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적 토론과 예배의식에서 사용되는 통일된 본문이 필요하게 되자, 다마수스가 이 일을 제롬(Jerome 일명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 Eusebius Hieronymus)에게 맡긴다. 제롬은 라틴어와 히브리어 실력을 고루 갖춘 기독교인 성서학자였다. 제롬은 세 종류의 라틴어 시편 개정판을 낸 바 있다.

첫 번 개정은 칠십인역에 근거하여 개정되었으므로 일명 "로마 시편(the Roman Psalter)"이라고도 한다. 두번 째 개정은 팔레스틴에서 펴낸 것인데, "여섯 언어 성서 칠십인역(the Hexaplaric Septuaginst)"에 입각하여 라틴어역을 히브리어 원문 쪽으로 가깝게 개정하려한 것이다. 갈리아 지방에서 특히 인기가 있었으므로 일명 "갈리아 시편(Gallican Psalter)"이라고도 한다. 후에 이 시편이 불가타역에 그대로 들어간다. 세번 째 개정은, 어떤 의미에서는 개정이라기 보다는 새로운 번역이다.
히브리어에서 직접 번역된 것이지만, 널리 유포되지는 못했다. 이것을 준비하는 동안 제롬은 고대 라틴역을 다만 그리스어역에 근거하여 개정한다는 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롬은 라틴어 성서를 히브리어 원문 성서에서 직접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390년에 시작하여 405년에 끝냈다.
그러나 이미 서방 교회 안에서는 그리스어 칠십인역이 굳게 자리를 잡고 있었으므로, 제롬의 라틴어역은 처음에는 교회 안에서 정착하기가 어려웠다. 더욱이 제롬의 라틴어 번역이 칠십인역의 내용과도 달랐고 고대 라틴어역과도 다른 곳이 많았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읽어 오던 본문과 다르다고 하여서, 오히려 라틴어역의 권위가 도전을 받았다. 어거스틴 같은 지도자는 제롬의 라틴어역 성서가 그리스 교회와 라틴 교회를 갈라지게 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결국 제롬의 새 라틴어역의 우수성이 인정을 받게 되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걸렸다. 8세기에 가서야 비로소 그의 번역은 "라틴어 불가타(라틴어 보통말 번역)"가 되어서, 종교개혁 때까지 서방 교회의 성서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 후로도 상당 기간 동안 고대 라틴어역과 제롬의 불가타역을 손으로 베껴서 보급하는 과정에서 번역문에 많은 변화가 가해져서 일종의 종합 본문이 되버리고 말았다.
손으로 베끼는 과정에서 본문의 와전까지 겹치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약 8천여 개의 사본들 사이에 이독 현상이 많이 나타난다. 중세기에 불가타역 회복을 위한 몇 번의 시도가 있었으나 번번히 실패하다가, 1546년에 트렌트회의에서 불가타역을 공인하게 됨에 따라, 개정본의 필요성이 더 절실해졌고, 거기에다가, 15세기 중엽부터 발달된 인쇄술은 번역 본문을 정착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교황 식스투스 5세의 식스타인판(Sixtein edition, 1590)이 광범위한 지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교황 클레멘트 8세가 1592년에 새 판을 간행하였다. 이것이 로마 교회의 공인 불가타가 되었다.