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대한성서공회 > 홍보 > 성서한국
2007 가을 통권 제 53권 3호
언더우드와 성서사업(5) 옥성득

언더우드의 한국 선교의 마지막 시기인 제4기는 미국에서 한국 선교를 위한 모금 운동을 한 후 귀국한 1909년 8월부터 사망한 1916년 10월 12일까지 7년간이다. 이 기간에 그는 백만명구령운동 지도, 새문안교회 예배당 완공, 1911년 3월 조직한 한국기독교교육연맹 사업, 피어선성경학교 설립, 백오인사건 처리, 기독교연합대학(연희전문대학) 설립 등에 진력했다. 성서사업에서는 구약전서를 완역, 출판함으로써 구역(舊譯)《셩경젼셔》(1911)를 완성했고, 이어서 구약전서의 개정 작업을 추진했다. 또한 스코필드관주성경, 중국선교백주년기념 한문 주석서의 번역과 출판도 진행했다.

1. 백만명구령운동과 마가복음 반포백만구령운동을 위한 마가복음 발송 장면

1909년 10월 8-9일 서울에서 복음주의선교회공의회가 열렸다. “한국에서 사역하고 있는 장감 연합 공의회는 기도하고 심사숙고한 후에” 남감리교 선교회의 제의를 받아 들여 백만인 구령 운동을 1910년 공의회의 전도 운동으로 채택했다. 이때 한국에는 약 20만 명의 출석교인이 있었으므로, 한 사람이 4명에게 전도하면 100만 명 목표는 달성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등록교인은 8-9만 명 정도였으므로, 실제로 한 사람이 매달 한 명을 개종시켜야 하는 쉽지 않은 목표였다. 그 결정 다음 날 채프만-알렉산더 부흥사 팀이 서울에 도착했고, 언더우드는 이들을 남대문 밖 사택에서 대접하고 황성기독교회관에서 선교사 대회와 한국인 집회를 열었다.


구령운동의 수단은 기도와 성경과 날연보를 통한 개인 전도였다. 특히 영국성서공회는 마가복음 특별판 70만 부를 출판해서 전도용으로 제공했다. 교인들은 남녀노소가 7일, 10일, 20일, 30일, 심지어 60일을 전도하는 날로 바치고 자원해서 전도했다. 날 연보 총계는 100,000일을 넘었다. 서울에서는 한일합방 직후인 1910년 10월 대규모 전도 대회가 진행되었다. 서울 시내 모든 집을 세 차례 이상 방문하고 전도지와 마가복음을 주고, 모든 극장과 오락장을 한 달 간 전세 내어 전도처로 사용하고, 대형 천막 집회를 열고, 6개 일간 신문에 매일 칼럼을 싣고 복음을 전했다. 서울의 방법은 다른 도시에서도 모방해서 11월 한 달간 전개했다. 대구에서는 길선주 목사를 초청해서 부흥회를 열었다.


그러나 총동원 전도의 결과는 목표에 미치지 못했다. 대구의 경우에도 10일 사경회 동안 500명이 결신했으나, 집회 후에 50명 정도만 접촉이 가능했고 그 중 10명 정도만 교회에 나왔다. 북장로회 선교회의 경우 1909년 9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1년간 세례교인은 25,053명에서 32,509명으로 약 30% 증가했으나, 1911년 8월에는 36,074명을 기록하여 전년에 비해 11% 성장했다. 물론 교회의 성장이 계속되었으나, 한일합방으로 급성장 추세는 꺾였으며, 이후 일제의 기독교 박해 정책으로 인해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었다. 나라가 망하면 교회라는 배가 뜰 물이 줄어든다. 사회가 흔들리면 그 파도에 교회는 심하게 요동한다.


백만명구령운동은 전 교회 차원의 노력도 실패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평양대부흥 백주년을 맞아 부흥을 추진하는 한국교회는 기도와 철저한 준비와 헌신을 하면서도, 백만명구령운동의 교훈을 냉철하게 성찰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뿐 결과는 주께 맡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현실과 이성을 초월하는 메시지를 가지면서 동시에 시대정신을 이끌 비전을 제시하는 운동이어야 할 것이다.

 

2. 구약전서 번역의 완성과 출판,1910-11구약을 번역하고 있는 이승두,김정삼,레널즈

언더우드와 게일이 안식년 휴가를 떠나 번역에 공백이 생기자, 1907년 4월 영국성서공회와 미국성서공회는 구약 번역을 앞당기기 위해 이창직과 김정삼을 번역위원으로 임명해 레널즈와 함께 3인 번역자회를 구성하도록 결정했다. 이로써 한국인 번역자가 조사가 아닌 정식 번역위원이 되어 번역 본문을 놓고 발언권뿐만 아니라 선교사와 동등한 ‘표결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1907년 9월 한국장로교회 최초 7인 목사 안수식과 더불어 한국 기독교인의 위상과 지도력이 향상된 것을 보여주는 획기적 사건이었다.


1909년 8월 언더우드가 서울에 돌아오고 번역자회 일을 다시 시작할 때 남은 책은 에스겔,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소선지서 10권 등이었다. 그동안 대부분의 책을 번역한 전주의 레널즈와 김정삼은 12월까지 에스겔서를 완성했고, 게일은 1910년 1월에 예레미야서를 완성했다. 그러나 예레미야 애가와 소선지서 10권을 맡은 언더우드는 백만명구령운동 일로 인해 분주했으므로 스가랴서 10장까지만 번역하고, 나머지는 전주 번역 팀에 넘겼다.


레널즈, 김정삼, 이승두는 넘겨받은 소선지서 전체를 3월에 번역하고 인쇄소에 넘길 최종 원고는 1910년 4월 2일 완성했다. 레널즈는 서울의 밀러 총무에게 “번역 다 되엇소”라고 전보를 보냈다. 구약 번역 10년 만이었다. 대부분 레널즈의 손을 거쳐 번역되었지만, 창세기와 시편은 언더우드가 주로 번역했고, 스가랴 초고 번역과 예레미야 수정에는 언더우드가 참여했다. 게일은 《과도기의 한국》에서 “성경 번역의 성업에 미력을 바쳤다는 것을 자신의 최고 특권 중의 하나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구약젼셔>(1911)

 

《구약젼셔》는 1911년(명치 44년) 3월 요코하마 복음인쇄소에서 영국성서공회 한국지부 밀러 총무와 미국성서공회 한국지부 벙커를 발행인으로 하여 각각 10,000부씩 출판되었다. 전체 본문은 중년이 지난 사람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4호 활자로 찍었기 때문에 2,650페이지나 되어 상하 두 권으로 출판했다. 이로써 1906년 공인본 신약전서와 함께 성경전서가 완간되었다. 이 성경은 1938, 1956년에 출간된 개역본 성경전서와 대비해 구역본 성경전서로 부른다. 구역본은 일본어의 영향을 받지 않은 세대가 만들었기 때문에 순수한 한글이 많이 남아 있다. 또한 번역회장 언더우드의 직역 원칙하에 레널즈와 게일의 문학적 번역이 가미된 번역이었다. 구역본 성경전서는 아름다운 한글로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낸 좋은 질그릇이 되어 식민지 시대를 살아간 한국 교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했다.

 

 

3. 스코필드 성경의 번역, 1911-16

언더우드와 게일은 전천년설 지지자였다. 구역 성경전서가 출판되자 두 사람은 세대주의 전천년주의를 전파하는 데 많은 영향을 준 《Scofield Reference Bible》(1909)의 주석 부분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스코필드 관주성경은 관주와 본문 제목은 물론 많은 주석이 붙은 해설 성경이었다. 세대주의는 역사적 이스라엘과 교회를 엄격히 구분하고, 대 환란과 천년왕국은 교회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 관련된 것이며, 교회는 대환란이 시작되기 직전 공중으로 휴거되어 재림의 그리스도를 맞이한다고 보았다. 언더우드와 게일은 신약 부분을번역해 1912년 출판사에 넘겼고, 이어서 구약을 번역했다. 언더우드가 1916년에 사망한 관계로 구약은 번역이 중단되어 출판되지 못했다.

 

4. 중국선교백주년기념 주석서 번역 출판, 1911-16
1907년에 중국 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중국의 고참 선교사들은 한문 주석서를 집필 출간했다. 언더우드는 1911-12년에 한국인 번역조사들의 도움을 받아 창세기와 출애굽기 주석을 한글로 번역, 출판했다. 이후 백주년 주석 시리즈는 한국 교회에 널리 사용되면서 1934년 한국교회 희년 기념 주석서인 《아빙돈단권주석》과 1937-39년 박형룡이 편집한 장로교회 표준 성경 주석서 일부가 출판될 때까지 표준 주석서의 역할을 했다. 해방 이전에는 성경, 찬송, 전도문서, 신앙서, 신학교 교재, 신앙고백서, 예배모범을 비롯해 주석서도 중국 교회에서 만든 것을 번역해서 사용했다. 한국교회는 중국교회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5. 구역 성경전서의 개역, 1911-15 

1911년 9월 언더우드, 게일, 레널즈 3인으로 개역자회가 조직되었다. 개역 원칙은 언더우드의 축자적 직역론이었다. 그러나 개역본보다 국한문 구약전서를 우선 요구하는 한국교회의 요청에 따라 게일은 이창직, 이원모, 정동명의 도움을 받아 1912년 7월부터 국한문 번역에 매진하여 1914년 3월에 초고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 원고는 출판되지 않았는데, 초고 작업 과정에서 개인역 수준이었던 구약전서의 한글 본문을 대폭 개정해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선교회 일로 개역에 참여하지 못하던 언더우드와 레널즈는 1915년 여름 소래에서 두 달간 작심하고 개정에 임했으나 레널즈의 신경쇠약으로 이사야서 1-37장만 개정했다. 기력이 쇠진한 두 노 선교사가 휴양지에서도 성경 개역에 매달렸다.

 

6. 언더우드의 사망, 1916

총독부 교육령은 학교 운영자에게 일본어를 요구했다. 언더우드는 고심초사하며 1915년에 어수선하게 설립한 연합기독교대학을 운영하기 위해 1916년 1월 동경외국어학교에 가서 일본어를 배웠다. 개인교습까지 합해 하루에 9시간씩 공부하는 강행군이었다. 학교 설립을 놓고 여러 해 동안 동료 선교사들과 논쟁하면서 기력을 소진한 그는 건강이 악화되자 3월에 서울로 돌아왔다. 다행히 에비슨과 함께 신청한 연희전문학교 설립 인가를 4월 7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되어 4월 인천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잠시 호전되었으나 여름에 열병이 나서 뉴저지의 해양도시 아틀랜틱 시티로 내려갔다. 형 존이 여러 차례 찾아와 위문했고 누나 한나가 간호했으나, 10월 12일 잠자듯이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25세 청년으로 한국에 왔다가 57세 노인으로 별세했다. 19세기의 마지막 개척 선교사요 한국 교회의 큰 별이 떨어졌다. 유해는 뉴욕으로 운구되어 모교회인 그로브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재한 선교사와 한국 교인들은 10월 19일 YMCA 건물에서 따로 장례식을 거행했고 일본 기독교인들도 23일 같은 건물에서 별도의 추모식을 가졌다. 한국성서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조사를 채택했다. “... 우리는 언더우드 박사가 1887년 2월 7일 서울 아펜젤러의 집에서 조직된 성서위원회의 첫 회장이었음을 기억하고 지난 30여 년 간의 한국 사역 기간 동안 그가 29년간 성경 번역자회의 위원으로 지냈음을 회상한다. ... 그와 그의 동료들이 번역한 성경을 통해 그는 ‘비록 죽었으나 오히려 말하고 있으며’ 그가 사랑했고 이제 그를 불러주신 구세주의 복음을 한국인들에게 언제나 선포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2007년 하반기 성서교육문화센터 무료 프로그램 대한성서공회
초기 한국교회의 권서인 소요한 장로 소기천
지구촌에서 펼쳐지고 있는 성서공회 사업 대한성서공회
미얀마에 성경을 보냅시다 서원석
언더우드와 성서사업(5) 옥성득
한국어에 대한 소견 이환진
우리나라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 귀츨라프와 한국어 서원석
KBS 소식 대한성서공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