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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가을 통권 제 53권 3호
초기 한국교회의 권서인 소요한 장로 소기천

초기 한국교회의 권서인 소요한 장로소요한 장로(1892~1958)

초기 한국교회에서 권서인(勸書人, colporteur)은 당시 대영성서공회(The 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 시절에 오늘날로 말하자면 성서공회의 직원으로서, 삼천리 방방곡곡에 성경(단권 성경과 소위 쪽복음)을 가지고 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일종의 외판 행상을 벌이면서 성경을 판매한 매서인(賣書人)이다. 이들은 단지 서적을 판매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산간벽촌에 직접 가서 복음을 전한 복음 전도인들이었다.


나의 조부 소훈식

나의 조부 소훈식(蘇勳植, 1892년 11월 29일 음력-1958년 2월 28일 양력)은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보라리에서 소봉영(蘇鳳永)씨와 한(韓)씨 사이에서 삼남매의 외아들(삼대독자)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7세 때에 모친이 소천한 후, 그의 부친은 삼남매를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쇠골에 있는 외가에 맡기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훈장 일을 보았다. 소훈식은 10대에 예수를 믿게 된 후에, 다시 고향 근처로 돌아와서 김양(지금의 용인)에서 8km가량 떨어져 있던 오미실 교회에 매일 새벽기도회를 다니면서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는 18세에 부친마저 소천하자 일찍 조실부모하여 살기 어렵게 된 후에 혼자 떠돌아 다니면서 힘들게 신앙 생활을 하였는데, 소훈식도 믿는 사람들을 만나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아리실로 들어갔다.


구한말의 의병 대장 최익현은 고종에게 몇 차례 상소를 하였지만 사태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하고 자신의 외동딸이었던 최기남(崔己男)을 윤영채(尹榮彩)와 혼인시켜 짝만 맺어주고 아리실의 산골마을로 피신시켰다. 이 때부터 아리실은 귀양골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아직도 사람들이 숨어 살기에 좋은 장소이다. 이미 그 무렵에 아리실에는 교회가 있었다.


외동딸 최기남이 독실한 신자였기 때문에, 아리실의 모든 형편을 잘 알고 있었던 최익현은 외동딸을 그곳에 보낸 것이었다. 이 때에 소훈식도 교회 가까운 곳에서 살며 예수를 잘 믿기 위해서 아리실에 가서 어느 집의 머슴으로 일을 하였다. 그는 예수를 철저히 믿으며 주일을 범하지 않기 위하여 주일에 해당하는 품삯도 제하면서 피눈물 나는 신앙생활을 하던 중에, 어느 날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교회에서 받은 성경책과 달력이 온데 간 데가 없어져서 그 집 주인에게 물으니, “내가 모두 뒷간에 버렸으니, 너는 딴 생각 말고 짐승처럼 일이나 해라”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들었다. 그 날로 그는 그 집을 나와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누이들과 다시 만나서 오미실에 정착하여 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어느 가을에 벼를 거두어들이고 있는데, 아리실에서 윤영채가 오미실로 찾아와서 “훈식아! 내 딸을 네게 주마! 너 내 딸하고 결혼해라!” 하고 말하였다. 그는 일하다 말고 놀라서 “제가 아리실에서 남의 집에 머슴살던 사람인줄 모르세요?” 하고 대답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동네 사람들도 “머슴 살던 사람을 사위 삼는 사람도 있나!”라고 대꾸하였다. 윤영채는 “아, 그런 건실한 사람도 드뭅니다. 예수 잘 믿는 청년이오”라고 주저 없이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소훈식은 나이 24세 때에 최익현의 외손녀인 방년 17세 처녀 윤금성(尹金姓)을 부인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장로 장립과 권서인의 소명

결혼한 후에 소훈식은 그의 이름을 사랑의 사도인 요한을 본받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이름을 소요한(蘇堯翰)으로 바꾸었다. 그 이유는 나무를 심는데 공을 기울인 그가, 이제는 요한이 되어서 복음전도 일념으로 살겠다고 신앙적인 전환을 이루려고 결심하였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인 1918년에 오미실 인근의 김양 교회1)에서 27세인 약관의 나이에 장로로 장립되었다. 결혼 직후에 부인은 김양에서 냉면 장사를 하였는데, 남편이 장로로 장립된 이후에 곧바로 가게를 처분하였다. 주의 종으로 기름을 받았는데, 세상적인 일에 몰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된다는 신앙적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냉면 가게를 처분한 후에, 그는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었던 중에, 선임 장로이던 유 장로라는 분이 김양 교회의 조사로서 교회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는데, 그 분이 소 장로를 찾아가서 “대영성서공회의 매서 전도인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천거를 하였다. 당시에 권서인이 되는 조건으로 믿음을 첫째로 꼽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그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권서인으로서 그 험난한 복음전도의 첫발을 디디게 되었다.


 

  사역 경로

소요한 장로의 권서 사역은 1918년부터 1938년 은퇴하기까지 만으로 2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가 맡은 전도 구역은 경기도 남쪽 지역으로, 서울 - 판교 - 용인 - 죽산 - 진천 - 증평 - 청주 - 보은 - 영동을 따라서 진행하였다. 걸어서 다닌 전도사역은 문자 그대로 배고픔을 참고 다녀야 하는 길이었다. 시장한 것을 견디다 못해서 남의 콩 밭에 들어가서 한 움큼 손에 쥐고는 그 집안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날 콩으로 주린 배를 달랬다. 어떨 때는 날 옥수수를 한 자루 들고서 그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였다. 모두들 어렵게 살고 잇는 마당에 쪽 복음과 성경책을 사려는 사람을 거의 없었다.

 

소 장로는 거의 나눠주다시피 쪽 복음과 성경책을 전해주면서 전도를 하였고,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우면서 침술과 한약제를 짓는 훈련을 받았는데, 권서 사역을 가는 곳마다 아픈 병자를 치료하면서, 때때로 후한 대접도 받으면서 복음 전도를 효과적으로 하였다. 고무신을 아끼기 위해서 맨발로 다니다가 전도하려는 동네 어귀에 당도하면 그 때에야 신발을 신었다. 얼마나 걸어 다녔던지, 가을에 밤송이를 깔 때 맨 발로 밤 가시를 밟고 발뒤꿈치로 깔 정도였다. 집을 떠나서 한 번 전도를 나가면 일 주일은 보통이고, 이 주일이나 삼 주일도 걸렸고, 경우에 따라서는 한 달씩도 나가 있었다.

 

집을 떠나 있다가 전도를 마치고 돌아 올 때, 소요한 장로는 항상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을 크게 불렀기 때문에, 집에서 기다리던 가족들은 호롱불을 밝히고 다같이 달려 나아가 기쁨으로 동네 어귀에서 상봉하였다. 소요한 장로는 귀가하여 한두 주일 정도를 집에 머물다가, 다시 전도여행에 나섰는데 일년에 대략 40주간 정도를 전도사역에 종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성경전서와 쪽 복음을 담은 궤짝을 그대로 등에 지고 20년을 도보로 다닌 고된 일로 인해서 소요한 장로의 등에는 ‘ㄱ’자 모양의 굳은살이 박혔고, 어깨에는 궤짝을 지기 위해 잡아맨 새끼줄로 인해서 뱀이 지나간 것 같은 흉터가 잡혔다고 한다. 노래(老來)에 소요한 장로는 후유증인지는 알 수 없으나, 허약한 체질로 인해 몸이 아프고 냉해질 때마다 값싼 독부자탕을 다려 먹었다고 한다. 좀 약을 과하게 들었을 때 그의 수족이 뒤로 넘어가서 식구들이 달라붙어 손발을 주물렀고, 아내인 윤금성 권사는 녹두를 씹어서 그 즙을 짜서 입에 넣어 위기를 넘기곤 하였다고 한다.


소요한 장로가 환갑을 맞이하여 부인과 찍은 사진을 보면 그가 실제 나이보다 얼마나 더 들어 보이는지 알 수 있다. 이는 그가 고된 복음전도 사역으로 인해서 육신에 온갖 질병을 다 지니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비록 가는 곳마다 한약재를 다려주고 침술을 베풀면서 복음을 전도하였지만, 정작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소요한 장로 부부의 환갑 사진소요한 장로는 선교사들이 갈 수 없는 낙후된 지역으로 가서 단지 성경책을 파는 일만 한 것이 아니라, 전도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였다. 그는 선교사들에 앞서서 그 길을 예비하였고, 세례 받을 사람들을 훈련시키고 후에 그들을 선교사에게 연결하여 세례를 베풀도록 하였다. 당시에 한국의 언어와 문화에 낯선 외국의 선교사들에게 권서인들은 무척 요긴한 선교 동역자요 선교의 첨병이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소요한 장로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을 찾아가서 그곳에 있었던 모든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수역교회 개척

권서직에서 은퇴한 후에, 소요한 장로는 경기도 용인군 원산면 문시랑(지금의 문촌리)에 거주하였고, 어느 날 집에 불이 나서 살 수 없게 되자 문시랑 교회의 사택에서 거주하던 중 1940년 3월 13일에 서울 영등포로 온 가족이 이사를 가게 되면서 정든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소요한 장로는 서울에서 영등포 교회를 출석하며 봉사하던 중 1943년에 다시 그곳에서 시무 장로로 취임을 하였고,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 해 추운 겨울이었던 12월 30일에 처가가 있던 경기도 용인군 남사면 아리실로 피난을 가서 한약방을 운영하면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아리실에서 몇 달 거주하면서 쌀 네 가마를 모으게 되었는데, 1951년 이른 봄에 그것을 가지고 처가 동네를 떠나서 인근 마을인 이동면 어비리 수역이라는 마을에 있는 흉가를 사서 다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소요한 장로는 수역에 이사한 지 8개월 정도 경과하는 동안에 마을 주민들에게 복음 전도를 한 소요한 장로는 1952년 1월 3일에 동네 주민 40여명을 모아서 자신의 사랑방에서 수역교회2)를 창립하게 되었다. 전쟁 중에 교회가 개척되었으니, 그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먹을 것이 제대로 없었지만, 막 결혼하여 새 식구로 들어온 셋째 며느리3)는 설교를 준비하는 시아버지를 도와드리기 위해서 매주 닭 한 마리를 잡아 드리면서 힘을 북돋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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