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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 땅 끝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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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으로 성경번역이 활발하여졌는데 그것은 영국이나 독일이나 첵코(뽀헤미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진리의 횃불은 무수한 방언으로 성경번역의 길을 비취었다. 十六세기말까지 성경 전체가 이태리어(1471년), 카탈로니아어(1478년), 화란어(1522년), 불란서어(1530년), 스위든어(1541년), 정말어(1550년), 서반아어(1553년), 폴랜드어(1561년), 슬로바키아어(1581년), 아이슬랜드어(1584년), 슬로베니아어(1584년), 웨일스어(1588년), 헝가리아어(1590년)등으로 번역되었다. 다음 두세기동안 성경은 49방언으로 더 번역되었다. 그 중에는 전성경이 미국 매세츄세쓰에 있는 홍인종의 말로 번역된 것도 있다.
캠부리즈대학을 졸업한 짠 엘리앗목사가 록스버리에 있는 작은 청교도의 교구를 맡아보려고 매세츄세쓰 해만식민지(海灣植民地)에 도착하기는 처음 청교도들이 여기 온지 十一년 후였다. 그러나 메이풀라워호 승객들을 꾸짖던 짠 라빈슨의 말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엘리앗목사의 마음에 새로웠다. 라빈슨은 말하기를 『저 불쌍한 홍인종들을 죽이는데 대하여…오, 얼마나 행복스러웠었을까? 만일 여러분들이 그들을 회개시켰었더면…』알공키안 홍인종과 처음 접촉을 한지 十五년 후에 엘리앗목사는 노낸텀에 있는 매세츄세쓰 지역 홍인종의 추장인 와반의 큰 위그왐(집)에서 전도를 하였다. 그의 선생은 쫍네수탄이었다. 네수탄은 영어를 배운 총명하고 젊은 홍인종으로 엘리앗집에 같이 살면서 이상한 말소리와 문법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이 말은 그가 캠부리즈대학에서 배운 히브리어나 헬라어와 아무 통하는 것이 없이 이상만 하였다. 엘리앗은 여러 해를 이 알공키안 용사들과 같이 지내면서 그들의 말을 배우고 그들의 생활 풍속을 배웠다. 그들 중에서 그는 『머그웜프』라는 말을 배웠는데 이것을 그는 『족장』이라 번역하여 창세기36:30을 『디손 머그웜프, 에셀 머그웜푸, 디산 머그웜푸…』라고 번역하였다. 1663년에는 전체 성경이 출판되었으니 이는 서반구에서 발행된 맨 첫번 성경이었다. 그러나 엘리앗의 죽은 후 50년이 못되어 그 족속은 거의 다 없어지게 되었다. 전쟁과 질병과 백인종으로부터 무자비한 압박 등으로 그 족속은 없어지게 되었다.
성서번역이 많이 나오기는 『선교세기』라고 하는 十九세기가 되어서다. 이 한 세기 중에 성서는 494방언으로 번역이 되었고 二十세기에 들어와서도 그 번역 사업은 줄지 아니하였다. 성서중 단편이 494방언중 대다수를 차지하였고 그 다음이 신약이요 극히 적은 수가 전체성경이다. 十九세기에 단편 얼마만 번역되었던 방언들 중에 二十세기 전엽(前葉)에 신약 혹 성경으로 번역된 방언수는 일백이나 되었다.
이 위대한 선교세기에 선교사들이 지구 각지에 갔고 그들의 노력으로 성경번역이 다음 방언들로 완성되었다-파사어, 뼁갈어, 뻐-마어, 칼묵 몽고어, 앗삼어, 마래어,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북 아메리카 체로키어, 아스텍어, 니카라구아의 미스키토어, 영국과 화란의 영지 아라왁어, 서부 아프리카의 요루바어, 남부 아프리카의 히레로어, 동부 아프리카의 스와힐리어, 중부 아프리카의 뿔루어, 스마추라의 빠타어, 태평양 낄버트군도의 낄비트어, 태평양 카롤린군도의 쿠사이엔어, 쿡군도의 라로통가어, 마다가스카도의 말라가시어들이다. 전도 역사상 이 중요한 시기를 이해하려고 하면 어떻게 이 번역 사업이 추진되게 되었나 살펴보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다. 아도니람 쩟선은 낙심한 사람이었다. 동인도회사의 입국허가거절로 인하여 인도에 입국은 불가능하게 된후 1813년 뻐마에서 사업을 시작하여 六년이 지나갔다. 六년동안 쩟선은 말배우노라고 계속적 노력을 하고 뻐마인들에게 전도하려고 시험해 보고 자기의 서투른 번역을 읽어 주기도 하고 모든 힘을 다 썼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정부의 반대는 자꾸 심하여 가서 六년간에 얻은 세 사람의 겁많은 신자들도 발견이 되어 고문을 받고 사형을 당할까보아 겁이 더럭 나게 되었다. 이 모든 상심하는 일에 덧붙이어 자기의 처음 아이가 죽고 아내의 건강은 나빠만 갔다. 쩟선은 아바에 있는 화려한 궁전으로 뻐마왕을 찾아가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가 친히 왕에게 보낸 탄원서는 소용없게 되었다. 그는 자기 사업을 포기할 것까지 생각하였으나 뻐마인 신자들의 간절한 요청에 의지하여 그대로 계속하고 방언공부와 성경번역에 새로운 열심을 내었다. 그는 방언공부에 곤난하였던 것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어떤 방언과도 서로 같은 점이 도무지 없는 글자와 말, 이 글자와 말은 우리 서양에서 쓰는 것처럼 구절점(句切點)이나 큰 머리글자를 써서 분명히 구분하지 않고 한 계속되는 긴 글줄이다. 또 종이 위에 서로 떨어진 글자들이 아니라 흐릿하게 긁적거려놓은 마른 종려나무 잎사귀들을 서로 매어놓고 책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전이 없고 말 하나 가르쳐 줄 통역자가 없어서 본토인 어학선생을 얻게 되기전까지는 우리 스스로 말을 깨달아내야 하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의 일이다.』
이후 얼마 아니되어 쩟선과 그의 동역자 요나단 푸라이스 의사는 왕의 부름을 받았다. 쩟선은 통역자로 되고 푸라이스 의사는 궁중 의사로 되었다. 그러나 그때 영국과 뻐마는 전쟁을 하게 되어 모든 백인종은 다 옥에 갇히게 되었다.
열 한 달을 쩟선은 쇠사슬과 착고에 채여서 벼룩, 빈대, 이가 뒤끓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거기서 모기와 파리 떼의 공격을 받고 숨막힐것 같은 무더위를 당하였다. 그의 용감한 부인이 가져오는 도움이 아니었더면 그는 죽었을 것이다. 이런 중에도 그의 큰 걱정은 그가 번역한 성경원고에 있었다. 선교사 주택이 수색(搜索)을 당하였으므로 원고를 거기 두는 것은 안전하지 아니하였다. 이 귀중한 원고를 보존하려고 쩟선부인은 베개 속에 원고를 넣고 꿰매어 옥중에 들여보냈다. 쩟선은 이 베개를 베고 렛마윤통감옥의 괴로운 날을 보냈다. 마침내 착고는 벗기워졌으나 죽음의 행렬을 가는 사람들과 함께 쇠사슬에 매였다. 이 사람들은 사형집행을 하기전에 웅펜라 토뢰(土牢)로 끌려가서 거기서 사형집행을 기다려야 하게 되었다. 옥을 떠날 때에 쩟선은 베개를 가지고 가겠다고 애원하였으나 간수들은 듣지 않고 옥마당에 내어던지고 떠났다.
일곱 달을 더 고생한 후에 쩟선은 갑자기 놓여서 감시(監視)를 받으며 정부 통역자로 일하게 되었다. 얼마 아니되어 영국은 뻐마를 패배시키게 되매 쩟선은 다시 자유하는 사람이 되니 그의 아내, 그의 동역자들, 그의 신실한 교우들은 그를 기쁨으로 맞았다. 그가 처음으로 회개시킨 세 사람 중에 하나인 몽잉이라는 사람이 헌털뱅이 베개 하나를 가지고 그 『선생』을 만나러 왔다. 이 베개는 렛마윤통감옥에서 주운 쩟선이 가졌던 물건중 오직 하나인 물건이다. 이 헌털뱅이 베개 속에는 그 귀중한 원고가 들어 있었다. 쩟선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뻐마 말로 옮기는 일을 다시 시작하였다. 1835년 12월 29일에 그의 번역한 마지막 페이지가 인쇄소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五년을 더 걸려 개역사업을 마치었다.
쩟선은 미국에서 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동양 각국에 전하는데 이기기 어려운 난관이 많다는 것을 말할 때에 세계를 기독교화할 가능성이 있느냐 하는 질문을 받았다. 이 질문에 대하여 무서운 고생과 쓰라린 절망과 한없는 노력을 한 이 하나님의 사람은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언약 모양으로 가능성이 있고 말고요』라고 대답하였다.
하나님의 언약은 그의 생의 힘이었고 그의 전도의 중심이었다.
라벗 모리슨은 한 구경거리였다. 중국옷을 입고 중국신을 신고 그 잔등까지 내려오게 머리를 땋아 내려뜨리고 그리고 모리슨은 광동과 진주강 사이에 있는 불란서사람이 내버린 창고 속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정부명령으로 보통 선교사업은 불가능하였다. 그 때 중국법을 말하면 대략 다음과 같았다.
『지금부터 이후로는 사사로이 책을 인쇄하려고 하거나 그 종교를 선전하려고 전도인들을 고용하려 하거나 하는 구라파사람들은 마땅히 이것을 주의할 것이니 곧 그 머리되는 자나 그중 주요한 자는 사형에 처하게 될것이다…』
모리슨은 자기에게 중국어를 가르쳐 줄 선생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마침내 자기 생명을 내걸고 그를 가르쳐 주려는 두 중국인 선생을 구하였다. 그 때는 어느 중국인이나 구라파인에게 말 가르쳐 준다는 것이 발각되면 무서운 고문 끝에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 선생 중에 한 사람은 언제 잡혀가서 악독한 고문을 당할찌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어서 만일 잡혀가 그 무서운 고문을 당하게 되면 자살하겠다고 독약을 늘 품에 지니고 다녔다.
모리슨의 훌륭한 교육과 런던선교회의 후원도 광동으로 갈 동인도회사의 허가를 얻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뉴욕으로 가서 여러 차례의 거절과 낙심할만한 권고를 받은후 겨우 한 배의 선장의 승낙을 얻었다. 그 선장은 모리슨을 배에 숨기고 1백 13일후 1807년에 중국의 오직 하나인 개항장 광동에 상륙시켰다. 그러나 광동은 해마다 여섯달만 개방하였다. 그래서 여섯달 후에는 모리슨은 포도아 영지인 마카오섬으로 가지 아니하면 아니되었다.
광동에 다시 돌아오기 위하여 모리슨은 동인도회사의 통역자가 되었다. 낮 동안에는 장사 관계의 일을 보며 영중자전과 중국어문법을 편집하였다. 이 자전과 문법 편집에 대하여서는 동인도회사도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밤에는 중국인 선생들과 성경번역을 하였다.
18?9년에 모리슨은 사도행전 번역을 완성하고 손으로 만든 목판(木板)으로 인쇄 출판하였다. 인쇄한 종이를 딴 책처럼 제본하여 책장사에게 그냥 주었다. 그러면 그 책장사는 마음대로 값을 매겨 백퍼센트 이(利)를 남기고 팔았다. 해마다 여섯달이 지나면 모리슨은 마카오에 가서 살아야 하겠으므로 그렇게 떠날 때에는 목판들을 발각됨이 없이 보관하려고 하여 땅속에 파묻었다. 그러나 그가 다시 돌아와 파내어 보면 흰개미가 다 먹어 버렸다.
재난도 많았고 시간도 많이 허비하였으나 1814년에 신약 번역은 완성되었다. 이 사업에 대한 도 움을 윌리암 밀른에게서 많이 받았다. 그는 런던선교회에서 보냈으나 광동에 살 허락도 못받고 마카오에 유할 허락도 못받았었다. 그래서 말라카로 갔다. 그는 거기서 모리슨에게 유력한 도움을 주었다.
중국에 있는 동인도회사는 모리슨의 편집한 영중자전과 중국어문법에 크게 호의를 가지고 인쇄를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중국인 인쇄공들은 악의(惡意)를 가진 중국관리들에게 잡히고 또 모리슨의 원고 얼마를 활자와 함께 압수 당하였다. 일이 더 거칠게 되노라고 열심히 과도한 모리슨 후원자들이 영국에서 모리슨의 성공을 너무도 심하게 선전한 결과 동인도회사 영국내 본점에서는 크게 놀라 중국에 편지를 보내어 모리슨을 즉시 해고(解雇)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광동지점에서는 이런 귀중한 사람을 잃기가 아까워서 본점과 오래 끄는 편지질을 한 결과 모리슨은 다시 계속하여 일을 보게 되었다. 1819년에 전체 성경의 번역이 완성되었는데 이 때에도 밀른의 도움이 컸으니 그가 열 책이나 번역하였다. 1823년에 모리슨의 위대한 사업인 중국어사전이 동인도회사로 말미암아 출판하게 되었다.
모리슨은 문이 꼭 닫힌 광동성까지 선교사업이 확장되는 것을 보지못하고 183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번역은 그 길을 닦아 그리스도를 믿고 그 말씀을 중국의 수억인구에게 전하려고 그 생명까지도 바친 수천만의 신남신녀를 일으키게 되었다. 모리슨의 죽은지 백년이 못되어 성서는 중국에서 매년 수백만권씩 전파가 되고 있는 것이다.
1809년에 윌리암 캐레와 그의 두 동역자 윌리암 와-드와 짜슈아 마-쉬맨의 명성은 영국에 들레었다. 그러나 악스포-드와 캠부리즈의 학자들은 인도말로 성경을 번역한 이 선구자(先驅者)들을 비꼬아 비평하기를 『천하고 무식한 직공들』이라고 하였다. 침례교의 열심 있는 목사인 캐레는 그의 가난한 교인들에게서 넉넉한 생활비를 받을 수 없어서 구두장이로 벌이를 한 것은 참되다. 그는 형식적 학교교육은 없었으나 래틴어, 희랍어, 히브리어를 배워 알았다. 와-드는 힘이라는 곳에서 인쇄공노릇을 하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비상한 조직적 천재가 있는 것을 뵈었다. 마-쉬맨은 뿌리스톨에 있는 자선학교(慈善學校)에서 교사노릇을 하였다. 학자들은 이렇게 비꼬아 말하였으나 영국의 계관시인(桂冠詩人) 라벗 싸우디는 1809년에 말하기를 『14년간에 이 사람들은 역사상 일찍이 성공하였다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큰 성공을 하였다. 그들은 성경의 지식을 기독교를 모르는 세계에 널리 퍼뜨렸다』고 하였다.
윌리암 캐레는 1793년에 인도에 왔다. 사업비가 부족하고 인도인들의 의심을 받고 동인도회사로부터 선교사업하는 것의 반대를 받고-그래서 자기가 인도에 사는 것을 합법화(合法化) 시키려고 부득이 동인도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회사 일을 보는 한편 부지런히 뼁갈어로 신약을 번역하기 시작하여 1799년에 완성하였다. 그러나 동인도회사의 방해로 인쇄를 못하였다.
아무 도움이 없을것 같이 된 때에 윌리암 와-드와 짜슈아 마-쉬맨이 1800년 칼컷타에 도착하였다. 이 세 선교사와 그 가족은 그 때 정말(丁抹)영지이던 서람포어에 선교본부를 전하였다. 마-쉬맨 내외는 선교본부 비용을 만들려고 구라파사람들의 자녀들을 가르치는 학교를 시작하였다. 와-드는 인쇄기를 장만하고 인도인 철공으로 하여금 쇠 활자를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캐레는 자기가 번역한 신약을 다시 쓰고 고치고 하여 1801년에 출판하였다. 캐레의 어학적재능을 정부가 인정하게 되어 칼컷타에 있는 정부가 세운 대학에서 뼁갈어 교수를 하게 임명되었다. 이 교수직을 그는 30년 동안 가지고 있었다.
캐레는 인도에 있는 여러 방언들의 많은 수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는 쌩스크릿을 연구하고서 꾸자라티어, 마라디어, 힌두어와 같은 쌩스크릿에서 근본적으로 쪼개져 나온 방언들로 성경을 번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 용감한 선구적 선교사들의 사업을 후원한 단체들 중에는 런던 여관에서 1804년 3월 7일에 창설된 영국 성서공회가 있었다. 영국성서공회의 그 첫 사업은 서람포어에서 번역하노라고 애쓰는 이 선교사를 돕는 것이었다.
캐레와 그의 조수(助手)들은 놀랠만한 일을 하였으니 1813년 3월까지 인도의 중요한 방언들 중에 열 방언으로 성서를 번역한 그것이었다. 그 번역한 성경은 원고대로 있기도 하고 인쇄중에 있기도 하고 또 그 외에 번역 진행중에 있는 방언이 있기도 하다고 그들은 보고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3월 11일 밤에 인쇄소에서 불이 나서 반돈이나 되는 활자 만들 쇠와 수천 파운드의 종이와 성서 번역의 원고와 문법책과 자전이 말끔 타버리고 말았다. 마음 약한 사람들이었더면 서람포어 선교부는 문 닫았을 것이다. 그러나 캐레, 와-드, 마-쉬맨은 그렇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실패하였으나 실망하지는 아니하였다…길을 두 번째 가면 매우 쉽고 확실하게 갈 수 있다…우리는 잃어버린 번역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런 신앙과 사업에 대하여 기독교세계는 열심히 협조의 손길을 뻗치어 불난지 50일 이내에 영국에서는 영국돈 1만파운드의 의연금을 거둘 수가 있었다. 그 해 마지막에는 전것보다 두 배 되는 능력이 있는 인쇄소를 다시 지을 수 있었다.
1834년 캐레가 죽던 때에는 서람포어의 세 선교사는 44 방언으로 인쇄출판할 수가 있었다. 그 중에 36 방언은 캐레가 단독으로 번역하였거나 다른 사람과 같이 번역한 것이었다. 그는 자기 평생의 표어 『하나님을 위하여 큰 것을 경영하라. 하나님께로부터 큰 것이 올 것을 기대하라』가 실현된 것을 보고 죽었다.
서람포어 화재때 타버린 원고들 중에 하나는 총명한 젊은 선교사요, 어학자인 헤느리 마-틴이 힌두스탄어로 번역한 신약의 첫부분이었다. 마-틴은 1806년에 영국으로부터 인도에 도착하였는데 그것은 화재 7년전이었다. 그는 짧은 여섯 해 동안에 열대성 열병으로 괴로워하며 고칠 수 없는 폐병을 앓으면서도 우-두(힌두스탄)어, 파사어, 아라비아어로 신약번역을 완성하였는데 그런 어학적 천재는 선교사상 그 쌍을 찾을 수 없었다.
마-틴이 그 사업을 위하여 행한 준비는 가장 훌륭한 것이었다. 그는 희랍어와 히브리어를 캠부리즈에서 전공하였다. 그는 캠부리즈대학에서 래틴어 논문에 일등상을 받은 후 24세 때 그 대학을 졸업하였다. 마-틴은 아프리카와 동양에서 선교회의 후원하에 선교사업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재정적 파탄을 만나고 자기 누이를 부양(扶養)하여야 할 필요가 있고 하여 동인도회사 직원과 파견군(派遣軍)의 종군목사(從軍牧師)가 되어 인도로 왔다.
칼컷타에 도착한 마-틴은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받았다. 흉물스런 도금한 우상들과 웅장한 신전(神殿)들과 누런 빛 도포입은 제사장들과 기괴한 신상 앞에서 기도하라고 울리는 종소리에 모여드는 서글픈 예배자들을 보고 마-틴은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는 집에다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나는 지옥 변두리에 서 있는듯이 떨었다』그러나 그는 서람포어의 선교활동에서 인도의 희망을 보았다. 마-쉬맨과 캐레는 자기들의 사업을 위하여 이 청년이 얼마나 훌륭한 재질(才質)을 가졌는지 얼른 인정하고 자기들과 같이 일하자고 권하였다. 그러나 마-틴의 마음은 인도 내부 특히 회회교 지방으로 가려고 작정하였다.
칼컷타에서 마-틴의 설교는 열정과 회개시키는 능력이 어찌나 컸던지 당국자들은 그를 싫어하였다. 그래서 그를 파트나새 임지(任地)로 보내려 할 때에 칼컷타 관리들은 기뻐 보냈다. 파트나에는 요행수를 잡으려는 막 모아 놓은 군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종교에 흥미가 없었고 장교들은 이 양심적인 목사의 간섭을 싫어하였다. 쓸데없는 간섭과 반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틴은 한 달 동안에 소령 하나와 군인 여섯을 회개시켯다.
종군목사로서의 의무를 이행하는 시간 이외에는 우두어를 공부하여 얼마 아니되어 8백여명 청중에게 그 말로 전도할만큼 능난하게 되었다. 강한 회회교도들의 반대가 있는 이 지방에서 그만큼 많은 청중을 얻었다는 것은 놀랠만한 일이었다. 마-틴은 힌두스탄어만 공부함으로 만족하지 아니하여 파사어와 아라비아어도 연구하였다. 그는 이 모든 일에만 시간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자기 집 옆에 있는 아름다운 화원도 가꾸었다. 그 때 그는 젊은 여자 리디아 끄렌펠이 자기와 결혼하려고 인도로 올줄로 알고 있었다. 달마다 그 여자에게 간절한 편지를 하였으나 마지막에 거절하는 답장이 왔었다. 거절 편지를 받던 바로 그날 그는 의사에게서 만기폐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실연과 폐병 -이 두 무서운 절망적 사실을 당면하고도 그는 자기의 장래 희망을 부수거나 원대한 목적을 짓밟거나 하지 않고 도리어 더 용감하여졌다. 그는 파사를 여행하면서 파사어와 아라비아어로 신약번역과 그 수정을 완성하려고 비상한 긴박감(緊迫感)을 가지고 일을 하였다. 그러나 마-틴은 책 쌓인 방에 숨어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번역사업을 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용감하고 강력하게 전도하였다. 그가 유하고 있는 쉬라스에서 전도중 한 회회교도 변호사가 그에게 공개토론을 하자고 걸어와서 그는 곧 승낙하였다. 그 토론때 마-틴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회회교신학에 비추어 증명하고 그것을 작은 책자로 발행하였다.
그는 더 오래 살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1천5백마일이나 떨어진 컨스탄티노풀에 가려고 말을 타고 떠났다. 그는 거기서 배타고 영국으로 가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마-틴은 토이기 토갓까지 가지 못하고 거기서 ?1812년 10월 16일 더러운 마굿간에서 죽었다. 거기 여관에는 이 폐병 앓는 백인 여행자를 쉬게할 방이 없었던 것이다.
헤느리 마-틴은 6년간에 몇 사람이 60년간에 이룰 일을 이루었다. 그는 신약을 세 다른 방언으로 번역하였다-우두어(1814년 서람포어 인쇄소에서 발행), 파사어(1815년 로서아쎈트피털스벅에 있는 로서아성서공회 발행), 아라비아어(1816년 영국성서공회 발행).
모든 사람에게 『형제 숴리』라고 불리우는 이 사람은 1867년에 북경서 상해까지 9백마일 되는 거리중 7백마일을 도보로 걸어왔다. 그는 내버린 불교의 절을 사서 기독교 기도처로 고쳤다. 그러나 그는 급한 볼 일이 있어 상해로 오느라고 그것을 자기 친구에게 넘겨 주었다. 그의 친구 한 사람이 그에게 수산엠 와-링이라는 매력있고 총명한 젊은 여인이 유망한 문학적 출세를 단념하고 선교사교사가 되려고 중국으로 간다는 편지를 그에게 보냈다. 형제 숴리는 한번도 이 여자를 만나본 일은 없었으나 그는 이 여자야말로 자기가 혼인할 여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그의 생각대로 그 여자와 결혼하고 삼개월 후에 북경으로 돌아왔다.
사무엘 아이삭 ?세프 숴레슈스키는 혼인에서처럼 중국어를 배우는 데도 결정적이요 급속도적이었다. 1858년 그가 중국에 도착한지 18개월만에 중국어를 놀랠만큼 능통하였다. 그의 어학재조는 비상하여 로서아어, 독일어, 영어, 희랍어, 히브리어는 이미 다 통달하였다.
숴레슈스키는 1831년 로서아 리듀아니아에서 났고 로서아 지토미르에 있는 탈무드 토라와 뿌레슬로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1854년 미국에 도착후 뉴욕에 있는 어느 침례교 목사가 이 총명한 젊은 유대인을 기독교신자로 만들었다. 그 후 그는 펜실베니아에 있는 어느 장로교신학교(앨리개니에 웨스턴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858년 개신감독교에 들어가 중국 선교사로 보냄을 입었다.
모리슨의 영광스러운 번역은 학자들의 사용하는 문리체(文理體)로 되었다. 十九세기 중엽에 이르러 필요하게 된 것은 북경과 중국 각 지방에서 사용이 보급되어 가는 관화체(官話體) 중국어로 성경을 번역하여야 하게 된 것이다. 숴레슈스키는 신약을 관화체로 번역할 일곱 선교사 위원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 때 그는 구약전서 번역을 전부 맡게 되었다. 히브리어에 대한 그의 철저한 지식은 구약번역에 적임자였다. 1873년까지 전체 성경이 완역(完譯)되고 그 출판은 미국성서공회에서 하였다.
선교사업이 급속도로 발전하여 그 확장사업을 관리할 사람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1875년에 형제숴리는 상해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첫번 사업중 하나는 전문학교의 설립인데 이 전문학교는 중국에서 처음 설립된 학교다. 1881년에는 중국 민중중에 더 널리 사용되는 간이문리체(簡易文理體) 중국어로 성경을 번역할 필요를 그는 절실히 느끼어 감독으로 하여서 많은 의무를 면제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선교관리사업을 고만 둘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관리사업과 번역사업을 둘 다 함께 하려고 하였으나 이런 과중한 일을 행한 결과 그는 중풍병에 걸리게 되었다.
그는 21년간 바퀴달린 의자의 신세를 지고 손 하나만 겨우 움직일 정도요, 전신은 마비가 되었지만 그가 번역한 관화체 구약을 개역하고 전체 성경을 간이문리체로 번역하고 이 두 성경에 관주를 붙이고 몽고어 자전 편찬을 시작하였다. 간이문리체 성경을 『한 손가락 성경』이라고 별명을 붙이었으니 그것은 형제숴리가 자기 번역을 자기 타잎라이터에서 한 손가락으로 찍어낸 까닭이다.
열대 태평양 환초(環礁=고리 모양의 산호섬)의 짙은 푸른 숲밖으로 검은 살빛의 본토인이 나타났다. 미국 군인들이 재빠르게 돌따서며 총을 쏠새도 없이 그 본토인은 미국군인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손을 들고서 영어로 『나 예수 사람. 나 하나님 책 읽어』하고 외쳤다. 놀랜 군인들이 생각할 사이도 없이 그는 한 큰 검은 책을 읽고 있다. 이 사건은 미국군대가 오기 오래 전에 선교사들이 여기 벌써 와서 일한 증거다.
1819년 히람 삥감은 열두 선교사들과 함께 뽀스톤 항구를 배타고 떠났다. 그들은 하와이에서 일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태평양에 있는 20여개 섬에서 선교 사업을 행할 징검다리가 될뿐이었다. 기업심 많은 뽀스톤 고래잡이들은 매년 혼곶(남아메리카 맨 남쪽 끝)을 돌아 고래를 잡으려고 태평양으로 나아갔다. 고래 잡고 동양과 무역하는 일이 저 용감한 뉴 잉글랜드 남녀들을 위하여 태평양 섬들의 세계를 열어 놓는 동기가 되었다. 그들이 멀리 떨어진 태평양 전초기지(前哨基地)로 간 것은 무엇을 취(取)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려는 것이었다.
히람 삥감二세는 예일대학을 졸업후 자기 아버지의 본을 받아 낄버트군도로 갔다. 이 섬들은 국제적으로 날짜를 바꾸는 선의 서편이요 적도에서 몇 마일 북쪽에 있다. 거기서 그는 질병과 고독과 싸우면서 5년을 지냈다. 그 동안 그는 마태복음의 번역을 완성하였다. 그 원고를 호놀룰루에 있는 선교회 인쇄소로 보냈다. 삥감은 그 책이 오기를 열 석달이나 기다렸다. 열 석달후 배가 하나 호놀룰루에서 물건을 싣고 왔다. 그러나 그 물건 중에는 삥감이 고대하는 마태복음은 없고 그 대신 호놀룰루 인쇄소는 다른 일이 바빠서 삥감의 원고를 인쇄 못하고 그냥 돌려보낸다는 편지만 들어 있었다. 그런데 호놀룰루 사람들은 손으로 할수 있는 작은 인쇄기 하나를 보내었다. 그러나 삥감은 인쇄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는 여러가지 다른 할 일로 거의 기진 맥진하여졌는데 언제 인쇄를 배워가지고 마태복음을 인쇄할찌 실로 망단한 노릇이었다.
다음날 아침 파선한 선원들이 섬에 올라왔다. 그들 중에 일찍이 인쇄업 하던 사람이 하나 있었다. 한 달이 채 못되어 낄버트 섬 사람들은 마태복음을 자기들의 말로 읽을 수가 있게 되었다. 여러가지 많은 일 중에서도 선교사 삥감은 전체 성경을 깔버트 말로 번역하겠다는 그 목적을 잊은 일이 한번도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40년이 지나자 그 번역은 완성되었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는 족속이 또 하나 늘게 되었다.
번역사업은 『선교세기』가 지나갔다고 하여서 끝을 막은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널리 전파하여야 할 필요감이 깊어가고 또 그 출판은 그 전파의 필요감과 함께 절대 중요하게 됨을 따라 번역자의 의무는 더욱 더 중대하게 되었다. 『복음의 증인』의 수효는 자꾸 늘어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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