의미한다. 파메 홍인종은 더 특수하다. 그들은 말하기를 『자기가 하고자 원하는 것을 하지 아니하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라 한다. 이 말은 심리학 문제의 중심에 더 가깝고 『네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아니하는 것』이라 한 첼탈어와도 같다.

자기의 부인은 생활에 관계되는 것들을 거절하는 것이기보다는 자기 중심의 생활을 하는 사람이 그 소원을 소멸시키려는것이다. 후아누코 퀘추아어로 자기부인을 번역하여 『「나는 내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겠다」하고 선언하는 것』이라 하였다. 『나』『내 자신』이라고 번역한 것은 생활전체에 대하여 주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실천하려고 하는 사람의 경험을 생생하게 반영한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죽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는 이 말은 남을 위하여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말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산다는것이 된다. 바울의 말을 빌리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부인의 적극적방면이다.
로마방언으로는 자기부인의 진리를 조금 다른 표현법으로 나타냈다. 곧 『자기 마음을 자기 자신에서 취하여냈다』라고 한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 자신의 이익만 구하고 또 이기적 동기로써 자신을 지배하는 일로부터 떠난다는 뜻이다. 이 『자기 마음을 자기 자신에서 취하여 내는 것』은 심리요법학자(心理療法學者)가 여러가지 신경병자에 대하여 말한 것과 똑같다. 그 치료법은 로마족이 『자기의 마음을 자신에서 취해 내는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행하여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자복



자복은 영혼을 깨끗이 하는 것이다. 그 심리적 『환기(換氣)』때문에 영혼을 깨끗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의 꿰뚫고 들어가는 빛이 마음의 숨은 구석구석을 비취어 비밀한 자아를 폭로시키고 그렇게 함으로 완전한 인격을 우리로 하여금 가지게 하는 까닭에 영혼을 깨끗이 하는 것이다. 파메족은 말하기를 자복은 『그 마음을 끌어내는 것』이라 하는데 그렇게 끌어내어 사람에게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분명히 뵈어지게 하는 것이다. 자복은 『참된 것을 말하는 것』이거나 『자기의 범죄를 승인하는 것』만이 아니라, 참된 자복은 그것보다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참된 자복은 치료하는 힘이 있는 자기 폭로의 생활을 사는 것이다.

『자복한다』라는 동사는 죄에 관련하여서만 사용되는 동사는 아니다. 누가 12:8에 『나를 시인(자복)하면』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알수 있다. 한국말로 『시인』이라고 번역한 말은 『자복』이라고 번역한 말과 같다. 우리 말로는 구별하여서 번역이 되었다. 리버리아의 그비포족은 이것을 『주의 좋은 이름을 말하는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하듯이 주께 충성한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선언하는 것뿐 아니라, 주의 좋은 이름을 전하는 것을 버릇으로 삼는 것도 된다. 이런 종류의 자복은 어떤 사람들이 감정이 흥분하였을 때에 선언하는 것보다 더 깊은 뜻이 있다. 신실한 담화에 주의 이름을 전하는 버릇은 매우 훌륭한 것이다.



교통(우리 성경에는 참예, 사귐들로 번역되었다)



죄가 담을 쌓아 막아놓은 것을 자복은 그 막힌 것을 뚫어놓고 교통은 우정을 회복하게 한다. 교통은 근본적으로 친구 사이의 경험인데 여기는 주고 받는 요소가 있다. 남부 멕시코의 쏙족은 말하기를 교통은 『친구가 되며 친구를 가지는 행동』이라고 한다. 호혜주의(互惠主義)는 교통의 요소다. 첼탈족은 말하기를 교통은 『서로 친구가 되는 것』이라 한다.

교통의 특색중 하나는 사상의 교환이다. 교통은 공동의 이익을 포함하고 공동의 이익점이 많을수록 교통의 도가 크다. 모든 차이점이 다 없어지고 말면 완전한 교통을 하게 될것이다. 멕시코의 마사텍족은 이런 종류의 교통을 『그 둘은 빈틈없이 들어맞다』라고 한다. 완전히 들어맞는 것은 완전한 교통의 필요조건이다.

교통에는 시간이 중요하고 사상의 교환이 중요한 것을 멕시코 미틀라의 사포텍족은 표현하기를 『끓는 물』이라고 한다. 이 말은 열중한 변론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이 말은 불 위의 질탕관의 끓는 물에서 가져온 비유다. 말군들이 밤에 어떤 방에 모여앉아 자기들의 희망과 포부와 소원을 밤이 깊도록 주고 받는 것이 마치 옆에있는 화로에서 질탕관의 물이 끊는 것과 같다는 비유다. 하나님과의 교통은 영혼이 영적미지경(靈的未知境)으로 갑자기 뛰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오랜 시간을 걸려 생활의 가장 개인적이요, 친근적이요, 실제적인 점을 그 세세한 것까지 툭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교통은 안전한 곳으로 돌진하는 것이 아니요, 우리 손을 하나님의 손에 쥐키고 진리로 걸어가는 것이다.

적도 아프리카의 카레족은 이 진리를 다음과 같이 나타냈으니 곧 『앞으로 함께 우리 발을 나가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장애물을 제끼고 함께 걷는다. 이것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다.



제자 되는 것



제자 되는 것은 교통의 한 종류다. 우리의 선생님은 필요를 느끼는 영혼에게 강의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함게 담화도 하시는 것이다. 케냐의 킵시기족은 제자를 『견습생』이라고 한다. 마술을 사용하여 병 고치는 사람이 늙으면 그가 가진 비방을 배우고 영험한 물건과 부적을 물려받으려고 그의 견습생이 되려고 경쟁하는 청년이 많다. 그들은 그 선생과 같아지도록 배우려 한다. 그렇게 하려고 그들은 그 선생과 사귀며 그의 활동을 보며 그의 마술방법을 기억하며 그가 어떻게 그 환자를 다루는지 관찰한다. 기독교 제자도 만일 그 선생의 참된 제자가 되려면 마술사의 견습생들이 보낸 시간 만한 시간을 보내면서 훈련을 받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제자는 『배우는 사람』이나 『학도』보다 더 깊은 뜻이 있다. 사카포악스틀라의 아스텍족은 말하기를 제자는 『교사의 모방자』라 한다. 그러나 배우는 중에도 그들은 지식을 피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밸리엔테족이 말하는 것처럼 『진리 탐색자들』이다.



기이히 여김



기이히 여김은 참 제자의 첫번 경험중 하나다. 이 감정적 태도를 표현하기란 늘 쉬운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매우 분명한것 같은 이 감정을 표현하는데 방언마다 다른 방법을 쓰고 있는 까닭이다. 켁치족은 말하기를 『기이히 여김』은 『사람이 그 마음을 잃는 것』이라고 한다. 이상히 여김으로 그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듯 한 것이다. 첼탈족은 이 경험을 더 생생한 말로 표현하였으니 곧 『그는 죽는 것같이 느꼈다』라고 하였다. 우리도 『놀래 죽을뻔 하였다』고 말한다. 또는 매우 구색한 경우를 당하였을적에 우리는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상히 여김으로 죽을 것을 생각하는 일은 없다.

중부멕시코 타라스칸족은 말하기를 놀람은 『생각하면서 입을 다무는 것』이라 한다. 아무 것도 말할 것이 없을만큼 생각에 억눌리고 말았다. 더 남쪽의 믹스테코족은 『기이히 여김』을 매우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였다. 그들은 『들으면서 잊어버리는 것』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다른 모든 것을 아주 잊어버릴만큼 그 소식은 기이하다는 것이다.

로마 방언으로는 예수께서 사람들의 믿지 않음을 기이히 여기셨다(마가 6:6)는 것을 『그 마음이 떠나실만큼 그들의 믿지않음이 컸었다』라고 하였다. 예수의 마음은 군중의 고의적으로 믿지 않음을 견디실 수 없었다.



권면



권면은 한 사람의 사상을 다른 사람에게 고압적으로 부과시키는 것인줄로 많은 사람은 알고 있다. 그러나 희랍 말로는 신용이 생기게 한다는 뜻이 더 있다. 코놉족의 말은 더 개인적이요, 친근적인 뜻이 있다. 그 말을 직역하면 『그 영혼을 주는것』이다. 누가 다른 사람을 권면하는 것은 그가 『자기 영혼을 그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참되고 오래가고 효과 있는 권면은 이 준다는 길이 있어야 한다. 마음에 호소하는 현대 선전방법과는 모순이 된다. 성경의 권면은 마음과 영혼에 성경 자체를 내어주는 것이다.



기도



선교사 번역자들이 『기도』라는 말의 대용어(代用語)로 하여 낭영(朗 )이나 음송(吟誦)이라는 말을 택하는 실수를 범하기 쉽다. 그 이유는 이렇다. 세계의 많은 족속들에게는 기도란 이상한 소리를 내어 기계적으로 웅얼대는 것으로 알려졌다. 요술장이가 이상하고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그 신들에게 말을 많이 하여야 알아들을듯이 길게 주문을 외는 것이 기도인 줄로 알고 있다. 이런 족속들에게 기도의 참된 뜻을 가르치기 위하여 번역자들은 흔히 『하나님과 이야기한다』는 말을 쓴다.

『하나님과 얘기한다』는 것을 생각해 본적이 도무지 없는 사람들이 세계에는 수백만명이 있다. 그들은 우상이나 성인이나 신령이나 귀신에게 무슨 도움을 얻으려고 기도를 하여 보았을찌 모르나 하나님께 얘기한다는 것은 믿을 수도 없고 될 수 있을 것 같지도 아니하다.

어떤 번역자들은 『구걸한다』는 뜻이 있는 말로 기도라는 말이 되게 사용하여 무의식중에 기독교인을 영적걸인으로 만들게 되었다. 촐칠족은 『청구한다』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기도라는 말의 한 부분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다가 『폭로된 마음으로』를 더 붙였다. 폭로된 마음으로 구하니 자아는 숨을 곳이 없게 되는 까닭으로 이기적 기도 하는 것을 막게 된다.



흥함과 쇠함



요한 3:30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의 번역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말들을 다른 방언으로 재현(再現)시킬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뜻이 순전히 물질적이 되고 정신적이 되지 않을 수 있다. 멕시코 마사텍족중에서 일하는 번역자가 이 절을 번역할 말을 그 본토인 조역자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커진다』『작아진다』라는 말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이 말들은 몸의 크기를 가리키는 외에 더 다른 뜻이 없다. 다른 말을 가르쳐 달라하여 배운 말들은 또 키가 크고 작은 것에 대한 말들이어서 만족하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다시 다른 말을 배우려 하여 배운 말은 『거대(巨大)해진다』『왜소(矮小)해진다』였다. 이것도 신장(身長)에 대한 말이요, 이 절에서 의미하는 뜻은 없다. 마침내 번역자는 낙심 되어서 그 조역자들에게 말하기를 『이 절은 몸의 크기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한 사람은 더 중요하고 다른 사람은 덜 중요함을 얘기하는 것이라』하였다.

그 때 그들은 말하기를 『그렇다 하면 왜 진작 말하지 않으셨소? 우리는 그런 것을 이렇게 말하지요 -그는 추장(酋長)보다 더하여야 하고 나는 부하(部下)보다도 더 못하여야 한다』

이것이 참된 제자의 자격을 뵌 좋은 비교다.

영국과 애굽령 수단의 쉴럭족은 기독교 생활에 있어서 이 중요한 과정(過程)을 『그는 아침에서 나와 낮으로 들어오셔야 하고 나는 밤으로 나아가야 하리라』라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태만의 안개낀 새벽에서 나오셔서 왕권의 정당한 자리를 취하시러 들어오셔야 한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중심의 생활을 물러가게 하여 무아(無我)의 밤속에 사라지게 하여야 할것이다.



주(主)



『주』라고 번역하는데 사용한 말은 사람과 그의 관계와 그와 사람의 관계의 많은 방면에 주의를 집중시킨다. 밸리엔테족은 주를 『사람 두 몫의 자리』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크시다는 의미로 두 사람의 자리를 차지하시는 이라는 뜻이다. 싼 뿔라스족은 밸리엔테족의 말보다 더 깊이 들어가 말하기를 『모든이 위에 큰 이』라고 한다.

페루의 아무에사 홍인종은 말하기를 주는 『우리를 이끄시는 이』라고 한다. 이것은 주께서 자기 백성을 붙드시고 지키시는 관계를 가지신 것을 뵌것이다. 리버리아에 있는 여러 방언에는 주를 『사람 소유자』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노예를 소유한 추장이라는 말에서 온 것은 아니다. 그 뜻은 더 깊다. 누가 『사람을 소유』하려면 먼저 그 사람을 『속량』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에 복음의 요소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속자시요 우리의 소유자시기 때문에 우리의 주가 되신 것이다. 구속은 주권을 요(要)하고 주권은 복종을 요한다.



하나님



어떤 때는 『하나님』이라는 적당한 말을 찾기가 어렵다. 족속 중에는 하나님께 대하여 흐리멍덩한 생각을 가진 까닭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명확치 못하고 무척 멀리 있는 이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의 큰 관심은 그런 명확치 못하고 멀리 있는이보다는 자기들에게 해를 끼치는 나쁜 신들에게 더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아무 믿음도 가지지 못한 하나님께 기도하기 보다는 자기들의 적대자들을 달래기에 시간과 노력을 더 쓰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이라는 본토어가 훌륭하기도 하다. 예를 들면 북부 콩고의 므반사족은 『추추』를 믿는데 『추추』는 세계와 인류를 만들었다고 그들은 믿는다. 그리고 『추추』는 인류를 좋아하나 인류는 그를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피하여 도망한 후 그를 거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였다. 여기 선교사가 이용할 수 있는 진리가 그 족속의 전설에 묻혀 있다. 선교사는 그 족속에게 그들이 얼마나 멀리 하나님께로부터 떠나 나와 있는지를 알게 하고 그들이 멀리 떠나 나와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도무지 잊어버리지 아니하시고 계신다고 뵈어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기와 화목케 하시려고 자기 아들을 보내 주셨다.

싼 뿔라스족은 하나님을 『우리 크신 아버지』라 한다. 이 말은 그들이 하나님을 나타내는 데 써 오던 말인데 하나님의 한가지 방면만 나타내기는 하나 가장 중요한 방면을 나타낸 말이다. 페루의 찬카 퀘추아족은 하나님을 『충족하신 이』라 한다. 모든 것에 충족하시다. 반역적인 인류까지 포함하실만큼 충족하시다.

킵시기어로는 하나님을 『쩨호바』라고 하는데 영어로 『쩨호바』와 매우 같다. 그러나 영어에서 빌어온 말은 아니다. 이 킵시기 말은 실제로 『크신 통치자』라는 뜻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킵시기족의 전통적 말이다.

선교사가 『하나님』이라는 말을 발견하고 또 『아들』이라는 말을 발견한 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만들기란 쉬우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것은 참되다. 말이 어렵다고 하는 북부 멕시코의 타라후마라 방언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 교만하고 수집은 족속은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번역한 말을 어떤 타라후마라 홍인종의 이름인줄 알았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자기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나 모든 외국인들은 다 『마귀의 아들들』이라 한다. 그들의 민족적 교만은 앵글로 쌕손족보다도 더하다. 그들은 자기들의 민족적 우월성은 자명(自明)의 이치라 그것을 선전할 필요도 없다고 보았다. 신약을 타라후마라방언으로 번역할 때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오직 하나인 아들』이라고 번역하여야 할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예수는 또 한 사람의 타라후마라 홍인종이 되고 말것이다.



사람의 외모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사도 10:34)의 우리말 번역은 그 뜻을 잘 잡았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시나 사람의 밖으로 나타난 모양이나 자기 스스로 인정을 받으려는 선전에는 속지 아니하신다. 에베소 6:9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줄』을 멕시코의 속 방언으로는 『그는 나타난 것을 보고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신다』라고 번역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겉 모양을 보시지 않고 그 마음을 보신다. 페루의 카쉬보족은 말하기를 『그는 얼굴만 보시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얼굴은 긴 얘기를 할찌 모르나 나쁜 마음을 감출 수도 있다.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온 바리새인들이 한 말 『당신은…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마가 12:14)를 여러 모양으로 번역하는데 이 귀절의 직역이란 어려운 까닭이다. 쉬피보어로는 『당신의 마음에는 누구든지 아무 것도 아닙니다』로 번역되었다. 글자 그대로 보면 이 번역은 참되지 않다. 그러나 이 쉬피보의 관용어는 이 절의 진리를 놀랠만큼 나타내 뵈었다. 예수께서는 그 때 종교적 지도자들의 비위를 맞추려 하시거나 바리새파의 배경을 얻으려 하지 아니하셨다. 그는 자기 메세지를 누구의 칭찬을 받으려 함이 없이 전하셨다. 진리와 판단에 대한 이런 대담한 선언을 킵시기족은 『뇌물 받음 없이 진리를 전파하셨다』라고 하였다. 『공의(公義)』를 가장 비싸게 부르는 사람에게 파는 일을 재판정에서 보통으로 행하는 킵시기족 중에서 『진리를 뇌물 받음 없이 전파하시는이』라 한 것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진리만 보시는 이에 대한 합당한 말이다.



영광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찾아내기는 하나님의 속성(屬性)에 대한 말을 찾아내기보다 어떤 때는 쉽다. 이 어려운 말 중에 하나는 『영광』이다. 존경과 화려와 위엄을 돌리는 왕이 있는 족속 중에서는 그 뜻이 처음에는 약하여 성경에서 사용하는 뜻으로 그 내용을 풍부케 하기는 하여야 하겠지만 『영광』이란 말에 거의 가까운 말을 찾아내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인격의 한 속성으로하여 『영광』이라는 말의 매우 먼 일가뻘 되는 뜻이라도 있는 말은 하나도 없는 족속들이 많다. 어떻게 이 관념을 만들어 놓을 수 있을까? 나바조 방언으로는 영광이라는 말을 『빛이 비취는 것』이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와 계심과 그의 인격의 빛나는 품격이다. 마야어는 더 특별하니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 한다. 싼 뿔라스족은 『강하게 빛나는 것의 반사된 것』이라 한다.

『영광』이라는 말을 찾아내기가 어려울 것이면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찾아 내기가 열곱이나 더 어렵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보다 번역하기가 더 쉽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주신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빛의 근원이신 까닭으로 우리가 그에게 빚을 드릴 수는 없어서 『우리가 그에게 영광을 돌린다』를 번역하기가 어렵다. 리버리아의 크펠레족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빛을 든다』라고 한다. 이 뜻은 그의 하시는 일을 찬양하고 사람들을 위하여 그의 기이한 행동을 전파함으로 그의 빛을 사람들 앞에서 높이 든다는 것이다. 쉬피보족은 말하기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라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은 신령하지 아니한 표현이라고 얼른 판단하게 될찌 모르나 이것은 사도바울의 교훈과 합한다고 볼수 있으니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 믿음과 하나님께서 그 아들로 말미암아 오게 하신 구원을 선포할 때에 『자랑한다』는 말을 사용한 까닭이다. 오늘 우리교회의 비극은 우리 교파들과 우리 건물들과 우리 교회출석과 우리 행사들은 자랑하면서 우리 신앙을 만드시고 자라게 하시는 에수 그리스도는 자랑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예배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된 영혼의 반응이다. 밸리엔테 홍인종은 예배하기 위하여 엎드리고 있는 마음을 묘사하여 말하기를 『하나님 앞에 자기를 베어넘기는 것』이라 한다. 이 말은 삼림에 마호가니 나무들이 나뭇군의 도끼에 찍혀 그 우람하고 큰 나무가 큰 소리를 내며 쓰러져 넘어가는데서 가져온 말이다. 이것은 『높이 들리신 주를』본 참된 예배자마다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의 무가치함이 우리를 숙어지게 한다. 밸리엔테족이 말하듯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의 앞에 베어넘겨뜨린다.』자신만만하게 빳빳이 세웠던 우리 머리는 예배함으로 자꾸 숙어들어간다. 첼탈족은 예배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끝내는 것』이라 한다. 모든 세상적인 자신의 끝을 내게 됨으로서만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이다. 자연교 숭배자가 그 신을 숭배하는 것은 그만한 이익을 얻으려는 욕심에서다. 기독교 세계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출석함으로 이 세상에서 확실히 성공을 얻을 수 있고 죽은 후에는 천당에 가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갚아야 할 값 곧 『자신을 끝내는 것』외에는 다른 값을 예배에 붙이지 아니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요, 모든 것 안에 계시다고 하는 주관적 의식 이상으로 지나가는 적극적방면이 예배에 있으니 이것은 찬양과 감사의 예배다. 이것은 리버리아의 크펠레족이 『주께 축복을 들어 올리는 것』이라 한 것과 같은 것이다.



보혜사(안위자)



12페이지에서 이미 말한것처럼 신약에서 적당히 번역하기 어려운 말들 가운데 『보혜사』(요한 14:16)라는 말만큼 어려운 말이 없다. 희랍어로 『파라클리테』는 그 뜻이 매우 풍부한 말이다. 이 말은 『안위』한다는 뜻뿐 아니라 『훈계한다』『권고한다』『격려한다』『도와준다』의 뜻도 포함되었다. 이 모든 뜻을 어느 방언의 한 마디 말에 집어넣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선교사 번역자는 그 백성에게 성신의 무쌍한 역사를 적당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아내려고 애를 써보아야 할것이다.

남부 비률빈 쫄로아노 모로 방언으로는 『계속하여 옆에 서서 같이 가시는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성신이야말로 신자와 항상 같이 하시는 동반자(同伴者)시다.  중앙 멕시코 오토미 홍인종의 방언중 한 방언을 말하는 신자들은 『우리 영혼에 따스함을 주시는이』라는 말을 제공하였다. 우리는 이 말에서 산 말씀에서 안위를 찾으며 죄와 세상염려의 얼리는 것 같은 환경에서 오들오들 떠는 영혼과 생명이 살아나려고 애쓸 때에 절대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신의 역사에서 따스함을 발견하는 것임을 알수 있다.

빠울리 교인들은 말하기를 보혜사는 『생각을 꽉 동여매시는이』라고 한다. 근심에 싸인 마음의 생각은 무감각하고 괴롭히는 혼란함으로 사방에 흐트러졌다. 보혜사께서 이 흐트러진 생각을 꽉 동여매어 자기 통제(統制)밑에 두신다. 우리는 우리생각의 존재를 부인함으로 여러가지 걱정을 피할 수 있거나 혹 어떤 정신요법적 마술로 우리 생각을 잊어버리려 함으로 걱정을 피할 수 있거나 하지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생각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니 빠울리족이 말하는대로 『꽉 동여매는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속에 내리는 화평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주께서는 그 마음을 주께 머물러 있게 하는 사람에게 완전한 화평을 주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