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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가 한국 신문에 미친 영향
최준 <홍익대학 신문학과 교수>
    7. 매스 메디아로서의 공헌과 그 전망
이상으로 프로테스탄트가 한국에서 이룩한 여러 방면의 역할과 공적은 참으로 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특히 문서를 통한 컴뮤니케이슌에 있어서 단연 한국민족을 이끌어 나왔다는 것은 한국의 문화사상 길이 빛나는 기록이 될 것이다. 한글 성경의 대량 출판을 비롯하여 신문, 잡지, 그리고 각종의 종교 서적의 발행 등 그 하나하나가 한국 근대화운동에 절대적인 공적을 쌓아 놓았다. 그 중에도 한글성경이 매년 70만 내지 80만권씩 전국에 퍼지고 있다는 사실은 특기할만한 일이다. 이것은 프로테스탄트가 가져온 가장 커다란 업적의 하나로서 한국민족은 만민 평등과 자주독립사상에 불타오르고 있음을 말하는 증좌라 하겠다. 이제 프로테스탄트가 한국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던가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직접 이에 처음으로 접한 사람들의 체험담을 인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국의 유명한 역사가인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1890~1957)은 그의 술회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처음으로 성경을 보게 된 것은 마태복음, 누가복음 등의 쪽복음이었다. 그것은 당시 아직도 신약전서가 나오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1900년때의 일이었으니 이때 국문으로 된 책이란 쪽복음 정도이었다. 그후 천로역정이라든가 성경도설도 사서 보았는데 이러한 책들은 당시 제중원(濟衆院) 안에 마련된 책 파는 곳에서 사서 보았다. 이러한 국문으로 된 책을 읽고 나는 비로소 독서에 커다란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이처럼 근세 한국의 석학인 육당 최남선은 프로테스탄트의 서적을 보아 비로소 그의 독서의 눈이 뜨기 시작하였고, 또한 그의 인생관 내지 사회관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프로테스탄트가 한국의 근대화 운동에 이바지한 공적은 한국 민족에게 깊은 감명을 던져 주었으니 1934년 감리교회 50주년 기념식을 맞이하였을 때 한국의 각 민간 신문들은 그 사설로서 프로테스탄트의 공적을 찬양하여 마지않았다. 이제 1934년 1월 「조선일보」에 나타난 『조선의 예수교』라 제한 장백산인(長白山人)의 소론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교 신교가 조선에 들어온 지 금년이 50년이라 한다. 이 반세기 동안에 예수교가 조선에 미친 영향은 아마 그 동안의 다른 어떤 영향보다도 클 것이다.
예수의 교리 자체는 차치하고 신교육, 신의료, 과학, 음악, 서양식 생활방식을 조선에 처음으로 또 다량으로 이식한 것이 그다. 일언이폐지하면 조선은 예수교회를 통하여 구라파식의 문화와 접촉한 것이었다.
더구나 예수교의 성경 기타 종교서류를 순 조선문으로 번역하여 보급한 것이 조선어와 글의 갱생발달에 준 영향은 오직 한글의 제정에 버금갈 공적이다. 과거에만 그리하였을뿐 아니라 현재에도 예수교는 우리 조선의 문화에 큰 공헌을 하고 있다. 금후의 조선문화사는 영원히 예수교회의 공헌, 동시에 미국, 카나다, 오스트렐리아,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여러 나라의 선교사와 그들을 파견하고 또 모든 사업의 경영을 부담하여준 국민들에게 감사할 것을 잊지 아니할 것이다.…』

이처럼 프로테스탄트는 한국 민족에게 커다란 존재 의의를 가지고 나타났으며 또한 고마운 존재로서 과거와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대하여 무조건 항복한 때부터 한국 민족은 오랜 동안의 군국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자유해방을 다시 찾은 한민족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특히 군국 일본의 가장 커다란 탄압을 받았던 프로테스탄트들의 기쁨은 더욱 컸다. 자유로운 전도사업을 비롯하여 신문, 출판 사업을 못 하였던 프로테스탄트들은 처음으로 아무 거리낌없이 포교에 수반되는 일체의 컴뮤니케이슌운동을 맹렬히 전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문으로서는 「기독공보」를 비롯하여 「한국기독시보」·「기독교보」·「국제기독교뉴우스」등의 네 가지의 주간 신문이 나오게 되었고 1954년 12월부터는 한국 최초의 민간 방송국인 기독교방송국 HLKY가 서울에 창설되어 또 다시 프로테스탄트는 방송이란 매스·메디아를 한국 민족에게 소개하였다. 인천에는 루터복음교회 경영의 HLKX가 나타났고, 이어 전기 HLKY는 그 산하단체로 새로 대구, 부산 등지에서도 방송을 하고 있다. 한편 기독교인들의 각종 출판사가 나타나서 활발히 출판행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지적하여야 할 것은 카톨릭은 서울의 「경향신문」과 대구의 「대구매일신보」라는 두 일간신문을 가지고 있음에 반하여 프로테스탄트는 한 개의 일간 신문도 못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약 4천 여개의 교회와 1백 2십만의 신도를 가진 프로테스탄트의 교세는 계속 발전되고 있으나, 매스·컴뮤니케이슌에 있어서 특히 신문 부문에 있어서는 조금도 전진을 못보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프로테스탄트의 교세로 보아서는 능히 하나의 일간 신문쯤은 응당 가져야 할 것이 아닐까? 이 점에 있어서 프로테스탄트는 확실히 과거의 빛난 기록에 비하여 하나의 후퇴라 볼 수밖엔 없겠다.

일찍이 38년 전에 전기 장백산인(長白山人)은 프로테스탄트의 비애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었다.

『…그것은 프로테스탄트가 들어온 지 반세기가 지냈건마는 조선의 예수교라는 것이 발생되지 못한 것이다. 여태껏 선교사가 가지고 온 교리, 정치로 지내왔을 뿐이요 조선인의 교리나 정치에 대한 신저서, 신실천, 신운동이 없는 것이다.마치 불교에서도 조선의 불교를 못 고하고 유고에서도 조선의 유교를 못 낳은 셈으로 예수교에서도 필경 남의 지게미만 빨고 말려는 것인가. 조선인의 종교적 얼의 꽃은 피어 보지 못하려는가. 조선인의 종교적 독창성은 한번 세계를 놀래어 보지 못하고 말려는가. 어디 그래서야 되겠는가……예수교회내의 여러 가지 갈등 파쟁의 소문이 때로 들리거니와 이러한 쟁투의 에네르기를 루터나 웨슬레식 종교개혁의 천화적(天火的) 에네르기로 전향하지 못하겠는가?……』

이러한 한국사회가 프로테스탄트에 바라고 있던 주문은 그대로 7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지금의 프로테스탄트에 대하여서도 계속 요망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의 한국의 프로테스탄트는 초대교회 당시와 같이 문화적으로 한국사회의 앞장을 서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프로테스탄트의 후퇴를 말하기 전에 한국 사회가 일반적으로 전진했다는 반증도 되는 것으로서 반드시 비관의 재료는 아니다. 한 나라의 문화를 걸머지고 나아가는 것은 그 민족과 사회 전체일 것인즉 오늘날 프로테스탄트가 왕년과 같은 문화적 주등세력이 못된다 손치더라도 이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보아야겠다. 그렇다고 프로테스탄트의 문화적 활동이 전혀 뒤지고 쇠잔해서 좋을 법은 없을 것이다.

지난 가을에 열렸던 장로회총회에 대한 것을 하나의 예로 만들어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약 백만의 신도를 대표하는 장로회총회 개회에 대하여 국내의 일반 일간 신문들은 전혀 취재의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물론 취재를 하지 않은 일반 신문사측의 태만에도 기인되나 한편 그만치 프로테스탄트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등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프로테스탄트에 있어서는 중대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프로테스탄트가 한국 사회에서 무시되어 마땅할 것인가? 깊이 생각할 문제이다. 프로테스탄트의 현재의 위치와 그 사업내용에 있어서는 결코 지난날에 못지 않게 뜻깊고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 저널리즘에서 고아(孤兒)의 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크게 반성해 보아야 할 점이 아닐까?

요컨대 프로테스탄트는 한국의 매수·컴뮤니케이슌을 위해 선구자적인 훌륭한 역학을 이룩하였다. 이 빛나는 기록은 과거를 이어 현재와 앞으로도 계속 이어 나아가야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상태에서 한 걸음 뛰어나갈만한 활기와 용력과 지혜가 절실히 요청되는 바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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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매스 메디아로서의 공헌과 그 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