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프로테스탄트의 신문이 한제국 정부의 인가를 얻어 발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교육, 의료, 사회사업도 한제국의 승인 아래에서 그 발족을 보았다.
그러나 선교사업 자체에 관한 한제국 정부와의 무슨 협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요, 또 그러한 법규가 한제국 정부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은 신중하게 그리고 한제국 정부 요인들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아가면서 전도하는 방책을 취하였던 것 뿐이다.
이러한 법규의 맹점(盲點)은 1900년대에 들어서자 프로테스탄트만이 아니라 카톨릭에 있어서는 한제국 정부에서 탄압이 있지 않는한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그 선교사업에 도움이 되었다. 말하자면 한제국 정부느 선교사업을 묵인한 것이니 자유롭게 전도를 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는 물론 당시의 시국(時局)이 많은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었다. 즉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그 침략세력을 사뭇 한제국내에 뻗쳐 왔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군국세력의 적극적인 침투는 당시 한제국의 집권당인 보수층에서도 누구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맹반대이었다. 그러므로 미국계의 프로테스탄트와 불란서, 독일계의 카톨릭의 한제국 진출에 대해서는 구태여 이를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이러한 종교세력을 이용하여 일본의 침략세력을 막으려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국내사정이 결국 이제까지 서학 또는 서교(西敎)라 해서 탄압을 받던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의 한제국에 진출을 묵인하게 된 커다란 원인이었다고 보겠다.
그러나 일본은 아일전쟁에 승리하자 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후 한성에 새로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한제국 정부를 감독하게 되었다. 이때 통감부는 각종 종교에 대한 단속법규의 필요성을 느껴 1906년 11월 선교사업에 관한 법규를 제정하여 기독교, 불교신도 기타 어느 교파이고 간에 한국에서 전도하려 할 때는 통감부의 인가를 얻어야 된다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사원(寺院), 회당 등 종교에 사용되는 건물의 설립도 일본 외무성 산하기관인 이사청(理事廳)의 인가를 필요하게 만들었다.
다시 일한합병(日韓合倂) 이듬해인 1911년 6월에는 조선 총독부령으로서 사찰령(寺刹令)을 공포하였다. 이 사찰령은 그 해 10월 1일부터 실시되어 한국의 사원, 교회당은 물론 한국인, 일본인, 기타 외국인에게 전반적으로 적용하였다. 이것이 한국에 있어서 선교사업을 인정한 최초의 포교규칙이었으니 이때 종교의 범위는 기독교(이에는 카톨릭도 포함되었음)를 비롯하여 불교, 그리고 신도에 국한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각종 종교단체는 이 법규에 따라 조선 총독부에 계출(屆出) 혹은 허가를 받게 되었고 포교하는데 단속을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은 법규상 총독부 관할 아래에 놓여지게 된 것이다.
통감부와 그의 후신인 총독부가 이러한 법규를 새삼스럽게 서두르게 된 것은 프로테스탄트의 교세가 날로 번져 가는데 대한 하나의 포석(布石)이었음이 틀림없었다.
사실 한제국에 있어서 일본을 비롯한 제정아라사(帝政俄羅斯), 청국(淸國) 등의 적극적인 침략적 진출과 심각한 세력 다툼은 자체 역량으로서는 도저히 막아 낼려야 막아낼 도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러한 국내 정세는 자연 고종을 비롯하여 보수(保守), 혁신(革新)의 정객들에게 자연 새로운 외국 세력의 도움을 힘입어 보려는 기운을 자아내게 되었다. 한제국에 있어서 보수, 혁신 두 파의 심각한 투쟁은 황국협회(皇國協會) 대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싸움이었다. 한국에서 최초로 민족 고유의 한글만으로 신문을 창간한 서재필(徐載弼)주재의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는 일찍이 한국 민족에게서 찾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사상을 넣어 주었다. 그것은 첫째로 자주독립의 사상이었고, 둘째로는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의 제창이었다. 이를 뒷받침한 것은 서재필이 미국에서 지니고 돌아온 민주주의 사고방식이었다. 그러므로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는 한제국의 국정개혁을 부르짖었고 외국의 침략세력을 막는데 힘썼다. 동시에 봉건적인 보수주의자에 대하여서도 날카로운 화살을 던져 개화운동에 돌진하였다.
이리하여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은 한국에서 상하귀천(上下貴賤)의 차별이 있을 수 없는 것을 주장하였고 벌족(閥族)의 타파와 만민의 평등을 부르짖어 자유와 민권(民權)의 민주주의를 창도하였던 것이다. 이 두 기관의 지도적인 인물은 앞서 말한 서재필을 비롯하여 이상재(李商在), 윤치호(尹致昊) 등으로 모두 기독교의 사상에 물들은 사람들이었다.
서재필, 윤치호 등은 배재학당에서도 강의를 담당하여 당시 학생들에게 많은 정신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리하여 배재학당에는 처음으로 자치적인 학생회가 조직되었으니 이것이 협성회(協成會)였다. 이 협성회에서는 당시 학생이었던 이승만(李承晩), 양홍묵(梁弘默), 유영석(柳永錫)등의 손으로 「협성회회보」가 창간되었다. 이것은 주간신문으로서 서재필의 「독립신문」을 본받아 만들어졌던 것으로 순 국문으로 된 것과 편집 체재에 있어서 거의 「독립신문」과 같았다. 또 그 기사와 사설의 논조(論調) 역시 매우 혁신적이어서 커다란 주목을 끌었다. 이것이 마침내 당시 보수파의 정부 요인들 비위를 건드리게 되어 고종의 이름으로 폐간을 권고 당하게 까지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범연히 넘겨버릴 수 없는 일은 이러한 신문들이 모두 프로테스탄트의 직접, 간접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았다는 점이다. 전기 두 신문이 모두 배재학당 내에 설치되었던 활판소에서 나왔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으나, 그보다도 당시의 언더우드와 아펜셀라 두 선교사를 비롯하여 프로테스탄트의 선교사들의 정신적인 원조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 말한 바를 다시 간추려 본다면 한국의 민주주의 사상을 가져오게 한 것은 프로테스탄트이었다는 점이다. 이를 다시 적극적으로 밀고 나간 것이 「독립신문」「협성회회보」 등이었다. 프로테스탄트는 교회 내에서 교인들로 하여금 투표하는 법과 이로서 목사라든가 장로, 혹은 집사를 선출해내는 선거를 실시하여 한국인으로 하여금 민주주의 정치에 하나의 기본적인 방식을 가르쳐 주었다. 이것은 실로 특기할만한 사실로서 한국에 민주주의를 가져다 소개한 것은 프로테스탄트의 커다란 공적이라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