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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가 한국 신문에 미친 영향
최준 <홍익대학 신문학과 교수>
    2. 성경을 앞잡이로 한 기독교의 전래

한국에 기독교가 정식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난 즉 후인 1885년 4월이었다. 이 때 외국 선교사-주로 미국의 장로회와 감리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은 이미 한국말로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한국에 들어왔다. 이것은 주목할 일이다. 이방(異邦)선교에 있어서 그것도 전혀 처녀지를 개척하는 데 있어서 기독교를 선포하는 데에는 보통 그 고장의 말(言語)이 주로 선교 수단이 되기가 일수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에는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한국의 고유한 글자인 한글로 번역된 성경이 그 길라잡이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매우 주목할 일로서 기독교 자체에 있어서는 전도의 전파력을 가속도로 높이는 결과를 가져 왔으며 한편 한국 민족에 대하여서는 민족문화의 개화(開花)를 채찍질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더구나 한글 성경의 출현은 글자 특히 한문(漢文)과 동떨어져 천대받던 한국 국민 대중들로 하여금 자기네들의 글을 다시 찾게 하였고 나아가서는 민족문화를 높이는 주동적인 일꾼의 위치로 올려놓았다.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독교가 어떠한 경로를 밟고 한국에 들어왔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기는 16세기 말년이었다. 즉 1593년으로부터 1598년에 걸친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따라온 당시 일본 주재의 예수회 신부(神父)인 쎄스페데스(Gregory De Sesphedes)의 내한으 그 시초라 하겠다. 물론 이것은 엄격히 따지면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 즉 프로테스탄트는 아니고 천주교 즉 카돌릭이었다. 그후 1783년에 북경에 갔던 이승훈(李承薰)이가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돌아와서 정약종(丁若鍾), 권철신(權哲身)등과 더불어 교인이 되어 천주교는 비로소 한국 땅에 뿌리를 박았다. 다시 1801년 순조(純祖)는 천주교도인 이가환(李家煥), 정약종(丁若鍾), 권철신(權哲身), 이승훈(李承薰), 황사영(黃嗣永)등을 반역죄로 몰아 사형에 처하였다. 이것을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 한다. 이러한 천주교도 탄압의 사옥은 그후에도 계속되었다.

이렇듯 천주교는 한국에서 연거푸 일대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한번 뿌리를 받은 천주교는 쉽사리 쓰러지지 않았다. 당시 천주교를 가리켜서 서학(西學)이라 일컬었다.

한편 기독교 즉 프로테스탄트는 어떻하였던가? 천주교에 훨씬 뒤지어서 1832년 네더랜드 선교회 파송의 뀨즈라프(Charles Gutzlaff) 목사가 충청도 고금도(古今島)에 상륙하여 40일 동안 전도한 것이 기독교가 한국에 처음으로 들어온 기록이 된다. 그후 1865년에는 북경에 주재하였던 영국의 도마스(Robert Jermain Thomas)목사가 한국 서해안에 상륙하여 2개월 반을 지냈다. 그는 일단 북경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그 이듬해인 7월 미국의 상선인 제네랄ㆍ숴맨 호를 타고 평양 대동강 상류까지 들어 왔다가 평양의 군민(軍民)들에게 습격을 받아 마침내 기독교 선교사로 최초의 순교를 당하였다. 이때는 대원군(大院君)의 집정시대로서 쇄국정책을 강행할 무렵이었다. 도마스목사가 순교하기 6개월전인 1866년 1월에는 천주교를 사학(邪學)이라 단정한 대원군은 남종삼(南鍾三), 홍봉주(洪鳳周)등 수많은 한국인 천주교 신도들을 학살하였고 또 9명의 불란서인 선교사도 처단하였다.

극단적인 쇄국정책을 쓰고 있던 대원군은 이해 8월에는 천주교 및 기독교를 모두 사학(邪學)으로 규정한 후 이를 뿌리채 없애버리도록 하기 위해 소위 척사윤음(斥邪綸音)까지 공포하였다. 이해 가을에는 불란서 함대가 강화도에 나타났으나 이를 격퇴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병인양요(丙寅洋擾)이다.

이리하여 기독교도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서학이라 하여 사학의 취급을 받아 기독교 선교사들은 손쉽게 한국에 들어 올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당시 만주 일대에서 선교하던 짠ㆍ로스, 짠ㆍ매긴타이어, 윌리암손(Williamson)등이 그곳을 찾아오는 한국 청년들에게 전도하는 한편 전기 두 선교사는 한국말 성경 번역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러는 동안 한국에서는 일대 정치적 변동을 보았다. 그것은 대원군이 섭정(攝政)에서 물러서고 고종(高宗)이 집정하게 되자 왕비인 민씨(閔氏)의 일족이 갑자기 세도를 부리게 되었고 이들은 대원군과는 반대로 개국정책(開國政策)을 썼다. 이에 따라 일본을 비롯하여 미국, 영국등 여러 나라와 통상수교조약을 맺게 되어 비로소 바깥 세계를 내다보게끔 되었다. 그러나 민씨 一파의 집권세력은 여전히 사대사상에 물들어 있었고 당시의 지식계급을 자칭하던 유림(儒林)들의 지도계층에서는 여전히 서학을 반대하는 기풍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이에 반기를 들고나선 것이 김옥균(金玉均)을 비롯한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등 30세 미만의 일부 혁신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국정개혁의 정력에 넘친 나머지 1884년 12월 4일 마침내 일대 쿠데타를 감행하여 사대주의 사상에 사로잡힌 민씨 一파를 타도하여 정권을 잡았다. 들고나선 정책은 봉건적인 제도를 타파하고 근대적인 국가를 이룩하자는 데 있었다. 이 때 김옥균은 고종왕을 움직여 프로테스탄트를 정식으로 맞아들이게 그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김옥균 一파의 혁신정권은 민주의 뒤받침이 없어 三일천하로 거꾸러지고 말았다. 혁신정권은 불행히 거꾸러졌어도 프로테스탄트의 두 선교사인 언더우드(H.G. Underwood)와 아펜셀라(H.G. Appenzeller)가 그 이듬해인 1885년 4월 5일 제물포(濟物浦)에 정식으로 한국의 땅을 밟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일은 기독교가 주로 중국으로부터 서북지방을 통하여 한국에 들어 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서북의 한국인들이 먼저 기독교 신도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은 한국의 근대화 운동사상에 있어서 커다란 뜻이 내포되었음을 우리는 잊을 수가 없다.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 온 지리적인 경로로 보아 서북지방의 한국인이 먼저 기독교도가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으나 그 후의 격증하는 신도의 수효가 압도적으로 서북지방이 우세하였다는 사실은 그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하는 점이다. 이것은 결국, 서북지방의 한국인들이 다른 어느 지방보다도 훨씬 힘차게 그리고 열심히 기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그 원인은 어디 있는가? 이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지난날의 역사적 배경을 더듬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이씨왕조(李氏王朝) 약 5백년 동안에 있어서 서북지방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거의 거부당하여 왔다. 봉건시대에 있어서 유일한 출세의 길은 관리(官吏)가 되는 것이었으나 이씨왕조의 역대 조정(朝廷)에서는 서북지방 사람을 높은 자리에 등용하지 않았다. 즉 “서북사람을 중요한 자리에 등용치 말라”(西北人勿爲重用)이라는 것이 이조 시대의 하나의 불문율(不文律) 비슷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서북사람이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특출한 인재일지라도 중요한 자리를 주지 않았고 겨우 문관(文官)으로서는 최고가 육품관(六品官)인 지평(持平)이나 三품관의 장령(掌令)이 고작이었고 무관(武官)으로서도 만호(萬戶)나 첨사(僉使)-지방의 군직- 정도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서북지방 사람들은 자연 관권(官權)에 대한 반발심이 높았고 따라서 스스로 개척하는 자립정신이 왕성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세도계급, 및 양반에 대한 원한도 치렬하였다. 이리하여 서북지방의 사람들은 오랜 세월을 두고 천대를 받아 오는 동안에 자연 서민(庶民)적인 기풍 가운데에서도 새것을 바라보는 씩씩한 일면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기풍을 지닌 서북지방의 한국인들이 당시 세도계급에서 가장 멸시하고 배격하던 한국 성경을 대하게 되자 그 누구보다도 재빨리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음은 가히 수긍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한국 성경 속에는 평등과 사랑을 가르치고 있었으니 서민적인 서북의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었을 것은 능히 짐작할 수가 있는 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다시 한 걸음 나아가서 새겨 볼 때 한글 성경이야말로 천대받는 서민들의 책이었고 또 한국 기독교야말로 특권계급이 아닌 서민적인 일반 국민 대중 속에 그 뿌리를 박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1. 한국말 성경의 출현의 뜻

  2. 성경을 앞잡이로 한 기독교의 전래

   3. 문서운동에 성공한 프로테스탄트

   4. 프로테스탄트와 신문

   5. 민주주의 사상을 펴다

   6. 자주 독립 사상의 앙양

   7. 매스 메디아로서의 공헌과 그 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