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로 인쇄된 성서는 라틴어 불가타를 구텐베르크가 42행 성서로 인쇄한 것이었다. 그리스어 신약이 최초로 인쇄된 것은 1514년 1월 10일에 나온 「여러 번역 대조 성서 (Complutensian Polyglot)」에 실린 신약이다. 그 후 1516년 3월 1일에는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의 「그리스어 신약」이 바젤에서 나온다. 그런데 에라스무스는 신약 전체가 포함된 신약 사본을 구할 수 없었기 때 문에 그의 그리스어 신약은 어느 한 본문 전승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사본을 반영한다. 그는 12세기경의 서로 다른 세 사본 (복음서 사본, 사도행전과 서간 사본 및 요한계시록 사본)을 합쳐서 그리스어 신약을 만들었다. 특히 계시록의 경우에는, 사본 마지막 쪽이 떨어져 나가, 계시록의 마지막 여섯 절은, 에라스무스가 제롬의 라틴어역 불가타에서 그리스어로 되번역하여 삽입시킨 것이다. 이 밖에도 여기저기에 에라스무스가 라틴어역 불가타에서 그리스어로 재구성하여 넣은 본문이 많이 발견된다. 그가 재구성한 그리스어 본문은 사실상 어느 그리스어 사본에서도 발견되지 아니하는 것으로서, 그가 만들어 넣은 본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재구성을 포함한 본문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소위 '수용본문(受容本文 Textus Receptus)'이라고 하여 전승되고 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독일어역 신약(1522)과 틴들(William Tyndale)의 영어역 신약(1525)은 둘 다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 제2판(1519)을 대본으로 하여 번역된 것이다.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에 이어 여러 편집자들과 인쇄업자들이 여러 형태의 그리스어 신약을 편집해서 출판하였다. 다소 차이는 있으나 대다수가 후기 비잔틴 지방 본문의 사본에 반영된 것과 같은 형태의 본문을 재생시킨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주목할 만한 편집 은 스테파누스의 그리스어 신약이다. 1550년에 나온 그의 그리스어 신약 제3판은 본문 비평 장치를 갖춘 것으로서, 역사상 최초의 비평적 편집이다. 그 이듬해 1551년에 제네바에서 나온 스테파누스의 그리스어 신약 제4판은 숫자로 절 구분이 되어 있는 최초의 그리스어 신약으로 유명하다.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도 1565년부터 1604년까지 무려 아홉판 이상의 그리스어 신약을 출판하였고, 1611년에 나온 제10판은 그의 사후에 나온 것이다. 베자가 편집한 그리스어 신약은 소위 '텍스투스 리셉투스'라고 하는 개념을 일반화시키고 고정시키는 일에 한 몫을 하였다. 1611년의 영어 「제임스왕 역본(King James Version)」의 신약 번역 대본이 되었던 것도 바로 베자가 1588∼89, 98에 편집한 「그리스어 신약」이었다.

'텍스투스 리셉투스(Textus Receptus)'라는 말은 '모두가 받아들이는 본문'이라는 말로서, 본래는 인쇄업자들인 보나벤투라 엘제비어(Bonaventura Elzevier)와 아브라함 엘제비어(Abraham Elzevier) 형제가 그리스어 신약 제2판(1633)을 인쇄할 때 서언에서, 자신들이 인쇄한 그리스어 신약을 두고, 독자들에게 "이제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께서는 아무런 변경도 가하여지지 아니하고 와전됨이 없는, 모두가 받아들이는(Receptum) 본문(Textum)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Textum ergo habes, nunc ab omibus receptum in quo nihil immutatum aut corruptum damus)"라고 한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좀 허풍이 있는 광고 문안임에 틀림없다. 여기에서는 에라스무스와 스테파누스의 그리스어 본문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신약의 이 '수용본문'이란 후대의 첨가가 많은 본문, 곧 본문 비평 이전 시대의 산물이다. 비록 '수용본문'이라 했고, 실제로 널리 유포되고 있기도 했으나, 비잔틴 지방 본문의 사본들은 수세기 동안 본문에 가해진 본문 변경의 축적으로 사본들 중에서는 열등한 사본으로 분류된다.
대의 사본들에 근거한 비평적 편집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1831) 칼 락흐만(Karl Lachmann)부터였다. 이어서 티셴도르프(Constantin von Tischendorf)의 그리스어 신약 8판(1869∼1872), 케임브리지의 두 학자 웨스트콧(B.F.Westcott)과 호르트(F.J.A.Hort)의 그리스어 신약(1881) 등이 나왔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더 고대의 사본들을 발견하여 보다 더 원문에 가까운 그리스어 신약 편집을 하게 되었다.
금 세계의 120여 곳 각 나라 성서공회 번역실에서는 신약의 번역 대본으로 주로 두 가지를 쓰고 있다. 하나는 네슬레-알란트의 「그리스어 신약」(Nestle-Aland, Novum Testamentum Graece)이고 (이하 NTG), 다른 하나는 세계성서공회연합회의 「그리스어 신약(The Greek Testament)」이다(이하 GNT). 이 두 비평적 편집은 그리스바하(Griesbach)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시대의 노작이다.

네슬레(Eberhard Nestle)가 NTG를 처음 편집하여 출판한 것은 1898년이다. 그것은 독일의 비르템베르크성서공회의 지원으로 출판된 것이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소위 '수용본문'이라고 하는 것이 아직 우세하게 유포되고 있던 무렵이었지만, 19세기 말의 신약학계에서 종래의 '수용본문'은 이미 가장 빈약한 신약 본문으로 판정을 받고 있던 터였다. 종래의 '수용본문'의 약점을 극복하여 보려고 시도된 것이 티셴도르프(Tischendorf 1841, 1869-72), 트레겔레스(Tregelles 1857-1872), 웨스트코트과 호르트(Westcott-Hort, 1881) 등의 비평적 편집 활동이었다.
네슬레의 NTG는 19세기 신약 본문 연구의 결실들인 티센도르프, 웨스트코트-호르트, 웨이머트(Weymouth, 1886; 1901년 이후부터는 바이스, Bernhard Weiss) 등이 편집한 본문을 기본 본문으로 삼았다. 네슬레는 이들 세 종류의 그리스어판을 비교하여 가면서 다수의 사본들이 일치하는 다수결 본문(majority text)을 만들었다. 세 가지 그리스어판을 비교하여 두 본문이 같고 한 본문이 다를 경우는 두 본문을 다수결 본문으로 택하고, 나머지는 난외의 본문 비평 장치에 넣었다. 세 가지 그리스어판이 다 다른 본문을 보일 때에는 조정하는 해결책을 쓰곤 하였다.

그 후 에버하트 네슬레의 아들 어빈 네슬레(Erwin Nestle)가 1927년에 NTG 13판을 낼 때에 사본 비교, 번역판 비교, 교부들의 신약 인용구 비교 등이 첨가되면서, 본문 비평 장치가 더 확대되었다.

쿠르트 알란트(Kurt Aland)가 네슬레의 NTG 편집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952년 NTG 21판부터였다. 특히 1963년의 25판은 여러 번 반복되어 인쇄되었다. 이렇게 되면서부터 네슬레판 그리스어 신약은 네슬레-알란트판으로 불리면서, 비평적으로 편집된 그리스어 본문 자체와 본문 비평 장치의 우수성 때문에, 신약학계에서 새로운 '표준 본문'으로 그 권위를 인정받기에 이른다.

네슬레-알란트의 NTG 25판(1963)은 1930년대 이후, 새로 발견된 주후 200년경의 파피루스 사본들을 본문 재구성에 반영시킨 것이기는 하지만, NTG 26판 자체는 아직 예비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서, 편집자인 알란트 자신은 25판의 것과는 많은 차이가 나는 새로운 형태의 본문(text)과 본문 비평 장치(apparatus)를 준비하였다. 이 작업의 결과가 반영된 것이 바로 GNT 1판(1966)과 NTG 26판(1979)이고, GNT와 NTG는 그 후 계속 수정, 증보되어 GNT 4판(1993)과 NTG 27판(1993)까지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