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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봄 통권 제 51권 1호
성경난해구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 누가 나그네인가? 민영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개역개정판 신10-17:19]

한 젊은 목회자가, 성서에 보면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고 했는데, 나그네보다 더 다급한 사람들이 있는데, 언제 나그네까지 돌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 목회자는 자기의 집과 교회 건물을 아예 노숙자(露宿者)나 부랑자(浮浪者)나 걸인(乞人)에게 내놓은 사람이다. 여관마저 갈 형편이 못되는 사람들이 와서 자고 가고, 술 취한 사람도 와서 자고 간다는 것이다. 술 취한 걸인의 경우는 옷을 입은 채로 대소변을 보는데, 자신이 대변이나 소변을 보았다는 사실 마저 모르고 다니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런 경우에는 옷 속의 대변이 말라서 걸음을 옮길 대마다 그 조각이 바지 사이에서 떨어져 나온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을 맞아 돌보아 주기에도 자기가 맡고 있는 교화로서는 좀 벅찬 형편이어서 아직 한 번도 ‘나그네’를 대접해볼 여유까지는 없었다고 한다.

그 젊은 목사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세대차(世代差) 라는 것을 느꼈다. 나는 처음에는 그 젊은 목사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다. 50대 후반인 나는 ‘나그네’라는 개념을 넓게 생각하는데, 그래서 그가 맞이한 노숙자나 걸인을 성서가 말하는 ‘나그네’와 아무런 부담 없이 일치시키는데, 이 젊은이는 낱말 사이의 유사점은 극소화하고 차이점은 극대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에게는 ‘나그네’와 ‘노숙자’와 ‘걸인’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60년대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모 교단의 젊은 목회자들이 성만찬을 베풀면서 ‘포도주’와 ‘누룩 넣지 않은 빵’을 사용하는 대신에, 우리 고유의 ‘막걸리’와 ‘송편’을 사용한 일이 있어서, 교계에서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그것은 다분히 토착화신학에 영향을 받은 탓이었다. 포도주도 빵도 다 이국적인 것이므로 우리의 것인 막걸리와 송편으로 주님의 만찬을 준비하는 것이 한국적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썩 좋은 대안이 못되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포도주와 빵은 주식(主食)에 속한 것이었는데 반해 우리의 막걸리와 빵이나 떡은 주식이라기보다는 주변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적절히 선택된 대응 관계는 못 되었다. 특히 빵은 그들에게는 주식이었는데 반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빵이나 떡은 별식(別食)이었다.


그런데, 더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성경전서 표준 새번역』(1993)을 번역하던 80년대 후반에 있었던 일이다. 한 보수교단의 젊은 목회자가 성만찬 예식을 베풀 때, ‘포도즙’과 ‘송편’ 떡을 사용한 것이다. 그의 생각에 포도주(葡萄酒)는 문자 그대로 포도로 만든 ‘술’이므로, 교회가 벌이고 있는 ‘금연금주’ 절제 운동에 어긋나며, 성경에도 “잔을 들어 축사하시고...”라고 했는데, 그 잔이 반드시 포도주가 담긴 ‘술’잔은 아니지 않느냐는 생각에서, 그리고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1961) 그 어디를 보아도 성만찬에서 사용된 요소가 ‘떡’이었지, 결코 ‘빵’은 아니더라고 하면서, ‘송편’ 떡을 고집했다는 것이다.


이 때에도 나는 세대 차를 느꼈다. 나는, 우리 『개역』의 ‘떡’을 ‘먹거리’라는 넓은 의미로 이해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고, 지금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젊은 목회자는 ‘떡’과 ‘빵’을 절대로 혼돈하지 않고 있다. 어디 이 젊은 목회자뿐이겠는가? 식품점에 가서 “빵을 달라”고 하면 빵을 주고, “떡을 달라”고 하면 떡을 주는 엄연한 차이를 잘 알고 있는 젊은 목사는, 『개역』 성서 번역자들이 ‘떡’이라는 말에 함축시킨 폭넓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 수 있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 옛 번역자들의 어휘 이해와 현대의 독자들의 어휘 이해가 그만큼 서로 달라졌다는 점을 착안하게 된다. 이제 우리말 ‘나그네’는 사회적으로 어느 계층을 가리키는 사회학적 용어라기보다는, 다분히 낭만이 긷든 문학적 표현 용어이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하는 최희준의 ‘하숙생’이 그러하고,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욱마다 눈물 고였네. 선창 가 고동소리 옛 임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를 부른 백년설의 ‘나그네 설음’이 그러하다.


성서가 말하는 ‘나그네’는 외국인이 아닌 자국인(自國人)에서도 있을 수 있고 외국인에게서 있을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나그네는 본토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친족이나 고향 사람들로부터 받을 수 있는 보호나 이익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쉴만한 집도 없이, 정착할 땅도 없이, 일정한 직업도 없이,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떠돌며 사는 사람들이다. 나그네를 잘 돌보아야 한다고 하는 구약의 법은, 이스라엘 역시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그네를 환대하도록 한 것이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출 23:9).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신 10:17-19).

이러한 구절에서 보듯이 성서가 말하는 나그네는, 외교법상 보호를 받는 오늘날의 외국인과는 다른, 고아와 과부처럼 의지할 곳이 없는 사회적 피보호 대상과 늘 함께 언급되는 타국인이다. 성서의 나그네는 여행을 취미 삼아 하고 있는 무전여행자나 외국인 관광객 같은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나그네에 해당하는 사람을 예를 들라면, 코리안 드림을 가지고 한국에 밀입국하여 불법 취업을 하면서 온갖 학대를 받고 있는 제 3세계 노동자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성서 번역을 부단하게 지속적으로 해야 할 이유 중에, 세월이 흐름에 따라 말의 뜻이 바뀌기 때문에 번역을 다시 해야 한다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성서를 새로 번역하기 이전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기존의 번역을 읽는 경우라 하더라도 ‘나그네’가 언급되는 문맥을 보면 그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를 아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다만 성서 독자의 머리 속에, 전체 맥락보다는, 어떤 특수한 낱말만이 강하게 각인이 되는데다가, 그 낱말이 원어에서 지닌 의미의 영역과 번역된 말에서 지니고 있는 의미의 영역이 서로 다른 데에서 오는 의미 전달의 혼란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부랑자(浮浪者)나 노숙자(露宿者)는 돌보면서 ‘나그네’까지는 돌보지 못한다고 하는 한 젊은 목회자에게 그가 이미 나그네를 돌보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고, 불법 입국하여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도 성서가 말하는 ‘나그네’의 범주에 든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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