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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가을 통권 제 53권 3호
우리나라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 귀츨라프와 한국어 서원석

우리나라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 귀츨라프와 한국어
개신교 선교사로서 우리나라를 최초로 방문한 사람은 독일 출신의 칼 프레드릭 어거스트 귀츨라프(1803-1851)이다. 그는 1827년, 네델란드 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자바의 바타비아에 도착하여 중국 여러 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일찍이 중국 선교를 시작한 모리슨의 집에 머물렀다. 그는 거기서 중국 무역을 하고 있던 영국의 동인도회사와 접촉하게 되었다. 이 동인도회사는 1천톤 급의 군함 암허스트를 준비해서 한국, 일본 오끼나와, 대만을 순방하며 영국과 무역을 열기 위하여 항구를 조사하고 그 나라 관리들의 관심을 살피려고 하였다. 귀츨라프는 이 배의 통역 겸 의사로 함께 동행하였다.


귀츨라프는 모리슨으로부터 받은 중국어 성경과 기독교 문서 그리고 선물 등을 가지고 출발하여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로서 1832년 7월 17일, 황해도의 서해안 장산곶 부근에 도착하였다. 귀츨라프는 그 곳에서 한 노인을 만나 한문으로 필담을 나누며 가지고간 책과 선물을 주며 접근하였다. 또한 그는 한국인과 물물교환을 하며 지방 관리를 통하여 조정에 청원서를 보내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호기심을 보이기는 하였으나 정부 당국과 접촉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귀츨라프 일행은 7월 27일, 충청도 홍주만 고대도 앞으로 옮겨 지방 관리를 만나 조선 국왕에게 청원서와 선물을 보낼 수 있었다. 그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주민들과 접촉하여 성경과 전도 문서를 주기도 하고 감자 심는 법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으나 당시 주민들은 이런 것이 국법에 어긋난다고 꺼려하였다. 귀츨라프 일행은 상륙하여 불교 사찰을 둘러보기도 하였으나 한국 관리들은 백성들의 접근을 막았다. 8월 9일, 서울에서 통역관을 대동하고 내려 온 특사는 귀츨라프가 보냈던 청원서와 선물을 돌려주면서 중국 황제의 허락 없이는 외국과 통상할 수 없음을 알려 주었다.


이렇게 귀츨라프는 한국에 한 달간 머무른 후 떠났다. 그는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한국인들에게 어떻게 해서라도 복음을 전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단추 하나’라도 외국인으로부터 받아서는 안된다는 국법으로 인하여 귀츨라프의 노력은 열매를 거두지 못하였다. 첫 선교사의 방문은 아쉽게도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귀츨라프의 “한국어에 대한 소견(Remarks on the Corean Language)”에 대하여

귀츨라프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어에 대한 짧은 글을 번역하여 소개한다. 귀츨라프는 1832년 11월에 발행된 Chinese Repository I (1832년 11월) 276-279쪽에 “한국어에 대한 소견(Remarks on the Corean Language)”1)이라는 짧은 글을 발표한다.

 

한국어에 대한 이 글을 쓴 이의 이름이 이 글의 난하주에는 Charles Gtzlaff로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이 글을 쓴 이가 칼 귀츨라프인지는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독일어 이름의 칼(Karl)과 영어 이름의 촬스(Charles)가 같은 계통이라는 것, 이 당시 활동했던 중국 선교사 가운데에서 귀츨라프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던 선교사가 없었다는 점

 

2) 그리고 1832년 칼 귀츨라프가 동인도회사의 배를 타고 한국을 포함한 중국해안과 포모사(Formosa), 루추(Loo-choo) 등을 통역사로 방문했다는 점을 미루어보면,3) 한국어에 대한 이 글을 쓴 이가 칼 귀츨라프가 아닌가 추정해본다.4) 영어로 쓰여 있는 이 글에는 오기가 몇 군데 눈에 띈다. 우선 영어 표기가 잘못된 곳은 첫째 단락과 일곱째 단락에 나오는 “speech”와 “seems”라는 단어에 각각 영어 알파벳 “e”가 빠져 있다. 그리고 한국어 모음을 소개하는 넷째 단락에 나오는 “ㅓ”와 “ㅕ”가 “ㅏ”와 “ㅑ”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인쇄상의 오류가 아닌가 짐작된다. 아래에 그의 글 가운데서 일반적인 서론에 가까운 내용인 첫 단락을 제외한 나머지를 번역하여 소개한다. 특히 한국어 설명과 관련된 일부 부분만 원문을 소개한다.

 

1) Chinese Repository는 1832년부터 1851년까지 중국에서 발간된 월간지이다. 미국해외선교국(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 소속 선교사이며 중국어 성경인 『브리지만·컬벗슨역』(1864년)을 펴낸 일라이자 브리지만(Elliah Coleman Bridgman)이 이 월간지를 창간하여 1847년 그가 상하이로 떠날 때까지 책임 편집자로 일했다. 그 이후 1848년 9월까지는 일라이자 브리지만의 친척인 제임스 브리지만(James Granger Bridgman)이 그리고 그 뒤로는 새뮤얼 윌리암스(Samuel Wells Williams)가 편집자였다. 이 저널에 대한 설명으로 Alexander Wylie, Memorials of Protestant Missionaries to the Chinese. Shanghae: American Prebyterian Mission Press, 1867. Repr. New York: Paragan Book Gallery, 1967. 71, 79, 134쪽과 이환진, “19세기와 20세기의 중국어성서.” 말씀의 뜻 밝혀 주시오. 주석과 성서번역. 민영진박사 회갑기념 제2권. 왕대일 편. 대한기독교서회, 2000년. 450쪽을 보라.

 

2) 앞에서 인용한 Alexander Wylie의 책 286쪽(인덱스 I)을 참조하라.


3) Alexander Wylie의 앞의 책, 55쪽.


4) 2002년 10월 1일 감리교신학대학교의 교회사 교수인 이덕주 목사에게 문의해 본 결과 이 교수 역시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일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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