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으로서 성서가 한국문학, 특히 한국 현대소설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인 실증(實證)들을 검토해 왔다. 물론 이밖에도 상서의 영향을 지적할만한 작품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나, 그 영향의 한계와 성격은 이상 언급한 작품의 범주(範疇)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취급된 작품들은 성서가 한국 현대소설에 미친 영향의 총화(總和)라고 보아서 무방할 것이다. 또한 그것만으로도 성서가 한국 문학에 끼친 정신적 영향을 평가하기에 족하다. 확실히 성서의 영향은 오늘의 문학정신 속에 결코 소홀히 여길 수 없는 하나의 뚜렷한 기석(寄席)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성서의 영향이 한국적 지성의 한 측면(側面)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성서가 우리 나라에 최초로 유입(流入)되었을 때, 그것은 무엇보다도 한글을 보급시켰다는 점에서 신문화운동에 기여(寄與)한 바 공적이 다대(多大)했다는 것은 이미 세상이 공인(公認)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의 현대적 과정에 있어서 그것이 기동적(起動的) 요인(要因)이 되었다는 점이다. 즉 봉건적인 생활양식을 지양(止揚)하고 서구문화(西歐文化)와의 맥락(脈絡)을 지어줌으로써 현대적인 과정에로 유발시켜 새로운 문화사적 국면(局面)을 환기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한국적 지성(知性)의 중요한 일면이 기독교정신에 의해서 조성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동시에 그러한 지성의 일면이 문학정신 속에 반영되었다는 것은 차라리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기독교 정신은 아직 한국의 문학정신을 지배할만한 영도력(領導力)을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적(非基督敎的)인 사상의 대항적 영향(對抗的 影響)을 극복할 만한 능동적인 작용력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작가들에게 무엇보다도 요청되는 것은 성서의 정신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데만 그칠 것이 아니라 보다 주체적으로 내면화(內面化)해야 한다는 점이다. 성서와 문학의 관계를 말하는 사람들이 흔히 성서가 가지는 문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그로 인한 영향을 중시(重視)하고 있으나 그것은 성서의 가치를 부당하게 의곡(歪曲)하는 독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본시 성경말씀이 그 뜻과 아울러 문학적으로 귀하고 보배롭고 아름다운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번역된 성경도 값있고 귀중한 것이다. 가령 「틴달」과 「킹·제임스」역의 영어성경이 영문학의 훌륭한 모본(模本)이 된다는 것이라든지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이 독일문학으로 귀중한 값이 있다는 것은 웬만큼 문학의 상식이 있는 사람은 다 알고 인증하는 일이다.
이상은 전영택의 「文學人과 聖書」에서 인용한 글인데, 이러한 견해가 발 성서가 지니는 문학적 영향에 대한 일종의 편견이다. 그렇다고 성서의 문학적 가치를 과소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서의 가치와 그 영향력을 문학적인 기준과는 별개의 범주(範疇)에서 인정하고 싶기 때문인 것이다. 가령 영어성서의 문장스타일이 영국산문(英國散文)의 금자탑이라고 해서, 성서의 가치와 그 영향을 그러한 문체상의 과점에서만 시인한다면 그것은 성서의 보다 중요한 가치를 몰각하는 것이 된다. 이에 대해서 T·S·엘리옽은 「종교와 문학」 Religion and literature(Essays Ancientand Modern, p, 96)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가 있다.
나는 「문학으로서의 성서」「영국산문의 금자탑」이라는 것만으로 성서의 가치를 인정하는 문학인들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다. 「영국산문의 금자탑」으로서만 성서를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단순히 기독교 묘지에 세워진 기념비(記念碑)로서 칭송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여기서 일언이폐지(一言而廢之)하고 다만 「크라렌든」, 「기본」, 「뷰폰」 또는 「브래드레이」등의 작품들이 만일 역사로서, 과학으로서, 그리고 철학으로서 각기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면 그것은 문학적 가치로 보아서 저급(低級)한 것이 되리라는 것과 같이, 성서가 문학으로서 여겨졌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에 영문학(英文學)에 문학적 영향을 끼쳐 왔다는 것을 시사(示唆)하는 것으로 족(足)한 줄 안다. 그리고 문학인들이 이것(성서)을 「문학」으로서만 논의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성서가 주는 문학적 감화력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문학」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궁극적 가치를 보유(保有)하게 되는 것이며 그 영향력도 그러한 의미에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그 문학적 가치보다도 정신적 가치에서 귀중한 영향력을 시인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엔 우리말 성서의 문체가 산문문학에 별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것은 유감스럽긴 하나 보다 우리가 소중히 받아들여야 할 것은 그것이 주는 정신적 감화력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진지하게 실현될 때 성서의 공헌은 한국문학의 영토에 구체적인 결실로 나타날 것이며, 여기에 비로소 진정한 기독교적 소설이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우리말 성서의 번역에 대해여 한마디 부연(敷衍)하고자 한다. 우리 나라에서 처음 번역된 우리말 성서는 당시 신문화 운동의 중요한 내용의 하나였던 언문일치운동(言文一致運動)에 있어서 선구적 공헌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한글의 광범한 보급을 촉진시키는 데도 기여한 공적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반세기 이상의 시간이 경과하는 동안 우리나라의 산문문체(散文文體)는 거의 현대적인 세련성(洗練性)을 갖추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서의 문체만은 의연히 전세대(前世代)적인 구태(舊態)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새로 자라는 세대에 친숙해 질 수 없으리라는 것은 빤한 일이다. 성서의 문체는 무엇보다도 시대적 감각과 호흡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은 선진국가에서 개역을 쉴새없이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이 구체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성서의 번역사업은 어디까지나 독서와 이해면에 있어서 최대한의 능률적 효과를 나타내야 한다는데 그 사명의 일단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성서번역위원회에서 진행중인 번역이 어떻게 나타날지는 두고 보아야 할 것이지만 여기에 번역문체에 대한 사견(私見)을 덧붙인다면,
첫째 : 용어를 보다 평이한 것으로 선택할 것. 둘째 : 현행되고 있는 완전한 구어체(口語體)를 사용할 것. 셋째 : 우아(優雅)와 간결을 위주로 할 것. 넷째 : 보다 풍부하고 세련된 어휘를 구사(謳使)할 것 등이다.
그러므로 문체상의 수식을 위해서는 비록 어학력이 없드라도 우리나라의 정평있는 문장가들의 보조와 협력을 구하는 것도 무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울러 부언하는 바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