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그리스도교 선교사가 이 땅에 발을 붙이게 된 것은 멀리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선조(宣祖) 25년(서기 1592)에 일본 막부(幕府)의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조선 침략군을 보내었다. 이것이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9권(15만 8천 7백명)으로 나누어 소서행장(小西行長)이 거느린 제군(1만 8천 7백명) 가운데에는 18,000명의 그리스도교 신자가 있었다 한다. 소서행장 자신도 로마 구교(Roman Catholic)신자였다. 소서는 신자 군인들을 지도하기 위하여 주교(Priest)에게 지도자를 청구하였다. 그리하여 선조 27년(서기 1594) 봄에 예수회(Jesuits)파의 구교 선교사 그레고리오.데.쎄쓰페데쓰(Father Gregorio de Cespedes)와 한 일본 사람 신자가 와서 두달 동안만 있었다.(딸레의 한국 천주교사) 그러나 그가 일본 군인을 위하여 와서 그처럼 짧은 기간에 돌아갔으므로 우리 나라 사람에게 그리스도교 지식을 끼치었거나 이 나라 사정을 구라파에 전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백낙준 박사의 “한국신교사”, 곧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32-1910, 1929, 평양 숭실대학 판 참조). 쎄쓰페데쓰가 오기 전인 선조 15년(서기 1582) 3월에도 서양사람 마리이(馬里伊)란 이가 제주도에 표착한 것을 중국에 넘긴 일이 있었다.
또 선조 말년 즈음에는 영국 배가 전라도 흥양(興陽)에 왔다가 물러간 일도 있었다. 인조(仁祖) 6년(서기 1628)에는 화란사람 벨트브레(Weltevree, 朴燕이라 부름. 혹은 淵, 또는 延으로 적기도 함) 이하 세 사람이 표착(漂着)되어 서울에 들어 온 일이 있다. 그 세 사람은 조선에 억류(抑留)되어 오래 살았다. 훈련도감(訓練都監)에 배속(配屬)시키었었는데 그 중 두 사람은 인조 14,5(丙子, 丁丑)년 즈음에 호란(胡亂)에 나아가 싸우다가 명예의 죽음을 이루고 오직 벨트브레만이 살아 남아서 하멜 일행이 들어 왔을 때 그들을 위하여 통역자 또는 지도자 노릇을 하게 되었다. 쎄쓰페데쓰가 구교 신자로서 맨처음 온 사람이라 한다면 벨트브레는 신교 신자로서 맨처음 온 사람이라 하겠다. 그는 우리 나라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 딸 각 한 사람씩을 낳았으며 그는 늘 선악 화복을 말하고 “천보”(天報)를 말하여 도(道)가 있는 사람 같다 하였다.(鄭載崙 “休居漫錄” 卷二, 成海應 “硏經齊全集” 卷五十六, 李德懋 “雅亭遺稿” 卷五, 尹行恁 “碩齊稿” 卷九, 金錫翼 “耽羅紀年” 卷二들 참조). 그는 본국에서 고려 사람은 사람의 고기를 구워 먹는 풍속이 있다고 들었었는 고로 제주도에 왔을 때 지방 관원이 해질 무렵에 햇불을 켜가지고 심문하러 옴을 보고 자기를 구우려 함이라고 통곡하였으나 나중에 이것이 잘못된 생각임을 깨달았다는 이야기도 하였던 모양이다. 오늘도 그 자손이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또 그의 전도(傳道)로 신교신자가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효종(孝宗) 4년(서기 1653) 8월 15일 밤에 화란의 동인도 회사(선조 35년, 서기 1602창립)의 상선 “스파르웨르”(Sperwer, Sparwehr)호가 제주도 근해에서 파선되어 그 배의 서기 하멜(Hendrick Hamel)이하 36명이 제주도에 표착되었다. 그들은 그해 1월에 화란을 떠나 빠타비아(Batavia)와 대만(臺灣)을 거치어 일본의 장기(長崎)로 가던 도중에 이같이 제주도 근해에서 파선을 당한 것이었다. 하멜 일행은 전부 64명이었는데 파선으로 28명이 죽고 36명이 살아남아서 제주도에 표착한 것이었다. 제주도 관원에게 잡히어 다음해(서기 1654) 5월 그믐께 서울로 보내어 오게 되었다. (李丙燾博士 번역 “하멜 漂流記” 원본 1668, 번역본 4287, 백낙준 박사의 전기 신교사 참조) 그들은 14년동안 우리나라에 머물러 살았다. 효종 7년(서기 1656) 3월에 다시 전라도로 귀양보내어 작천(鵲川) 병영에 감금하였다가(거기서 14명이 죽고 22명이 남음) 현종 4년(서기 1663) 2월에는 다시 여수(麗水) 좌수영에 12명, 순천(順天)에 5명, 남원(南原)에 5명씩 나누어 두게 되었다. 현종 7년9서기 1666) 9월에 여수 좌수영에 있던 하멜 이하 8명이 밤에 탈출(脫出)하여 바닷가의 한 배를 잡아 타고 일본 장기(長崎)로 도망하였다. 거기에서 화란 사람의 도움으로 그해 10월에 장기를 떠나 빠타비아를 거치어 1668년(현종 9) 7월에 본국(화란) 암스텔담(Amsterdam)에 돌아간 것이다. 하멜은 이 사실을 그의 “화란 배의 제주도 해변 파선기”란 저서로 발표하였다. 그 뒤에 “조선왕국”이란 제목으로 우리 나라의 지리, 풍토, 산물, 정치, 군사, 법속, 종교, 교육, 무역, 기타에 대하여 14년 동안 친히 겪고 보고 들은 바를 적어 소개하였다. 이는 한국에 왔던 서양 사람으로서 가장 처음 한국을 서양에 자세히 소개한 것이다. 그들의 화란 나라는 신교(新敎)의 나라인만치 14년동안 그들이 접촉한 한국사람에게 그리스도 교리를 소개하였으리라고 믿는다. 또 그때 직접 신자가 생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하멜의 저서가 불란서 말, 독일 말, 영어들로 번역 출판되고 판을 거듭하여 서양사람의 한국에 대한 새 지식을 넣어 주었으므로 선교사들이 많이 와서 전도하게 한 원인이 되었으리라고 믿는다.
우리나라에 그리스도교가 맨 처음으로 든든히 뿌리를 박게 된 것은 천주교(구교, Roman Catholicism)다. 불란서의 딸레(Ch. Dallet)는 두 큰 책으로 된 “한국 천주교 역사”를 썼다. 이는 17세기에 대한 그 기원(起源)으로부터 1866년(고종 3년 丙寅)까지 한국에 대한 천주교의 시작으로부터 발전의 완전하고 광범한 유일한 기록이다. 헐버트(H.B.Herbert)의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 2 Vols), 롱포드(J.H.Longford)의 “한국사화”(The Story of Korea), 께일(J.S. Gale)의 “한국 백성의 역사”(A History of the Korean People in the Korea Mission Field (Seoul) from July 1924 to Sept. 1927), 그리피쓰(W.E. Griffis)의 “숨은 민족의 한국”(Corea, the Hermit Nation)들이 다 그 제목에 대하여 이것을 근본 자료로 썼다.(백낙준박사의 “신교사”참조)
이탈리아 사람이요, 예수회(Jesuits) 선교사인 마티우 리치(Matthieu Ricci, 중국이름 利瑪竇)는 1601년(선조 34)에 북경(北京)에 와 있었다. 그는 서양 과학, 특히 수학과 천문학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궁정과 그 도시 인민들에게 큰 인상을 주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 임금은 중국 임금에게 답례와 선물을 드리려고 사신을 북경에 보냄이 연례(年例)의 일이었다. 이 사신의 일행 중 어떠한 사람은 리치와 그 후계자들과 사귀게 되었다. 1631년(인조 9)에 이러한 사신의 일행의 한 사람인 정두원(鄭斗源)은 많은 과학책들과 권총 한 쌍, 망원경, 다른 서양 생산품을 리치의 “하늘의 주님의 진리”(True Doctrine of the Lord of Heaven)에 대한 책과 함께 가지고 왔다. 정조(正祖) 원년(서기 1777)에는 정약전(丁若銓), 권철신(權哲身)같은 저명한 두어 학자들이 이 새 교리에 취미를 가지게 되고 그 책들의 교훈을 실행하기 시작하였다. 이 벽(李蘗), 권일신(權日身), 이가환(李家煥), 정약종(丁若種), 정약용(丁若鏞)들 같은 당시의 쟁쟁한 학자들도 이 새 교리(天主學) 연구에 열중하다가 학문에서 신앙 실천으로 옮기게 되었다. 정조(正祖) 7년(서기 1783) 겨울에 이승훈(李承薰 평택 현감)이 연경(燕京)가는 사신의 서장관(書狀官)인 그의 아버지 이동욱(李東郁)을 따라 연경(북경)에 갔다가 여경 남교 회당을 찾아 포튜갈 사람 주교(主敎) 구베아(Alexendre de Gouvea, 湯士選)를 만나 세례를 받고 피에르(Reter, 伯多綠)라는 세례 이름을 받았을 뿐 아니라 교서(敎書), 십자가(十字架), 성패(聖牌), 기하원본(幾何原本), 수리정온(數理精蘊) 망원경(望遠鏡), 지평표(地坪表)들의 과학 서류와 그밖에 진기한 서양 기구를 얻어 가지고 그 다음해(정조 8, 서기 1784) 봄에 돌아왔다. 그 세례 이름을 피에르(=베드로)라 함은 한국 교회의 첫 반석(주초 돌)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이승훈은 귀국한 뒤 그의 친구 이득조(李得祚?)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들은 곧 열심히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점점 신자들은 늘게 되었다. 신자의 수가 서울에서 늘 뿐 아니라 각 도에도 퍼지게 되었다. 18세기 후반에는 특히 황해, 강원 지방에 성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교도에 대한 시기와 박해는 일어나게 되었다. 정조 9년(서기 1785) 3월에 이 벽,이승훈,정약전,정약용,정약종,권일신등 수 십명이 김범우는 잡히어 첫 희생이 되었다. 곧 그는 조상의 위패를 태워 버리었다는 죄로 고문을 당하고 외로운 섬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그는 거기서 고문으로 인한 상해로 죽었다. 첫 순교자가 생김과 동시에 배교자들도 생기었다. 김범우 밖의 사람들은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징계만 받고 말았으나 이 기회로 천주교는 엄히 배척을 당하게 되었다. 다음 해(정조 10년) 정월에는 북경에서 교서 사들임을 금하게 되었고 그 다음 해(정조 11)에는 이승훈,정약용,강이원(姜履元)들이 반촌(泮村, 성균관 소속 부락)의 김석대(金石大)집에 모이어 교서를 강습하던 것이 드러나 천주교 탄압이 더 심하여졌고 그 다음해(정조 12) 8월에는 서울과 각 도에 명령하여 서학(西學=天主敎)의 책들을 모아 불사르게 하였다. 그러나 천주교는 점점 번성하여 갈 뿐이었다.
정조는 당파 싸움에 “탕평”(蕩平)정책을 쓰는 터라 천주교에 대한 주자학파 조신(朝臣)들의 반대론에 대하여도 완화정책을 취하여 이를 남인인 영상(領相) 채제공(蔡齊恭)에게 처리를 맡기었다. 채상은 신자들 중에 유력한 남인(南人)이 많으므로 채상도 미온적 태도를 취하게 되매 주자학파(朱子學派)들은 더욱 완강히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정조 15년(서기 1791) 여름에 호남 진산(珍山)군 교도 윤지충(尹持忠), 권상연(權尙然-지충의 외제) 두 사람이 있었는데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하매 신주를 없애고 천주교식으로 제례를 지내었다는 소문이 서울에 들리게 되어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에게 윤지충과 그와 행동을 같이한 권상연 두 사람을 잡아 심문하라 하였다. 그리고 사회 도덕을 문란하게 하고 아비도 어미도 없는 사상을 박멸하기를 주장하는 신하들의 요구로 그들을 사형시키었다. 사형을 받은 최초의 순교자였다.
신도들의 요구로 북경의 주교 구베아는 중국 사람 신부 주문모(周文謨, 교회이름 쩨임스, James)가 정조 19년(서기 1795) 1월에 압록강을 건너 서울에 숨어 들어와서 비밀히 전도하였다. 그런데 배교자 김여삼(金如三)이 관청에 밀고하매 주는 자취를 감추고 그를 인도하여 온 지황(池潢)?윤유일(尹有一)?최인길(崔仁吉)들을 잡아 처형하였다. 그러하나 교세는 더욱 왕성하기만 하였다. 정조 20년(서기 1796) 9월에 주는 북경의 주교(Bishop)에게 밀서를 비단에 써서 중국 가는 사신의 두 종으로 하여금 전하게 하였다. 그 비단글은 옷속에 호아 붙이었던 것이며 종의 자리를 얻음도 이 목적을 위함이었다. 그 글의 내용은 포튜갈(Portogal)왕이 한국 왕과 중재하여 신앙 자유의 조약을 맺도록 하여 달라 함이었다. 그러나 아무 결과도 얻지 못하고 정권의 변화로 새 박해가 시작되었다. 정조 24년에 정조가 돌아가고 11세의 어린 순조(純祖)가 즉위하매 대왕 대비 김씨(영조비)가 정권을 잡게 되므로 종래의 미온(微溫) 정책을 일변하여 천주교에 철퇴(鐵槌)를 내리게 되었다. 곧 순조 원년(서기 1801)에 교도를 잡아 가두어 사형 또는 옥중에서 죽은 사람이 무려 300명에 달하였다. 교도의 수령인 이승훈?정약종들의 쟁쟁한 남인들이 거진 다 희생되고 정약전?정약용?이치훈(李致薰)들은 귀양가게 되었으므로 신부 주문모도 자수하여 그 해(서기 1801) 5월에 순교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는 외국인으로서 첫 순교자였다.(“純宗大王 實錄” 卷二, 純宗元年 正月條, “國史槪說” 535페이지 이하, 백낙준 박사 전기 신교사 26페이지 이하 참조)
이로 인하여 교도 황사영(黃嗣永, 교명 알렉산더(Alexander))의 “백서(帛書)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박해가 일어났을 때 충청도 제천(提川)에 숨어 있었는데 형세가 악화됨을 보고 동지 황심(黃沁)?옥천희(玉千禧) 두 사람과 연락하여 북경 주교(Bishop)에게 서양 병정 6만 혹은 7만명을 청하여 달라는 것이었으나 가기 전에 발각된 것이다. 백서라 함은 비단에다 쓴 때문이며 청원 내용은 먼저 박해가 당파 싸움에 기인함을 자세히 말하고 다음 박해의 상황과 순교자의 약력을 간단히 마하고 국내 사정을 말하여 경제적 원조를 달라하고 해군의 힘으로 정부를 위협하여 신도 안전과 교세의 안전을 보장하여 주기를 북경 주교(불란서 사람)에게 청원한 것이었다. 황은 물론 극흉 극악 대역 부도라 하여 군문(軍門)에 효수(梟首)되었다. 이러한 박해로 교세는 좀 쇠하게 되었었다.
순조 31년(서기 1831)에 불란서 파리의 외국 선교회(서기 1651 창립)는 혁명란 뒤 다시 동양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북경 교구와 갈라서 조선 교구를 두게 되매 싸이암에서 전도하던 부주교 브루규르(Barthelemy Brugiere)가 자원하여 부임하기를 청하여 1832년 9월에 싸이암을 떠나 우선 중국으로 들어오니 신부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도 북경으로 들어와 2년 뒤에는 만주에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부르규르 부주교는 조선으로 들어오려다가 만주에서 갑자기 작고하고 모방(羅伯多祿이라 함) 신부는 헌종(憲宗) 2년(서기 1836) 1월에 외국인 입국을 엄금하는 조선의 국경인 압록강의 얼음을 타고 넘어 가만히 서울에 들어오게 되었다. 싸이암 교구의 신부 샤쓰탕(Jacques-Honore Chasten, 鄭牙各伯이라 함)도 같은 목적으로 헌종 3년(서기 1837)에 서울에 오고, 부르규르의 후계자 암베르(Laurent Marie-Joseph Imbert, 苑世亨이라 함)가 헌종 4년(서기 1838) 1월에 서울에 와 세 사람의 불란서 사람 선교사는 비밀히 전도에 종사하였다. 교도는 점점 늘어서 헌종 4년에는 9,000명에 달하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는 다시 탄압을 주장하는 이가 많게 되었다. 우의정 이지연(李止淵)도 적극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두 번째 “사교”(邪敎) 탄압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헌종 5년(서기 1839) 3월에는 좌우 포도청(捕盜廳)에 수 십명의 교도가 붙들리었고 그 중에는 주요 인물들인 조신철(趙信喆), 정하상(丁夏祥), 유진길(劉進吉)들도 그 가족과 잡히었으며 7월에 외국 사람 선교사 암베르 그 뒤 또 모방 샤쓰탕들도 다 붙들리어 헌종 5년(서기 1839) 9월 21일에 모래밭 위에서 순교잘 이슬이 되고 말았다. 순교자 수는 약 80명에 달하였다. 그 가운데는 12,3세의 소녀로부터 80세의 부인에 이르는 50명이 들어 있었다.
모방 신부가 마카오에 보내었던 (서기 1836) 김대건(金大建, Andrew라 함)은 마카오에 있는 포튜갈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헌종 11년(서기 1845) 이른 봄에 의주(義州)에 돌아와서 남쪽에 있는 집에 갔다가 11교인들(대개 바다의 지식이 아주 없는 이들)과 함께 갑판없는 배로 지남침 하나만 가지고 황해로 떠났다. 이는 주교(Bishop)를 데리고 올 목적이었다. 위험한 항해를 하여서 상해(上海)에 다달았다. 주교 페레올(Ferreol)을 만나 신부(Priesthood)로 임명을 받은 뒤에 페레올 주교와 새로 온 신부(Priest) 다불루이(Antoine-Nicholas Daveluy)와 조선 신도들과 함께 돛대배로 조선으로 가만히 들어왔다.(헌종 11년 10월 12일) 그러나 김대건은 헌종 12년(서기 1846) 9월에 메이스트르(Maistre) 신부들의 해로(海路) 입국을 계획하다가 잡히어 죽었다. 그러나 그 뒤로 불란서 사람 선교사들이 잇대어 숨어 들어오게 되고 교인도 자꾸 늘게 되었다. 메이스트르신부가 온 뒤 철종 5년(서기 1854)에는 얀송(Janson) 신부, 철종 7년(서기 1856)에는 베르누(Simon Berneus 張敬-이라 함) 주교와 페롱(Feron) 신부가 왔다. 전도도 하고 출판물도 내어 신자 늘이기에 힘썼다. 그리하여 철종 초기에는 신자가 만명을 돌파하게 되었다.
철종 원 년(서기 1850) 11,000명 철종 4 년(서기 1853) 12,175명 철종 6 년(서기 1855) 13,638명 철종 8 년(서기 1857) 15,206명 철종 10 년(서기 1859) 16,700명 철종 14 년(서기 1863) 19,748명
에 달하고 두 주교(bishops)와 여덟 신부(Priests)가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철종이 14년(서기 1863) 12월에 죽고 후사가 없으므로 대왕 대비 조씨(趙氏)의 명령으로 흥선군 하응(昰應)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을 맞아들이어 임금으로 세우니 이가 고종(高宗, 뒤의 光武帝)이다. 그리고 흥선군을 대원군으로 봉하였다. 처음에는 대왕 대비 조씨가 정사를 보았으나(垂簾聽政) 나중에는 대원군이 섭정(攝政)하게 되었다.
그런데 고종 3년(서기 1866) 1월에 러시아 군함이 원산(元山)만에 나타나서 통상과 러시아 상인의 거주의 자유를 요구하는 글월을 정부에 전하였다. 그리고 만일 이 요구가 허락되지 않는다면 러시아 군대는 이를 강요하기 위하여 국경을 넘어들어올 것을 암시하였다. 정부는 이 사건으로 매우 당황하여서 중국 당국자와 의존하기 위하여 북경에 특사를 보내었다. 서울에 있는 어떠한 저명한 신도들은 신앙의 자유와 자기들의 명예를 얻을 기회가 왔다고 믿어 그 중의 한사람인 김기호(Thomas라 함)는 불란서 사람 주교 베르누(bishop Berneux)에게 러시아 문제를 해결함에 대하여 정부를 조력하여 주기를 유구하였더니 주교는 이에 쾌락하였다. 김은 곧 대원군에게 조선에 있는 불란서 주교를 통하여 러시아 침략을 대항하는 불?영(佛?英)동맹이 쉽게 협정될 수 있다고 제의하는 편지를 썼다. 이 전망으로 교회는 큰 용기를 얻게 되었다. 남상교(John이라 함)도 대원군에게 김과 같은 취지의 편지를 썼다. 대원군의 부인 민씨는 천주교에 동정을 가졌고 그의 아들 어린 임금의 유모(乳母) 박씨(Martha라 하였음)는 천주교 신자였다. 이같이 대원군의 주위에는 천주교의 분위기가 떠돌았다. 그러한 때문인지 대원군은 김?남의 제의에 대하여 베르누 주교를 만나보기를 원하는 뜻까지 표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히 주교는 서울에 있지 않았으므로 만날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몇 날 뒤에 주교가 서울에 왔으나 대원군은 벌써 베르누 주교를 만날 생각이 없어졌던 것이다. 대원군의 태도가 이 같이 갑자기 변함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러시아의 군함이 원산에서 물러갔음이요, 둘째는 북경에 간 특사에게서 중국안에 있는 모든 구라파사람을 다 죽인다는 거짓 보고가 옴이요, 셋째는 안으로 조 대비와 조두순(趙斗淳)?김병학(金炳學)들이 배외(排外) 사상을 고취(鼓吹)하여 대원군의 주교 면담을 굳이 반대하고 천주교 반대 법령을 결정함이다. 그리하여 대원군은 그 신하들에게 뜻을 굽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천주교도 박해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장운(金長雲),최 형(崔炯)들을 비롯하여 남종삼(南鍾三),정의배(丁義培),홍봉주(洪鳳周)들 같은 주요인물이 다 잡히어 죽고 1월부터 2월 상순까지 아홉 사람의 불란서 사람 선교사가 사형을 당하였으며 고종 9년(서기 1875)까지 좌우 포청에 붙들린 남녀 교도가 약 400명에 달하였다.(왝너(Ellasue Wagner)는 고종 3년(서기 1866)으로 고종 7년(서기 1870) 사이에 천주교 신자의 희생을 줄잡아도 10,000명은 된다고 추산하였다.(The Korea Mission Field, 1938, 34권 5호 참조)
불란서 사람 선교사 세 명이 죽음을 벗어난바 그 중 리델(Ridel) 신부는 중국 천진으로 피난하여 그 곳에 있던 불란서 수사제독(水師提督) 로쓰(Admiral Ross)에게 학살 사건을 보고하였다. 북경 주재 불란서 공사 벨로네(M. H. Bellonet)는 이를 듣고 격분하여 중국 정부에 조선 정벌의 뜻을 전하매 중국은 이 소식을 조선에 전하였으므로 조선은 국경 경비를 엄중히 하고 천주교도에게는 한층 더 탄압을 내리게 되었다. 로쓰제독은 군함 3척을 거느리고 리델을 통역관으로, 조선 사람 셋을 향도자로 데리고 치푸(芝?)를 떠나 인천만 물치도(勿淄島)(영종도 외양)에 나타났다. 그 중 한 척은 좌초(坐礁)되고 두 척은 양화진(楊花津)까지 거슬러 올라 왔었으나 23일에는 물러가고 말았다. 9월 5일(서기 1866. 양 10?13)에 로쓰제독은 군함?포함?통보함(通報艦)들의 7척을 거느리고 다시 들어와 강화도(江華島) 갑곶(甲串)상륙하여 진해문(鎭海門) 부근 고지(高地)를 차지하였다. 8일에는 강화도를 공격하여 장녕전(長寧殿)과 각 관아(官衙)를 차지하고 군기?저축한 세곡(稅穀)?천은(天銀)?서책(書冊)들을 약탈하여 갔다. 9일에는 통진부(通津府)를 습격하여 부사 이공렴(李公濂)을 몰아내고 11일에는 문수산성(文殊山城)에서 물러 가는데 이용희(李容熙)는 지홍관(池弘寬)을 보내어 전유(傳諭)하게 하였으나 로쓰는 선교사 죽인 책임을 묻고 두 나라가 조약을 맺자하였다. 문수산성, 교동 수영(水營), 정족산성(鼎足山城) 전등사(傳燈寺) 기타 승패가 있었으나 불군 32명이 부상을 입게 되어 로쓰는 더 싸와야 이롭지 못할 것을 알고 10월 3일에 강화에서 물러 가기를 결정하고 5일에 장녕전, 기타 관아에 불을 놓고 갑곶으로부터 물러 갔다. 이것이 이른바 “병인양란”이다. 약 40일동안 한강 입국가 이 때문에 막히어 서울의 곡식 운반이 막히게 되었으므로 인심은 매우 흉흉한바 있었다.
그런데 천주교회는 정조 8년(서기 1784) 이승훈의 교회 기초를 세움으로부터 고종 3년(병인 서기 1866)까지 82년이 지나도록 복음 한권이나 성경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번역함이 없었다. 그러나 이승훈은 교리를 한글로 번역하여 소개하였고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최도 교리에 관한 책을 번역하여 전파하였다. 대원군이 천주교를 학살한 뒤에는 외국인 선교사가 한 사람도 없이 되고 신자도 미미하게 되었었지마는 천주교는 끈기있게 계속하여 전파되어 한글 발전에 이바지함이 크다. 구교(천주교)가 교리를 번역함으로써 한글발전에 끼친 공적은 멀리 신교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겠지마는 고종 17년(서기 1880)에 불란서 선교사들이 편찬하여 파리에서 발행한 “한?불 사전”(Dictionnaire Coreen-Francais)은 우리 사전의 최초가 됨으로만 귀한 값이 있을뿐 아니라 그 뒤 내외국 사전 편찬자들의 토대가 되었고 또 우리말과 한글의 가치를 서양 학계에 소개한 것이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첫 부분은 일반 낱말의 사전이요, 둘째 부분은 말본의 사전이요, 셋째 부분은 지리(地理)의 사전이다. 그 다음해(고종 18, 서기 1881)에는 “한국 말본”(Grammaire Coreenne)이 파리에서 출판되었다. 이것도 우리말본의 최초로서 서양 학계에 소개한 공이 크다. 그 뒤로 선교사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오게 될 때에 우리말을 배우기에 없지 못할 유일한 참고서가 되었던 것이다. 또 사전과 말본은 내외국 사람들에게 우리말의 과학적 연구의 씨를 뿌린 것이다.(졸저 “韓國文字及語學史” 서기 1938, 참조)
이상에서 구교(천주교)의 전하여 옴과 그 국어에 끼친 공적을 간단히 말하였다.
다음으로 신교(新敎, Protestant)가 들어옴과 그 국어에 끼친 공적을 살피려 한다.
순조 32년(서기 1832) 6월에 싸이암(暹羅) 방콕(Bangkok)에 신교 선교사로 있던 꾸츨라프(Charles Gutzlaff)가 조선을 찾아온 일이 있었다. 포메라니아(Pomerania)에서 나서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17세기)의 중심지 헤일(Halle)에서 교육받은 꾸츨라프는 화란선교회(the Netherlands Missionary Society) 밑에서 일하던 많은 독일 사람 선교사의 하나였다. 그 뒤 그는 마카오로 갔는데 거기서 그는 중국에 간 최초의 신교 선교사 모리슨(Robert Morrison)과 친하게 되었다. 영국의 “동인도 회사”는 서기 1832(순조 32)년에 북지나 항구들을 시찰하기 위하여 가는 “로드 암허쓰트(Lord Amherst)로 그 상회의 선원 린드세이(H. H. Lindsay)와 함께 꾸츨라프를 태워 보내었다. 모리슨은 꾸츨라프에게 한문 성경을 많이 보내어 항해하는 동안에 나누어주어 달라고 하였다. 산동(山東) 해안을 거치어서 그 배는 조선으로 오게 되었다. 그 배는 처음으로 황해도 서해안인 장산곶(長山串) 근처의 어느 섬에 닻을 내리게 되었다. 꾸츨라프는 연안에 상륙하여 한문 성경을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지방관을 통하여 서신을 정부에 전하게 하고 다시 충청도 서해안에 이르러 통상을 열어 달라는 청원서를 예물과 함께 지방관을 통하여 임금에게 전하게 하였다. 회답을 기다리는 동안 꾸츨라프는 성경과 종교 서책들을 나누어주고 감자를 심었다. 오래 지체된 뒤에 그 편지와 선물은 되돌리어 왔다. 그들은 실망하고 돌아갔다. 꾸츨라프는 비상한 어학 재주를 가진 학자여서 성경을 싸이암 말과 중국말, 일본말로 번역하는데 한 몫을 담당하였었다. 그의 요한복음 일본말 번역은 1838년(헌종 4)에 씽가포어(Singapore)에서 출판되었다. 또 조선 해안에 항행하는 동안(1832)에 그는 한문으로 주기도문 책을 쓰고 조선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발음을 이것에 달게 하여 조선말 교가서로 썼다고 한다. 그는 한달동안 머물면서 성경을 나누어주고 백성들과 접촉하였다고 하는데 신교신자를 얻었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The Korea Mission Field", Vol. XXXIV. No.5, May, 1938 참조)
꾸츨라프의 방문이 있은 뒤로 33년 동안 다른 아무 신교 선교사도 조선을 방문한 일이 없었다. 고종 2년(서기 1865)에 스코틀랜드(Scotland) 성서공회 대표자 토마쓰(Reverend Robert Jermain Thomas)가 방문하고 다음 해에 다시 방문하였다. 토마쓰는 훌륭한 어학자여서 영국을 떠나기 전에 러시아말을 잘 할 수 있었고 상해에 온지 넉달안에 중국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부인이 죽은 뒤 환경을 바꾸기 원하여 치푸(芝?)로 갔는데 그는 거기에서 천주교 신자인 두 조선 사람을 만났고 그들을 통하여 조선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그들에게 조선말을 좀 배우게 되었다. 치푸에는 스코틀랜드의 성서공회 대표자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이 머물고 있었다. 토마쓰는 두 조선 사람과 함께 조선으로 가기로 결심하고 윌리암슨에게 자기가 여행하는 동안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대리자로서 anhq수로 일하기를 제의하였다. 그리하여 토마쓰는 많은 한문성경을 가지고 고종 2년(서기 1865) 9월 4일에 중국 배로 치푸를 떠나 13일에 조선 서해안에 도착되어 두 달 반동안 머물렀었다. 그는 조선 사람들에게 성경을 나누어 주었는데 조선 사람들은 “목이 잘릴 모험”으로 이를 받았다. 그는 12월초에 조선을 떠나 만주를 거치어 북경으로 돌아갔다.(1866년 1월초) 그는 북경에서 중국 황제에게 간 조선의 연차 사신을 만나서 성경들을 그들에게 나누어주어 가지고 돌아가게 하였다. 조선 안에서는 천주교 학살사건이 일어남에 관계하지 않고 토마쓰는 다시 조선을 방문하기로 결심하고 고종 3년(서기 1866) 8월 9일에 조선으로가는 미국 범선(Schooner) "쩨너랠 숴만“(General Sherman)으로 떠났다. 서해안의 백령섬을 거치어 평양시에 가까운 대동강으로 올라갔다.(8월말) 토마쓰는 그 강 언덕의 촌에 머물면서 조선 사람들을 많이 접촉하여 그들에게 성경을 나누어 주었다. 평양시의 한 관리는 그 배의 온 목적을 알기 위하여 그 배를 찾아왔다. 그들은 무역을 원함이 목적이라고 하였다. 그 도감사(道監司)는 서울의 정부에 이 외국배가 옴을 보고하였는데 곧 떠나지 않으면 배를 공격하겠다는 지시를 받았다. 그런데 그때 그 배는 모래 언덕에 박혀(坐礁)서 떠날 수가 없었는데 불타는 배들을 이 미국 배로 떠내려 보내어 타게 되었다. 갑판에 있던 사람들은 물로 뛰어 들었고 빠져 죽지 않은 이들은 강 언덕에 나오자 곧 죽임을 당하였다. 토마쓰 목사는 성경을 손에 들고 배를 떠나 강변에 이르러, 자기를 쳐죽이려고 서 있던 병정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성경을 주었다. 그 병정은 주저하다가 토마쓰 목사를 쳐 죽인 뒤 그 성경을 집어 가지고 집으로 갔다. 조선에서 최초요. 오직 한 사람의 신교의 손교자가 죽은 지점(地點) 근처에는 조선 교인들로 말미암아 1932년에 토마쓰 기념 예배당이 서게 되었다. 평양 개척자인 선교사 모페트(Samuel A. Moffett, 馬布三悅이라 함) 목사는 고종 30년(서기 1893) 10월에 세례받으려는 사람 가운데서 이 불행한 선교사 토마쓰 목사에게서 한문 신약전서를 받은 사람을 발견한 일이 있었다. 토마쓰 목사의 희생으로 뿌린 복음의 씨가 싹튼 것이라 하겠다.
“쩨너랠 숴만”이 파선되었어도 “숨은 나라”(Hermit Kingdom)를 선교 지역으로 발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1865년에 토마쓰를 조선에 보내었고 성경을 그에게 많이 주어 보내던 윌리암슨은 고종 3년(서기 1867) 가울에 조선 국경(Korean Gate)까지 왔는데 그 때 조선 사람들이 중국 사람과 무역하러 왔었다. 그는 많은 조선 사람을 만나 성경책들을 그들에게 팔았다고 보고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