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선구선교사들의 고귀한 전통을 지금 실천에 옮기고 있는 남녀가 수백으로 셀수 있다. 현대 번역자 중 대표적인 어느 한 사람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다면 매우 유조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없다. 각 번역자들은 서로 다르기가 낮과 밤이 다른 것과 같다. 전문적으로 번역과 학구적 저작에 종사하는 『서재의 사람』은 몇이 아니되고 대개는 바쁜 전도인들로서 그 전도사업의 바쁜 시간을 비어, 오는 주일에 사용키 위하여 어떤 성경 단편을 번역하거나 혹은 민중의 중대한 육체적 요구를 도와주는 바쁜 시간이 지나간후 사람들에게 육체적 요구보다도 그 신령한 요구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한 까닭에 한밤중 어른거리는 등불 밑에서 성경의 어느 부분을 번역하는 선교사 의사들도 있다. 어떤 성경 번역자들은 신학자, 어학자, 인류학자등 뚜렷한 학자들이 되어서 그 하는 사업에 성경연구의 풍부한 해석학적 보배를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최소한의 수양 밖에 없이 그리스도께 열렬한 헌신을 하고 전도의 필요 때문에 생명의 말씀을 알지못하는 방언으로 번역하는 일에 평생을 바친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문제들을 풀려고 애쓰며 앞으로 서술될 여러 장에서 뵐 가장 인상 깊은 일들을 경험한 남녀들의 생애를 살펴보기로 하자.
에프레인 S 알폰스는 감리회 선교사의 작은 배를 조종하여 파나마의 동북해안을 따라 위험한 모래톱 바다를 지나 물 밑을 알 수 없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이 밸리엔테 홍인종 촌락들중 어느 촌락에서 선생노릇을 하시면 어떻겠소?』하고 그 선교사는 이 배 부리는 사람에게 물어 보았다. 에프레인은 잠시 동안 『용감』과 『호전(好戰)』이라는 뜻이 있는 『밸리엔테』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 이 영악하고 사나운 족속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았다. 게다가 그는 그들의 말을 모르고 그들은 서반아어를 모르지 않는가? 그러나 이 선교사와 맺은 그의 우정과 또 예수 그리스도께 바친 그의 충성으로 말미암아 자기 동네 뽀카스 뗄 토로에 가까이 사는 이 버림을 받은 족속을 위하여 무엇을 꼭 하여야 하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흑인종 청년 에프레인은 열아홉살에 이 선생 직분을 맡고 홍인종 촌락중 한 촌락에 가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이 운하에서 일하려고 파나마에 와서 살게 된것이다. 밸리엔테 백성이 자기를 먼저 가르쳐 주지 않으면 자기는 그들을 가르쳐 줄수 없는 것을 그는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밸리엔테 말로 의자, 긴 걸상, 나무, 집, 사내아이, 계집아이, 배, 삿대를 무엇이라 하는지 배우려는 것으로 학교의 첫째 날을 시작하였다. 다음에는 복잡한 동사들을 배우노라고 시간을 썼다. 그는 어떻게 현재, 과거, 미래를 분간할 것인가? 이것은 백묵을 땅에 떨어뜨리고 아이들이 말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들음으로 배웠다. 그 말은 하루에 다 분석할 수 없었고 일년에 충분히 배울 수가 없었다. 누구든지 자기가 모르는 말 한 마디를 가르쳐 주는 사람에게는 오전 한푼씩 주기로 하였다. 어휘를 철저하게 알려고 그는 어떤 말의 뿌리가 될 수 있게 자음과 모음을 할 수 있는대로 여러 가지로 붙여놓고 노인들에게 어떻게 붙여 놓은 것이 뜻이 있고 그 뜻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알폰스는 밸리엔테족과 열 두해를 같이 살면서 그들의 전설과 역사를 알게 되었다. 이 경험으로 그는 그 말을 글로 쓸 수 있도록 만들게 되고 두 복음을 그 말로 번역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더 수양을 받아야 하겠어서 신학교로 갔다. 거기서 그는 철저한 희랍어 신약학도가 되었다. 마침내 그는 성경번역에 상당한 자격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일찌기 서투르게 번역한 복음들을 수정하고 다른 복음들의 번역을 완성하였다. 원고가 마지막 다 되었을 때에 그의 윗사람중 한 사람이 그 원고를 옆으로 밀어놓고 더 중요한 일을 하라고 권고하였다. 어떠하던 그 원고는 성서공회가 출판하였다.
후에 짜마이카에 목사 요구가 있게 되어 알폰스는 밸리엔테 사업을 계속할 사람을 찾는다는 조건하에 그 섬의 큰 교회중 한 교회의 목사로 초청함을 받아 갔다. 그러나 몇해가 가도 밸리엔테로 가서 자라나는 교회의 요구를 수응하면서 거기 살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알폰스는 가족을 데리고 파나마로 다시 왔다. 현재 그는 밸리엔테족을 위하여 목회를 계속하고 있다. 그는 다른 세계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 족속을 지도하기 위하여 여러해 동안 일하였다. 그가 처음 거기서 일을 시작할 때에는 두가지 복음 밖에 번역이 되지 아니하였었으나 지금은 그 배나 되는 복음이 번역되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입원치료할만한 심한 심장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폰스는 신약전서 남은 부분의 번역을 추진하며 밸리엔테 부락들을 심방하며 학교와 교회 다섯을 인도하며 캐리비안바다 연안(沿岸)의 여러군데 영어하는 교회들과 서반아어 하는 교회를 돌보아주며 바쁜 생활을 계속하였다. 서반구에서 일하는 모든 선교사 번역자들 중에 하나님의 겸손한 종인 이 흑인만큼 본토인의 말을 풍부하게 사용한 이는 적을 것이다. 그는 피로할줄 모르고 이 백성을 위하여 일하고 있다.
에디오피아의 큰 산들로부터 누바고지(高地)까지 뻗은 끝 없는 진퍼리가 있다. 그 가운데로 흐르는 나일강 언덕에 깃들인 항구가 하나 있는데 그 이름은 말라칼항구다. 그 항구부두에서 벌거숭이 띵카 인부들과 이야기하면서 열대에서 입는 반쓰봉을 입고 서 있는 작달막한 사람이 하나 있다. 이 키 작고 겸손한 오스추렐리아 사람은 키 크고 건방져 뵈는 띵카족이 사는 어디를 가든지 친구를 많이 얻는다. 그는 30년 동안 띵카족 중에 살면서 그들 몸의 병을 고치는 의사로하여, 그들의 영혼의 병을 고치는 전도인으로 하여 그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 의사의 이름은 추루딩거 박사다. 그가 띵카족 중에서 그 사업을 시작할 때에는 아무도 띵카어의 복잡한 음조(音調)와 무수한 모음(p.24-25)을 분석하여 본 일이 없었다. 같은듯 하기도 하고 다른듯 하기도한 모음의 미묘한 변화가 음조의 세미한 변화로 인하여 외부 사람들이 띵카족과 접촉하는데 큰 방해를 입었다. 게다가 띵카족은 외부 사람들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싫어 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활 방법이 외부 어디서 수입된 생활방법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또 그들의 잘 만들어진 종교적 사회적 구조에 대한 자랑이 커서 복음이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추루딩거박사는 띵카족 중에 몇몇해를 살고 있었으나 신자 하나 얻지 못하였다. 띵카족은 아무도 자기 조상때부터 위해오는 신들 대신에 예수를 위하려고는 아니하였다. 추루딩거의사는 풀로 이은 지붕밑 흙으로 지은 집 안에서 한번에 몇 주일씩 혹 몇 달씩 지내었다. 그런 때는 그는 그 집 안에 소를 두게 만든 방에서 소를 지키는 사람들과 같이 쇠똥불을 가운데 두고 둘러누워 자고는 하였다. 그는 그들의 병과 헌데를 고쳐주며 그들이 자기 조상들의 영웅적 행동을 한 이야기와 사자와 싸우던 이야기와 나쁜 귀신들을 물리치던 주문 회던 이야기를 밤마다 하는 것을 듣고 그들의 방언을 배웠다. 마침내 그는 방언을 터득하게 되고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그들에게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더욱더욱 하였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을 하나님께 화목시키려고 오신이라고 그는 이야기하였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몇이 아니되었다. 그러나 얼마 아니되어 하나 둘 그의 전도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몇 달씩 혹은 몇 해씩 인류의 구주에게 돌아오는 사람이 하나도 없이 허송세월할 때도 있었다. 비 아니 오는 절기에 내려쬐는 햇볕에 볶는것 같은 더위, 장마철에 끝없는 진퍼리의 습기와 무더위, 그리고 사나운 모기떼의 무서운 공격-이런 중에서 그는 낙심 아니하고 계속하여 일하였다.
『참(추루)』박사 (그의 친구들은 그를 참 (추루)박사라고 불렀다)는 어름어름 일하기를 싫어하였다. 그는 그 의학적 훈련으로 철저히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는 어학을 연구하는 데도 철저히 하려고 하였다. 그는 자전을 만들었는데 각 단어의 뜻을 자세하고 철저하게 분석 해명하였다. 그는 단어의 음조를 아주 정확하게 기록하였다. 그는 문법을 만들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희귀한 말 순서와 그 사용법이 이상한 동사와 형용사를 깨달을 수 있게 하는 편의를 이바지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띵카족 닝곡방언으로 신약을 전부 번역하였다. 약이 효력을 내려면 사람 몸안에서 동화(同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추루딩거박사는 잘 안다. 그는 번역도 그렇다고 생각하였다. 바울서신중 가장 어려운 부분들을 그는 분명하고 쉽게 만들어서 띵카족은 바울이 자기들을 위하여 편지를 쓴 것처럼 깨끗이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어떤 선교사들은 사복음만 가르침으로 족하게 여기는데 그는 그렇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추루딩거 박사는 며칠 혹은 몇 주일씩 띵카 신자들에게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 있는 것 같은 영적생활을 가르쳐 주었다. 만일 이 편지들 속에 있는 것 같은 바울의 교훈이 그때 새로이 우상과 사교(邪敎)에서 벗어나온 소아세아 교회들에게 중요하였었으면 현재 그와 같은 형편에 있는 띵카교회에는 얼마나 더 중요치 아니하랴?
근자에 어느 띵카교회 집회때 자습(自習)하여 성경읽기를 배운 한 젊은 지도자가 다음 말로 자기 간증을 끝내었다-『나는 하나님과 주 예수를 믿는 내 믿음을 결코 버리지 않겠읍니다. 누가 내게 말하기를 「네 믿음을 버려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를 죽이겠다」하여도 나는 「나를 죽이고 싶으면 죽이시오. 내 주는 내 목숨보다 더 귀하십니다」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간증에는 사랑을 받는 추루딩거 박사가 자신을 잊은 사랑과 헌신으로 인류의 구주를 가르친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번역자들은 대개 개인주의자들이다. 그러나 끄레고리오 촉과 쩌스티노 치습은 같이 손맞게 일을 하여 성경번역 사업에 가장 잘 된 협력을 뵈였다.
몇해 전에 복음들과 사도행전이 페루와 뽈리비아 고원지대에 사는 홍인종 백만명이 사용하는 말인 아이마라어로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 초기 번역은 수정하여야 할것이 많았고 또 늘어가는 신자들을 위하여 신약 다른 부분의 번역도 필요하게 되었다. 본토인들과 선교사들로 번역위원이 조직되었다. 위원의 거지반이 수도 라 파즈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수도 라 파즈 본토인 부락에서 사용하는 다소 나빠진 아이마라어를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무없고 바람 거센 들에 여기 저기 있는 무수한 촌락에서 사용하고 있는 말에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아니하였던것 같다. 그래서 부적당하고 불확실한 번역을 반대하는 끄레고리오와 쩌스티노 같은 사람들의 항의에 아무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다.
교정인쇄물이 끄레고리오와 그 동역자에게로서부터 성서공회에 도착하였는데(다른 위원들은 자기 일에 바빠서 그 교정물을 들여다 볼 틈이 없었다)거기는 철자와 글자의 순서와 말 사용법들을 고친 것이 육백여 가지나 있었다. 그 번역이 잘못된 것은 분명하다. 끄레고리오와 쩌스티노도 상심이 되었다. 그들은 그렇게 많이 고치려 아니하였으나 그렇게 고치지 아니하여 가지고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으니까 부득이 고치기는 고친 것이다. 그 첫 번역은 서반아 성경의 축자역인데 아이마라어로 알아들을 문장이 되려면 동사가 마지막에 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서투른 번역을 읽을 때면 씨스코 노인과 같은 사람들은 졸고 만다. 씨스코 노인은 아주 솔직하게 말하기를 『나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는 수가 없어서 졸고 맙니다』하였다.
모든 것을 다 고칠 기회는 오고 말았다. 끄레고리오와 쩌스티노는 이 성경을 아이마라 본토인들이 말하고 쓰는 법대로 번역하라는 부탁을 받았다. 사상은 이 본토인들이 잘 아는 서반아적이나 그 말은 이 본토인들이 어릴 때부터 써 온 말이어야 할것이다.
끄레고리오와 쩌스티노는 세계에서 가장 항해(航海)에 좋은 티티카카호 언덕에 있는 꽈타자라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요 학교선생이다. 여러해 전에 어느 부자 이태리 여행자가 넓은 고원 농장에 있는 경제적으로 노예가된 홍인종들의 무참한 생활 형편을 보고 마음에 움직인바 있어 돈을 뽈리비아에 적립하고 어떤 책임 질만한 단체가 생기면 그 돈을 가지고 농장을 하나 사서 그 홍인종들을 해방하여 이 농장에서 살게하고 자유하는 사람이 될 기회를 주게 하라고 하였다. 마침내 가나다 침례회 선교부에서 이 책임을 맡고 꽈타자라의 사태난 농장을 하나 샀다. 얼마 아니되어 학교가 생기고 약국이 열리고 개량 농사법을 가르치는 농장이 세워지고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몇대를 내려오며 빚때문에 종노릇하던 형편에서 해방되고 복음은 호수 갈밭 언덕에 깃들이고 있는 촌락에 전도되게 되었다.
끄레고리오 촉과 쩌스티노 치습은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졸업하고 근처 촌락에 있는 학교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하였다. 이 두사람은 그 슬기로운 마음과 솔직한 태도와 현명한 지도능력으로 학교와 교회에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들은 신약 개역을 위하여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은 정지하게 되었다. 그들은 날마다 책상을 가운데로 마주 앉아서 개역을 하였다. 끄레고리오가 원고를 읽으면 쩌스티노는 서반아어와 대조하였다. 그리고는 그들은 서로 각 구절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그것이 말의 정당한 순서인가? 그 대명사는 누가 말을 하는 것인지, 누구에게 말을 하는 것인지 분명한가? 만일 분명치 아니하면 그 뜻을 분명케 하기 위하여 대명사 대신에 명사를 쓰는 것이 좋지 아니할까? 호수 저 편 페루에 있는 사람들도 이 말을 알수 있을까? 이런 표현방법을 뽈리비아 아이마라족만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종류의 의문을 묻기도 하고 대답하기도 하였다. 그 지방 목사 모데스토 아리아가와도 여러번 상의하고 선교사들에게도 가서 전문적 방면과 아리송송한 뜻에 대하여 도움을 얻기도 하였다.
여러 달의 철저하고 근실한 번역을 한 후 그들은 그 민족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과 말투로 번역된 성경원고를 미국 성서공회로 보낼 수가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말로 신약을 개역하는 특전을 입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편지도 그 원고와 함께 보내었다. 이것은 사랑의 봉사요, 감사의 빚갚음이었다. 찌스티노가 그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우리에게 복음이 들어온 후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동네에 사시는 것 같이 되었읍니다.』
짜바 동쪽에 관광지로 유명한 빨리섬이 있다. 이 섬에는 원시적 자연미와 완고한 보수주의가 섞여 있다. 섬 사람들은 회회교 영향을 물리치고 인도의 옛날 종교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 지방 통치자들의 완고한 반대 때문에 빨리의 선교 사업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런데 기독교 선교연맹의 후원 밑에 중국인 선교사 한 사람이 1932년에 빨리에 있는 중국인들에게 전도하러 들어가자 문은 열리게 되었다. 빨리 부녀자중 몇이 복음을 받게 되었으나 이 선교사는 물러나가지 아니하면 아니되게 되었다. 그래도 그가 거기서 떠날 때에는 구주 예수를 믿는 사람이 8백명쯤 되었다.
빨리백성 특히 기독교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기 위하여 화란성서공회는 그 가장 유능한 성서번역자 쩨 엘 스웰른끄레벨 박사를 보냈다. 스웰른끄레벨 박사는 여러해를 이 사업을 위하여 준비한이다. 이 키 크고 금빛머리 가진 화란 사람이 그 二十대에 받은 수양은 래틴어, 희랍어, 영어, 불란서어, 독일어를 포함하는 화란에서 보통 받는 대학 교육뿐 아니라 고전 아라비아어, 쌩스크릿어, 짜바어, 마래어, 비교 인도네시아어도 배웠고 수마추라에서 쓰이는 빠타어와 중앙 쎌레베스에서 쓰이는 빠리어에 대한 연구도 하였다. 그는 또 문화인류학에 대한 철저한 준비와 상고 짜바와 빨리인의 문화도 연구하여 빨리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말로 번역하는데 충분한 준비를 하였다.
빨리민족은 빈약한 몇가지 문화적자산만 가진 원시족이 아니다. 그들의 생활의 복잡성은 풍부한 어휘로 나타내고 또 오란 사회에서 볼수 있는 사회적계급으로 반영되어 있다. 특별한 말과 형식이 많은데 이것은 다 중요한 사회적계급을 뵈는 것이다. 성경을 빨리족에게 주는 것은 풋내기의 할 일이 아니었다. 상고 빨리와 짜바족에 대한 연구는 스웰른끄레벨 박사의 박사논문인데 레이든대학에서 이를 받아주었다. 그의 이런 지식은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맡기신 이 사업을 성공하는데 중요할뿐 아니라 이 복잡한 번역을 완성하는데 매우 실제적 도움을 받는데도 필요하였다. 스웰른끄레벨 박사가 빨리어로 말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필요할뿐 아니라 빨리의 풍부한 문학적 전통을 알며 적당한 자전을 만들며 말과 글귀들의 민족학적 배경을 연구하며 종교적 의식과 사회적 습관이 근본적으로 섞여짜진 빨리 사회의 치밀한 종교생활에 관계되는 말들을 알 필요도 있었다. 첫 5년간은 이 기본적이요, 중요한 일에 전심전력하였다. 그러자 일본침략군(日本侵略軍)이 와서 그가 5년간 공들여 놓은 말의 조사표를 말끔 파괴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스웰른끄레벨 박사를 씽가포어의 포로수용소로 잡아가고 그의 가족은 짜바에 있는 강제노동소에 가두었다. 스웰른끄레벨 박사는 다섯해를 일본 포로수용소장의 학대를 받고 지냈다.
전후 가족과 다시 만나 화란에 있는 자기 집에서 잠깐 쉬고 그는 빨리로 돌아와서 번역사업을 다시 시작하였다. 둘째번에는 일이 속하게 진행되어 3년쯤 지나니 조사표 카-드 상자가 열 다섯이나 되었고 누가복음 번역은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는 또 빨리를 떠나지 아니하면 아니되게 되었으니 이 때는 거기 정치적문제가 복잡하여 본토 교회에 외국인이 같이 있지 아니하는 것이 좋겠어서 떠난 것이다. 그는 짜바에는 있을 수 있어서 거기서 신약 번역을 계속하였다.
캔델라리아 카말고는 보통 의미의 성경번역자는 아니었다. 그 여자는 많은 다른 본토인 기독교 사역자들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자기 족속의 말로 옮겨 써 놓기를 원하였다. 캔델라리아는 쭈닌 골짜기에 있는 퀘츄아 홍인종이다. 이 쭈닌 골짜기는 서반아 통치로부터 신세계(新世界)를 해방시키는 가장 결정적인 전쟁중 하나의 전쟁이 있었던 곳이다. 이 골짜기에 있는 백성중 많은이들이 아직도 무식의 노예가 되어 있다.
캔델라리아는 그의 어렸을적에 이 황량(荒凉)한 골짜기를 찾아 와서 모든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들려 주는 권서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듣고 믿었다. 그녀의 사납고 완고한 아버지는 그녀의 예수 믿는 것을 몹시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의 핍박과 위협이 심하였어도 그녀는 마침내 세례를 받고 그곳 교회의 한 지도자가 되었다.
캔델라리아의 얼굴은 엄숙하고 콧날이 서고 모졌다. 그녀의 머리는 굵고 거칠며 검은데 그것을 뒤로 빗겨젖친 것 때문에 그의 얼굴 모습을 쭈닌고원지대를 둘러선 뾰죽뾰죽한 산봉오리들 모양으로 툭 나오게 하고 얼음 있는 산고개에 얼어 붙은 땅처럼 무뚝뚝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그녀의 웃음에 풍기는 즐거움과 그녀의 인자한 눈에 드러나는 다정함은 그녀의 동정 깊은 마음과 사심(私心) 없는 영혼을 발뵌다.
그녀의 사는 동네 교회의 목사는 얼마 있지 못하여 그 아내가 죽고 그 아이의 건강이 좋지 못하여 거기를 떠났다. 캔델라리아는 그 목사가 떠난후 혼자 농장들과 광부들 사는 캠푸들과 재목 베는 지대 더 위에 있는 산간 촌락들에 흩어져 사는 신자들의 영적요구를 돌보아주는 일을 맡게 되었다. 한번은 그녀는 스물 일곱 교회의 오직 하나인 전도자였다. 스물 일곱 교회중 열 교회는 그녀 자신이 세운 교회들이었다. 그녀가 신자 가정을 심방하려면 1만5천척이나 1만6천척 되는 높은 산을 넘으며 눈과 비를 무릅쓰고 도보로 걸어 다녀야 하였다. 그녀가 이런 험한 길을 걷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녀 자신과 신자들을 위하여 하실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려는 열심에서였다.
그녀의 수양이라는 것은 해마다 있는 사경회와 그 지방을 가끔 지나는 선교사들이나 다른 목사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서반아어로만 듣는 전도에 도무지 만족할 수가 없었다. 쭈닌에 사는 많은 퀘츄아 사람들은 서반어 말을 모르고 또 그들의 말은 다른 족속의 말과 달라 다른 족속의 말로 번역한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캔델라리아의 설교와 가르침은 먼저 성경을 서반아어로 읽고 그리고 그 읽은 것을 자기 동족에게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의 하는 것이 얼마나 부적당한지 깨달아 알았다. 그런데 어떤이가 그녀의 동족이 쓰는 말을 할 수 있는대로 서반아말 알파베트를 사용하여 기록하고 그리고 그 퀘츄아어의 특별한 음조를 기록하기 위하여 가외의 부후(符號)와 연결법을 사용하는 것을 그녀에게 가르쳐 줄 때 그녀는 무척 기뻤다. 그녀보다 서반아어를 더 잘 아는 자기 동생들의 도움을 받아 그녀는 쭈닌말로 신약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그녀가 하는 일에 필요한 것은 누가 그녀를 지도하여 주어야 할 일이었다. 그녀가 거기서 일하는 중에 몸에 병이 생기고 고된 일에 낙심이 될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꾸준히 일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쭈닌골짜기 신자들도 그들의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질수 있게 되었다.
참된 번역자의 과업은 무슨 대상과든지 자기 자신을 동일히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종인 그는 자기를 그리스도와 동일히 보아야 할것이다. 번역자인 그는 자기를 그 말씀과 동일히 보아야 할것이다. 선교사인 그는 자기를 선교지 백성과 동일히 보아야 할것이다. 서전 선교사 쩨 에이 필슨목사는 남부 아프리카 쏴족속과 모삼빅족속 중에서 선교하고 있는데 그는 자기가 일하고 있는 그 땅 백성과 자기를 어떻게나 똑 같이 보았던지 안식년으로 그가 거기를 떠나게 되어 전별회를 하는데 그 자리에서 한 쏴 사람이 일어나 어느 백인이나 아프리카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칭찬의 말을 하였다-『필슨목사는 살 가죽은 희지만 그의 마음은 우리의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검습니다.』번역자가 그 민족을 위하여 번역하려는 소원이 있으면 그 민족의 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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