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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가 한국 신문에 미친 영향
최준 <홍익대학 신문학과 교수>
    6. 자주 독립 사상의 앙양

한편 프로테스탄트는 한국 민족에게 자주독립(自主獨立)사상을 가슴속 깊이 뿌리를 박게 하였다. 한국은 지리적으로 대륙(大陸)에 속하여 일찍부터 중국 대륙의 여러 민족들과 접촉하여 왔고 고구려(高句麗)시대에는 그 판도(版圖)를 만주와 산동(山東) 근처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후 만주의 여러 민족으로부터 침입을 닿여 국토의 일부를 잃었고, 고려(高麗) 시대로부터는 중국 대륙을 장악한 원(元) 나라의 혹독한 침략을 받아 한민족은 크게 괴로움을 맛보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한국에는 사대주의사상이 퍼지기 시작하여 중국대륙을 손아귀 속에 넣은 역대 왕조(王朝), 이를테면 원나라를 비롯하여 명(明)나라, 그리고 청(淸)나라 등에 조공(朝貢)을 바쳐 말하자면 중국에 반 예속(隸屬)된 나라가 되고 말았다. 물론 이때의 한국민족은 조공을 바치기는 하였으나, 최근세사에 나타난 식민지정책에 시달리는 것과 같은 완전히 자주 독립권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두고 중국대륙 역대 왕조에 조공을 바치는 습성(習性)은 어느덧 자주 독립적인 사상이 희미해졌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민족의 독립이란 어휘조차 잊어버릴 지경으로 이를 입밖에 내는 일이 없었다.

이러한 한국민족에게 있어서 민족의 자주독립을 정면으로 내세우고 나타난 것은 앞장에서도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서재필의 「독립신문」의 등장으로부터 그 시초라 보겠다. 또한 독립협회가 그것이었다. 이에 앞서서는 1884년에 갑신정변을 일으킨 혁신파들의 국정 개혁 운동을 잊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이들 혁신파들은 조공을 바치는 것을 폐지하자고 외쳤다. 이것은 말을 바꾸어 말하면 민족의 자주독립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주 독립이란 말이 정정당당하게 나타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한 때부터였다. 이러한 용어와 더불어 그 정신은 당시 혁신적인 여러 독립협회원들간에 급속도로 퍼졌고 때마침 교세를 펴기 시작한 프로테스탄트는 더욱 이를 부채질하였다.

1900년 이후의 통계를 볼 것 같으면 프로테스탄트에 입교한 한국인 신도는 이미 13,569명에 올랐다. 즉

장로회교인……13,569명…(郭安連編 「長老會史典彙集」 1918年版)
감리회교인……4,512명…1934年 「監理會報」 二卷六號

이들 한국인교인들은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발견하는 동시에 그 교리를 통하여 민주주의적인 자주독립 정신을 되살려 내었다. 그러므로 이 연대의 한국에서는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국민 대중들도 이들 기독교인들의 부르짖음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부르짖음은 정당하였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당시 일본의 침략주의가 한국에 강력히 뻗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의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종이었을뿐 아니라 한국 민족의 오래 잠자고 있던 자주독립 사상을 다시 되살려 일으킨 전투적인 길라잡이였다.

이로 말미암아 기독교인은 군국 일본의 새로운 침략자에게 커다란 탄압을 받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백오인사건(百五人事件)이었다. 한일합병을 강행하여 한국의 국권(國權)을 빼앗은 군국 일본은 자주독립을 부르짖는 기독교인을 가장 미워하였다. 그리하여 1911년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사내(寺內)는 기독교와 애국자를 탄압하기 위해 터무니없는 사내총독 살해음모사건을 조작한 후 七백여명의 한국인을 검거하였다. 그 중 123명이 기소되어 송청되었으며 체형을 받은 자가 105명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백오인사건의 진상이다. 이때 검거되고 또 체형을 받은 사람은 거의가 기독교인이었다. 윤치호(尹致昊), 이승훈(李昇薰), 옥관빈(玉觀彬) 등을 비롯하여 양기탁(梁起鐸), 안태국(安泰國), 임치정(林蚩正), 유동열(柳東說)등 여러 애국자들이 10년 혹은 7년 형을 받았다.

이러한 총독부의 허위사건을 조작한 주 목표는 자주독립을 주장하는 애국자를 탄압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기독교를 압박하며 그 지도자를 탄압하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프로테스탄트의 활동을 뿌리채 없애려는 데서 만들어진 한 말로 해서 기독교탄압이었다. 이에 대하여 당시 한국에 와있던 모펠, 맥큔, 위트모어, 노르만, 아빈손 등 여러 선교사들은 미국 장로회 전도국에 사건의 진상을 보고하는 동시에 사내 총독에게 항의 각서를 보냈다. 미국장로회 전도국 역시 워싱톤에 주재하고 있던 일본 대사에게 항의하였다. 이 때의 한국인들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발견인 동시에 또한 커다란 기쁨이었다. 새로이 기독교에 입교한 한국인들은 그 조직체로 교회를 마련하였고, 또 성경을 들고 거리에 나서서 당당히 전도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민족의 자주독립 사상을 부르짖었다. 하나의 실례를 들자면 구연영(具然英) 같은 사람의 출현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일찍이 기독교 신자가 되어 상동(尙洞)교회를 중심로한 엡웓청년회가 조직되자 전덕기(全德基)와 함께 청년운동에 밤낮으로 맹활동하였다. 그는 다시 신학을 공부한 후 전도사가 되어 믿음·소망·사랑(信·望·愛)의 삼대 원칙을 부르짖고, 몸소 실천운동에 열중하였다. 이렇듯 전도사업에 종사하는 한편 1900년에는 경기도 이천(利川)을 중심으로 구국회(救國會)를 조직한 후 자주정신의 앙양과 항일운동에 적극 나섰다. 그후 그는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를 규탄 공격하기에 바빴다. 이때 일진회원들은 구연영의 활동에 대하여

『서울 동편 10여군에는 구연영만 없으면 기독교도 없어질 것이며 배일자도 없어질 것이라』

고 당시 일본 헌병에게 고발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여러번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고난을 당하였고, 드디어 일본군의 총탄에 쓰러져 순국하였다.

요컨대 이러한 사실은 프로테스탄트가 한국민족에게 자주독립사상을 강력히 뒤밀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후 1919년의 전민족적인 독립운동 때에는 역시 기독교인드이 이에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고, 그 후에도 계속하여 음으로 양으로 이 자주독립사상 운동에 급선봉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프로테스탄트의 출판을 통한 문서 운동은 한국인에게 커다란 빛을 던져 주었다. 그후 1890년 조선예수교서회의 발족으로 더욱 활발하여졌음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예수교서회에서는 주로 기독교에 관한 여러 가지 책을 발행하였으며 한편 한제국에 와 있던 선교사를 포함한 미국인들은 사민필지(士民必知)를 비롯하여 산학신편(算學新編), 지세략해(地勢略解), 생리학(生理學), 천문학(天文學), 논리학(論理學), 철학(哲學), 미생물학(微生物學), 의로역정(醫路歷程), 세계역사(世界歷史)등의 일반교과서도 서술 출판으로 한국의 자주독립사상을 고무하였으며, 나아가서는 근대문호를 이끌어 올리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1. 한국말 성경의 출현의 뜻

   2. 성경을 앞잡이로 한 기독교의 전래

   3. 문서운동에 성공한 프로테스탄트

   4. 프로테스탄트와 신문

   5. 민주주의 사상을 펴다

  6. 자주 독립 사상의 앙양

   7. 매스 메디아로서의 공헌과 그 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